52화
글쎄.
처음 얼마간은 이혜준의 존재가 구원이라는 착각도 했다지만, 서창경의 속내를 듣고 난 후에는 다시 지옥에 들어앉은 기분밖에 들지 않았다.
가족이 사는 집이 일시적으로 정화된다고 한들 거기서 마무리될 문제가 아니었다. 서창경이 마음을 돌려 나를 놓아주지 않는 한 진짜 방상시가 오더라도 근원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도대체 내가 지 새끼한테 뭘 잘못했다고 날 좋아한다는 거야. 평생 쥐어 잡혀서 자기 취미 생활 뒤치다꺼리나 하라는 뜻인가?
고백이 천벌을 받는 것처럼 저주스러운 기분이 드는 건 또 처음이었다.
“……들죠. 점점 운이 트이는 것 같아요.”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돼.”
이혜준이 내 거짓말을 쉽게 간파했다. 그러나 나는 나대로 돕고자 애쓰는 그의 위신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나 하나도 안 불안해요. 선배님이 계시잖아요.”
“강지헌 다정병에 걸려서는 이런 상황에서도 내 걱정부터 해 주는구나?”
“…….”
눈깔 삔 이혜준. 내가 저보다 더 예쁘다는 이혜준. 친구 없는 아싸여서 인골 친구로 위로받는 이혜준. 다들 나더러 매정하다고 손가락질하는 가운데 다정하다는 개소릴 지껄이는 이혜준. 나한테 콩깍지 씐 이혜준…….
“나는 마음이 튼튼한 사람이니까 내 걱정은 접어 두고 유리 멘탈 강지헌부터 챙기자? 손잡아도 돼?”
감동적으로 잘 나가다가 뒤끝이 좋지 않았다. 우선순위가 있어서 당분간 제 감정은 접어 두겠다 해 놓고선 손은 잡아도 문제없다고 여기는 거야?
교복을 입던 시절엔 김재원과 길거리에서 대놓고 손을 잡고 다녔더랬다. 학교 친구들은 물론 양가 부모님마저 아무 의심 없이 장난으로 받아들여서 아쉬운 한편으로 안심했던 기억이 있다. 귀엽다며 사진도 잔뜩 찍혔는데.
더 이상 우리는 어리지 않기에 용납될 리 없는 행동이었다.
“되겠습니까?”
무뚝뚝하게 대꾸하며 손을 내미는 그를 지나쳤다.
“에이, 이런 얘긴 손 맞잡고 해야 하는데.”
뒤따라오는 이혜준이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내가 무슨 구박을 하든 견고한 그의 멘탈에는 조금의 흠집도 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성인 남자 둘이서 손을 붙들고 해야 할 정도로 대단한 얘기가 뭔데요?”
“이혜준의 지독하게 좋은 운빨 이야기. 개천사의 천리안으로도 내다볼 수 없는 이혜준의 신변에 대해서 말해 주고 싶어.”
“…….”
뭐? 서창경의 눈을 피할 수 있다고?
우뚝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자, 이혜준이 싱긋 웃으며 두 손바닥을 내밀고 있었다.
“강-(아)지, 손!”
발음이 기이하게 늘어지는 것처럼 들렸지만 잔말 않고 양손을 얹어 줬다. 나누어 쥐고 있던 내 휴대폰과 이혜준의 지갑도 덩달아 올라갔다. 이혜준이 예전부터 꿈꾸어 온 장면이 실현되기라도 한 것처럼 아랫입술을 꾹 깨물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 자식이 지금 사람을 개 취급하고 있어.
별명 탓에 이런 일을 당한 게 한두 번이 아닌지라 다음 장면도 예상 가능했다. ‘헥헥’이지, 뭐.
“이다음은 혓바닥을 내밀 차례인가요?”
“아, 그건 조금…… 나중에? 부탁해도 될까?”
무슨 망상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대답이 야리꾸리했다.
“부탁하지 마요.”
칼같이 자르며 경고했다.
“너 당장은 뭘 제대로 판단할 정신 상태가 아닌 거 같으니까 내가 그때 가서 다시 물어볼게? ……어제 개천사가 공숙선 씨 얘길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을 거야.”
이혜준이 슬그머니 말을 돌리며 휴대폰과 지갑을 수거해 갔다. 남은 손으론 당당히 내 손을 붙잡고 깍지를 꼈다. 바뀐 화제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손을 뿌리쳐야 할 타이밍도 놓치고 눈시울을 치떠 그를 올려다봤다. 공숙선의 이름과 함께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그랬지요. 개놈은 공숙선이 선배님 집에 간 걸 모르는 것 같았죠?
“그 말은, 서창경이 신령을 불러냈더라도 어젯밤 선배님하고 공숙선 씨가 함께 있는 장면을 내다보지 못했을 거라는 뜻이죠?”
나도 그게 의문이었다. 손바닥 들여다보듯 사정을 알아야 마땅한데 고용주는 어떤 말도 없었던 거다. 고용주는 이혜준이 소극장 건물 지척까지 다녀간 일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어. 확실해. 개천사는 이혜준을 몰라. 귀신의 힘을 빌리는 탓에 도리어 나를 찾지 못하는 거지. 차라리 용역 업체에 맡기면 내 행적을 추적할 수 있겠지만 개천사는 그러지 않을 거잖아?”
공숙선에게 들은 말이 있는지 개놈의 예상 행동을 잘 내다보았다.
고용주는 스스로 사고하는 인간은 통제하기가 어렵다며 신뢰하지 않았다. 꼭두각시 역할을 하던 나조차도.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제 의지대로만 움직이는 사령을 불러내 쓰면 되는데 굳이 뭐 하러 산 사람을 고용하느냐는 거다.
