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보이지 않는 신부 (28)화 (28/96)

28화

“샛노랗게요.”

금색과 오렌지색을 섞어 놓은 듯한 호박색이었지만 칭찬한다고 착각할까 봐 대충 둘러댔다.

“그래? 진짜 예뻤겠다.”

“…….”

욕을 하면 오히려 칭찬을 되돌리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깜빡했다.

뭐래. 예뻤겠냐? 눈 마주치자마자 잠시나마 붙었던 신뢰와 정나미도 훅 떨어져 나갔지.

이 한만한 인물과는 몇 마디 대사를 주고받기만 해도 긴장이 풀리고 뇌수까지 노글노글해지는 듯했다. 내게 닥친 사건 사고가 하찮게 변질하는 기분이 들었다. 시퍼렇게 날을 세우고 덤벼들어 봤자 손톱 발톱이 뭉뚝해져서는 어느 순간 전투 의지가 꺾이고 만다.

이 손톱깎이 같은 인간과는 상극은 상극인지 싸움이 성립이 안 되네.

“혹시 가족분 모두가 선배님 같은 체질이에요?”

온 식구가 방상시 눈깔 유전자를 보유하고 있는지 물어봤다.

“아닐걸? 강지헌, 일반 가정에선 귀신 얘길 일상적인 화제로 삼지 않아. 너도 이제는 이런 화제에 관심 끊고 살아야지?”

내가 어떻게 그래요. 무슨 수로.

“식구들이 선배님 체질이 아니라면 나 같은 거 함부로 집에 들이지 마요. 나 돌아간 후에 선배님 댁에 무슨 이상한 일 일어나지 않았어요?”

깨어나자마자 곧장 그 집을 뛰쳐나온 까닭은 이혜준에게 화가 치밀어서만은 아니었다.

“이상한 일, 뭐?”

너무 겁이 없어 보이니 경각심을 심어 주고 싶었다.

“우리 집에선 나 때문에 귀신 나오거든요. 지금 나한테 붙어 있는 새끼요. 가족들이 식겁해서 나는 집에 안 들어간 지 한참 됐어요.”

“…….”

고민 좀 해 보라는 의도로 먼저 자리를 떴다.

이혜준의 손에서 맥주가 가득 든 바구니를 낚아채 계산대로 향했다. 중간에 마른 안줏거리도 찾아 골고루 담았다. 잠자코 뒤따라온 그가 지갑을 꺼내기에 굳이 내가 계산할 거라며 실랑이를 벌이지는 않았다.

이혜준은 나더러 맥주를 들라더니 짐이 두 개나 나오자 와인 상자를 넘겼다. 상자 역시 묵직했지만 맥주와 안주보다는 가벼웠다.

이번에도 선배에 대한 예의를 차리며 ‘내가 할게요! 시켜 주세요!’라고 나서는 대신에 입을 다물었다. 악의가 느껴지지 않는 상황에서 선배님은 어느 시점부터 날 머슴으로 부릴 거냐고 제 무덤을 파며 일깨워 줄 필요는 없으니까.

왜 이렇게 친절하대? 그 죄책감 되게 오래가네.

죄책감은 친하지도 않은 선후배 관계에서 굳이 느끼지 않아도 될 감정이었고, 호령도에서 이혜준은 내게 과분할 정도의 도움을 베풀었다고 여겼다. 계속 미안해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다.

얼굴 위로 줄곧 그의 시선이 따라붙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나로선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혜준을 끌어들일 땐 되레 그가 귀신을 쫓을까 봐 걱정이었는데, 그의 가족에 생각이 미치자 반대로 귀신이 붙을까 봐 걱정이 됐다. 만일에 이 선배님의 집에도 불길한 사고가 연이어져 멀쩡한 사람들이 아프거나 다친다면 어떡한다지.

부적을 가져다준다고 해서 사용할 위인이 아니다 보니 더더욱 마음이 쓰였다.

“우리 식구는 다들 무사하고, 네가 염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 나야말로 지금 네 상태가 궁금한걸. 너 그때 정신까지 잃었는데도 그 회충은 여태 붙어 있대?”

엘리베이터에 올라 단둘만 남자 이혜준이 물었다.

“아마 그럴걸요? 고용주가 별말 없었거든요.”

“개천사?”

“…….”

내 고용주 욕하지 말라며 바락바락 대들던 것이 무색하게도 픽 웃음이 터져 나왔다. 어째서 이 인간이 내뱉으면 욕설도 개그처럼 들릴까.

“너는 그 사람을 고용주라고 불러?”

“아뇨. 알바 사장님이요.”

또, 서창경의 신경을 후벼 파는 데엔 ‘무당’이란 표현이 가장 잘 먹혀서 종종 그렇게도 불렀다.

“너, 그 아르바이트는 뭐 하러 한다고 했지? 달리 돈을 벌 직종이 없어서 귀신을 상대하는 건 아닐 테고.”

