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신부 (50)화 (50/96)

50화

“주변 반응을 보면 금세 파악되지. 너 입대 전에도 그런 경향이 있었는데 동기나 후배 애들 뭐 하기 전에 네 의견부터 물어보잖아. 가만 보면 네 선배들도 네가 하는 말이면 잘 들어.”

아, 난 또 뭐라고.

“내가 만날 때마다 밥 사 줘서 그러는 거잖아요.”

“사람이 먹는 걸로 그리 단순해지지가 않거든?”

“지던데요?”

호감을 살 의도는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두루 원만한 사이를 유지했다. 그렇다고 지시를 내리고 받는 상하 관계는 결코 아니었다.

학생 수가 심각하게 많은 학부라서 밥 사 주고 커피 사 줬던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하지 못하는 데다 개별적인 흥미는 더더욱 없었다.

그런 애들 상대로 무슨 조교 놀이를 해?

“강지, 인간관계 들여다볼 줄 모르는구나? 살아 있는 사람한텐 관심 안 생기니?”

“…….”

정곡을 찔려 잠자코 눈만 끔벅였다.

“섬에서 짐 나를 때도, 석식 준비할 때도, 강지 너랑 주변 애들 분위기가 그대로인 거 확인하니까 예전 생각나서 그리웠어. 너 군대만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 둘이 친해질 기회가 있었을 텐데 말이야.”

정말로 나에 대해서 잘 알던 사람처럼 말하는 그가 신기했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스토커였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된다.

“군대 안 가려면 그 기간 동안은 교도소에 신세 져야죠. 어차피 학교 못 다녔어요. 또 군대에 간 덕분에 고용주하고 그나마 장기간 떨어져 지낼 수 있었던 거잖아요.”

아니라면 지금쯤 나는 회복 불능으로까지 정신이 망가져 있을 가능성이 컸다.

“아닐 수도 있지. 내 생각엔 너 나랑 놀러 다니기 바빠서 개천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놀러를 ‘다녀’? 당신이 다니길 어딜 나다녀? 이혜준 주제에 신빙성 있는 소릴 지껄여야지.

“선배님도 방구석 폐인으로 휴학할 일이 없었구요? 그러네. 선배님이 게을러터진 것도 전부 내가 군대에 간 탓이겠다, 그쵸.”

나는 아무래도 이혜준을 놀리는 데에 재미가 들린 모양이다. 이번 학기는 산공 애들이랑 놀지 말고, 고고학 오비들과 어울릴까도 싶었다. 굳이 술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공통된 화제―이혜준 갈구기―가 있으니 그쪽도 북적북적하고 재미있었다.

그 와중에도 같은 학부생들과 어울린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오십이 넘어가는 인원을 한자리에다 풀어놓고 판을 깔아 줘도 기어이 서로 등을 돌리고 앉아 삼삼오오 짝지어 노는 모습을 보며 새삼 깨달았다.

아. 이런 놈들이었지. 내가 군대에 있는 사이에 애들 기질이 바뀌었을 리가.

구성원을 바꿔 가며 주야장천 조별 과제를 하다 보면 대개가 악착같이 손익을 따져 가며 행동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또, 제가 손해 보는 경우가 아니라면 개인주의를 고수했다. 그게 나쁘다는 말이 아니라 학부 성향이 그렇다고.

눈앞의 이 선배만 해도 사람 수가 불어나면 피곤한 기색으로 입에 자물쇠부터 채우는걸. 난 그냥 호빵이랑만 따로 놀아야지.

“그렇게 놀리지 마. 나 실은 어릴 때부터 기력이 달려서 오래 일어나 있지를 못했단 말이야. 내내 누워 있었어.”

“……!”