“그런데 호령도에 있을 때는 분명 선배님에 대해서 언급했거든요? 제 근처에 불길한 것이 보인다고 말이에요. 고용주가 선배님의 존재를 아예 모르진 않아요.”
“물론 ‘있다’는 건 알겠지. 내가 이 세상에 영적인 존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듯이 말이야. 개천사가 이혜준이고, 내가 귀신이라고 가정해 보자. 개천사가 무슨 수를 써도, 귀안을 틔우는 부적을 사용하더라도 귀신인 내가 보이지 않고 들리지가 않겠지? 이혜준 한정으로 지금 개천사가 그와 같은 상태라는 얘기야.”
“…….”
이혜준이라는 기적이 여태 어떤 일을 해내는지 보아 왔기에 그게 사실이냐고 의문을 품지는 않았다.
이 뜻밖의 무기를 손에 쥐고 어떤 일이 가능한지 다시금 상황을 검토했다.
이 남자를 앞세우고 첫 번째 무속인을 찾아가면 서창경의 눈을 가린 채 저주를 풀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이혜준의 행운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개천사가 이혜준 이름을 들먹이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을 거야. 백 번 들려줘 봤자 그의 귀엔 백 번 모두 내 이름이 입력되지 않을 테니까. 주술을 걸 상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개천사가 무슨 짓을 시도하든 간에 내 주변에는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그러니까 다 죽어 가는 얼굴 하지 말고 네 이혜준 선배 좀 믿어 주라. 응?”
“아니, 이렇게 중요한 얘길 왜 지금에야 꺼내요?”
미리 말해 줬으면 나 혼자서 땅 팔 일 없었잖아?
저도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나더러 불안해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던 거다.
“그야…….”
이혜준이 말을 흐리며 대답 대신 깍지 낀 손에다 꾹 힘을 실었다. 내 손을 잡아끌며 뒤돌아섰다. 앞장서는 그의 입매가 느슨하게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손잡을 기회를 노리느라 직전까지 입 다물었다는 거지?
별안간 나도 생각이 많아져서 얌전히 이혜준이 하자는 대로 주차장까지 이끌려 갔다. 이 상황이 기가 막힌다기보다는 염려가 앞섰다. 그는 내가 줄 수 없는 걸 바랐으니까.
이런다고 내 손이 닳지는 않겠지만, 허튼 기대로 당신 마음이 닳는 것은 아닌지.
그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기에 가시 돋은 말을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정색하고 모질게 굴어야 할 타이밍을 놓쳐 버린 탓에 이제 와 불쾌한 척 법석을 떨기도 어색했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다가오긴 했어도 대개는 맞닿은 손이 아닌 이혜준의 피지컬적인 요소에만 관심이 쏠렸다. 첫눈에는 충격으로 말을 잃었는지 잠잠하다가 곧 웅성웅성하며 뒤통수가 따가워졌다. 학교 캠퍼스 내에서의 반응과 엇비슷했다.
“연예인 중에 저런 사람 없었지? 모델인가?”
“와, 실화냐. 내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네. 한국인 맞겠지?”
“야. 함부로 사진 찍으면 안 돼!”
나에 대한 감상도 섞여 있었다.
“나 저 하얀 애 키가 커서 남자앤 줄 알았네.”
“척 봐도 남잔데?”
“아니야. 요즘은 여자도 저런 스타일 제법 있어.”
“그나저나 쟤는 동네 백수도 아니고 옷이 왜 저 모양이람. 꼭 연예인 따라다니는 로드 매니저 같잖아.”
“그러게. 하고 다니는 게 영 성의가 없네. 둘이 너무 비교된다, 그치.”
야 씨, 나 오늘 ‘그냥 후배’ 콘셉트거든? 심사숙고해서 고른 회색 추리닝이란 말이다!
그냥 후배로 보이고 싶었으면 애초에 손잡고 거리를 활보하지 말았어야 했다.
“크크크큭.”
주차장 건물로 들어서자 이혜준이 비틀거리며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그의 귀에도 수군거림이 다 들어갔던 거다.
“아, 짜증 나. 내가 차 가지고 올라올 테니까 선배님은 여기서 기다리세요.”
아, 이혜준 꼴 보기 싫어.
여태 잡혀 있던 손을 내던지듯 뿌리치며 승강기로 걸어갔다.
“강지, 내가 예쁜 옷 사 줄게. 너무 열 받지 마.”
너나 개지랄 떨지 마. 내 옷을 니가 왜 사 줘?
“나 원래 내가 사는 동네에선 이렇게 입고 슬리퍼 질질 끌고 나다니거든요?”
그 사는 동네가 사람들이 놀러 나오는 중심가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너 학교에 이러고 오지 않으니까 잘 알지. 애인이랑 비교당하지 않으려면 슬리퍼 끌고 다니는 이 동네에서 데이트하는 건 무리겠네. 우리 이제 여기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만 만나야겠다, 그치?”
이혜준이 졸졸 따라오며 약을 올렸다. ‘뭐가 그치야? 누가 내 애인인데!’라고 소리 지르고 싶은 걸 참았다.
도발에 말려들 순 없지.
“재미없으니까 더 하지 마요. 선배님은 입구 근처에 계시라니까.”
“같이 가. 나 심심해.”
“기다리는 동안에 폰 게임이라도 하고 있음 되잖아요.”
진절머리가 나서 잠시나마 떨어뜨리고 싶었건만, 이 찰거머리가 만만찮았다.
“아냐, 아냐. 게임보다 빡친 네 얼굴이 더 재밌는걸.”
“…….”
아오, 빡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