“남한테 폐 끼치는 것도 아닌데 드러누워서 지내는 게 뭐가 나빠. 단련된 덕분에 나는 엎드려서 밥 먹어도 체하지 않는다고. 소화력이 얼마나 월등한데. 소화력만 따지면 인외 존재지. 휴식이 필요하지만 시간은 부족한 현대인에게 드러누워서 쉬면서 먹고 공부하고, 일상생활 대부분의 일을 해결한다는 게 얼마나 귀한 스킬인 줄이나 알아?”

“…….”

허-.

엄청난 내용을 소화하느라 잠시 주춤했다가 냅킨 티슈를 한 장 뽑아 그를 향해 집어 던졌다.

한순간이나마 개소리에 설득당할 뻔했네, 진짜.

애기 때 병약했다는 이야기인 줄 알고 마음을 졸인 게 억울했다. 팔랑거리며 떨어지는 종이를 양손을 모아 잡아채며 이혜준도 싱긋 웃었다. 하지만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은 웃어넘길 대사가 아니었다.

“강지, 설정우하고는 얼마나 친해? 내 눈엔 벼룩처럼 달라붙어서 너 이용하는 것처럼 보이던데.”

내가 우리 학부 정보통으로 이용하는 설정우를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견해였다.

“개중엔 친한 편이죠? 군대에 있을 때도 줄곧 연락했거든요. 일종의 학부 비상 연락망 같은 거?”

밥도 술도 다른 전공 애들하고만 어울려 먹는 내게 연락책은 필수 요소였다. 내가 필요해서 유지하는 관계인데 설정우가 날 어떻게 이용해 먹는다고?

“나한테도 정보망은 있거든. 여행지에서 사고 방지책으로 조 짜고 조장 뽑아서 한 명 한 명 동선 다 파악했다며. 네가 그렇게 관리하니까 설정우가 너 끼고 애들 모으는 거잖아. 호령도 여행 때처럼 말이야. 네가 정치적인 인간이었다면 자기가 대신 과대도 하고 내년엔 총학 집행부장도 할 거라며 욕심 못 내지. ……몰랐어?”

어리둥절해하는 내 상태를 알아채고는 묻는다.

“그런 게 보여요? 저는 그놈한테 거기까진 관심이 없어서.”

지가 과 대표를 하든지 학생회 회장을 하든지 내가 알 바 아니었다. 바뀐 강의실과 휴강 소식 등등만 제때 전달해 주면 된다.

며칠 전만 해도 설정우는 내게 연락해서 어느 증권 회사에서 개최하는 모의 투자전에 참가하려는데, 내 이름을 팔아도 되겠느냐고 물어 왔다.

―우리 학부 동아리에서도 여러 팀이 접수했거든. 그중에서 황선우 선배님 팀에 묻어가고 싶은데 2학년은 안 된다잖아. 강지 네 이름 대고 비벼 볼까 해서.

「내 이름을 대면 2학년이 3학년이 되고, 4학년이 되겠어?」

말은 이렇게 해도 황선우의 이름이 튀어나오자, 누울 자리를 제대로 알아보고 다리를 뻗는 설정우의 탐색 센서가 감탄스러웠다.

한때 우리 학부에 스타트업 열풍이 불어 너도나도 창업에 나서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동기와 선배들이 달려드니까 뒤처질까 싶어 함께 달리는 이가 대부분이었는데, 거기엔 혁신적인 아이디어나 기술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황선우도 그 따라쟁이 중 한 사람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팔리지 못한 첫 사업의 재고를 보물처럼 애지중지 싸안고서 침몰하던 중이었다. 나는 그걸 다른 선배의 아이템에 끼워 팔아 재고 처리를 해 주고 황선우가 ‘잘 망하게끔’ 도운 과거가 있다.

사업을 하면서 손해 보지 않고 잘 망하는 건 어렵고도 중요한 일이다. 태권도장을 두 번이나 말아먹은 아버지 덕에 배운 값진 교훈이다.

―그 선배가 강지헌한테 신세 졌다고 노래를 부르는데, 네 절친 하나쯤은 꽂아 주지 않을까? 나 가서 민폐 안 끼치고 제대로 일 인분 몫 할게. 커피 셔틀도 할 거야. 우승 상금 나오면 내 몫은 너한테 다 넘길게.

그때그때 정세를 주시해 가며 기회를 잡아채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나쁘게 보지 않았다. 거래의 기본도 아는 녀석이라 나하고는 이해관계도 들어맞았고.

그나저나 님, 내 절친임?

앉은 자리에서 산공 김재원의 데이터를 줄줄 뽑아내는 걸 보며 느낀 바지만 설정우는 상대방에 대한 잡다한 정보를 대량으로 수집하는 능력이 있었다. 아마도 내 정보 역시 상당 부분 털렸을 것 같다.

반면에 나는 이름과 연락처 이외에는 설정우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어디 살고, 출신 고교가 어디고, 형제가 몇이고, 이런 얘기를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뇌리에 남은 자료가 바닥을 보였다.

마치 서창경이 2년 전에 제 애인과 헤어졌다고 말했다는 사실 자체를 까맣게 잊고 살았던 것처럼.

그 정도 급으로 ‘절친’한 사이인 설정우가 뭘 하든, 내 이름을 팔든 말든 신경 쓰일 리가 없었다. 결국 선배들 틈에 끼어서 인정받는 건 녀석의 능력이고, 내가 중간에서 뭐 대단한 역할이나 해 주는 양 구는 것조차 낯간지러웠다.

「설정우 학생 코 묻은 돈은 필요 없고요. 본인 맛있는 거나 사 드십쇼. 그나저나 우승 후보라니 황선우 선배님이 투자 방면으로 인정받는가 보네.」

사업할 재질은 아닌 듯했는데.

―주식으로 5억 넘게 벌었대! 완전 주식 천재야! 나 진짜 그 선배님한테 열심히 배워서 한 방 크게 터뜨릴 거라고! 강지 너도 같이 참가할래?

「아니, 나는 이번 학기에 좀 바빠서 곤란하네. 그리고 수익만 보지 말고 초기 투자 자본의 함정은 없는지 꼼꼼히 따져 봐야 할 것 같다, 친구야.」

5억이란 액수를 들으니 흥분할 이유가 전혀 없어 보였다. 개미 투자자들의 귀여운 종잣돈으론 좀처럼 도달하기 어려운 이윤이니까.

개미들은 시드 머니로 5억보다 훨씬 큰 액수를 갖추고 시작하는 준재벌 집안의 황선우와는 그 출발점부터 달랐다. 주식 천재 좋아하시네.

주식 공부보다는 인생에서 귀신부터 떼어 내는 게 최우선 과제인 내가 열 올릴 이벤트도 아니었다.

“서로 적당히 이용하며 어울리는 거죠. 설정우 그놈이 뭘 어떡하고 지내든 신경 안 써요.”

“이야, 세상사에 쿨한 강지! 그래. 너 우리 학부에서 나 말고는 아무한테도 관심 없어 보이더라? 새삼 감동이 밀려오네.”

칭찬 같은 욕이 돌아왔다.

하룻밤 새 윤상현, 서창경에 이어 연달아 비슷한 지적을 받으니 새삼 내 쿨함이 화를 불렀구나 싶었다. 사실 별로 쿨한 성격도 아닌데. 억울하다 진짜.

“선배님, 제가 주변 사람을 상처 입히는 유형일까요? 성격이 많이 무뚝뚝한 편이잖아요.”

꿈에 나타난 윤상현을 떠올리며 물어봤다.

“네가? 나는 너처럼 착하고 다정한 사람 만나 본 적이 없는데?”

“……그, 그래요?”

내가 질문할 대상을 잘못 골랐네. 콩깍지 씐 인간에게 물을 일이 아니었구나.

그랬다. 귓구멍까지 썩어서 내가 저한테 욕설을 퍼부어도 말씨가 예쁘다고 칭찬하는 인간은 심사 위원 자격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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