“제가 이 회충한테 잡아먹히지 않게끔 도와준다고 해서요. 저는 서창경 씨 덕분에 목숨 부지하고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속마음이야 어찌 됐든 간에 학교 선배님 앞에서는 또 좋게 고용주를 포장했다.

“뭘 어떻게 도왔기에?”

“붙어 있는 놈이 특수한 케이스여서 어지간한 신력을 가진 무속인은 감당하기가 어렵거든요. 비밀 지켜 주겠다고 약속하시면 내가 어떤 저주에 걸렸는지 말씀드릴게요.”

“이걸 어디에다 퍼뜨리라고. 나 친구 없어서 말할 데도 없어.”

이혜준은 내게 제 밑바닥을 모두 오픈하기로 했나 보다. 멋있게 보이려고 폼 잡는 허세가 없었다. 나한텐 잘 보일 필요가 없다 이거겠지?

“호령도에 데려온 친구분 계시잖아요. 박양우 씨랬나?”

“어려서부터 한 동네 살았고, 멀리서 사람 찾기 귀찮아서 회사도 같이 차렸지만 그렇게까지 친밀한 사이 아니야. 내 주변엔 비밀 털어놓을 정도로 친한 사람 한 명도 없어.”

그래, 다정다감해 보이는 관계는 아니었다. 박양우는 어떡해서든 폭행죄로 엮어 이혜준을 파출소로 보내고 싶어 했는데, 그 장난에는 진심이 19.2% 정도 가미돼 있어 보였다.

“자랑이세요?”

“나의 보잘것없는 인간관계 덕에 네가 행복해진다면야 자랑할 만도 하지.”

“저 안 행복한데요?”

내가 친구 한 명 못 만드는 아웃사이더 덕택에 행복할 이유가 뭔데?

“너 지금 웃고 있잖아. 활짝 웃고 있으면서.”

“……!”

엇, 그러게? 나 왜 웃지?

뒤늦게 정색하려 했지만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아 나도 황당했다.

예상대로 이혜준은 네 명의 집주인에게 지극한 환대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외모를 찬양하는 사람은 없었고, 옥장판 사기를 쳐도 용서하겠다는 범죄 권유도 나오지 않았다.

이혜준보다는 그가 가져온 술 상자와 편의점 봉투가 더욱 인기를 끌었다.

그래. 이것이 상식적인 반응이지. 남자 얼굴 쪼오-끔 잘생긴 게 뭐가 대수라고 법석을 부린담.

알코올에 순위가 밀리는 이혜준을 보면서 흐뭇해졌다.

“선배님들, 우리 섬에 놀러 간 다음 날 섬뜩한 사건이 있었는데 얘기 못 들으셨죠? 마침 그 얘기를 하려던 참이었어요.”

이혜준과 내가 거실 바닥에 자리를 잡자마자 호빵이가 말을 꺼냈다.

“…….”

“갯벌에 시체 떠내려온 거 말하는 거야?”

인원이 늘어나자 군중 속의 시크릿 아싸는 또 조개처럼 입을 다물어 버려, 내가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시체 얘긴 꺼내기도 싫었지만 어떻게 호빵이가 하는 말을 무시하겠어.

“아뇨. 그때 우린 버스 안에 있느라 뭐가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어요. 갯벌에 사람들이 진을 치고 경찰도 출동하고 난리 난 것만 확인했죠.”

“그럼 뭐?”

“날이 밝아서 밖으로 나갔더니 대문 바깥이랑 담벼락에 시커먼 손자국 발자국이 수십 개도 넘게 찍혀 있는 거예요. 심지어 네발짐승 발자국도 아니고 커다란 사람 손자국이 땅바닥에 찍혔더라니깐요. 손가락이 꼬챙이처럼 길었어요. 다들 얼마나 기겁했는지. 게다가 물을 부어도 안 지워져! 선배님들이 섬 떠나기 전에 우리 겁준다고 페인트로 장난치신 거 아니죠?”

“…….”

아니라는 의미로 고개를 내저었다. 두 손과 두 발로 땅을 짚고 펄떡펄떡 날뛰던 토지신이 떠올라서 듣는 나도 소름이 끼쳤다. 그런 것이 한두 놈이 아니었나 보다.

그 섬 주민들은 괜찮은지 염려가 됐다가, 흉신의 가짓수와 숫자라면 이 도시도 만만찮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세상에서 안전한 장소는 지금 내가 머무는 거처밖에 없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서 돌아가고 싶었다.

술로 그어 둔 경계선은 이혜준이 바깥으로 나오면서 뭉개어져 불완전했을 텐데도 용케 작동했다. 고용주의 영력이 섬의 주인처럼 강력한 귀에겐 통하지 않았어도 다른 잡귀를 막아 주는 데엔 유용했나 보다.

“아닐 줄로 알았어요. 그 동네에선 흔한 일인지 펜션 사장님이 되게 태연하게 행동하셨거든요. 손자국 발자국 난 건 괜찮다며, 우리더러 어서 섬을 떠나라는 말씀만 하시더라구요. 조심하라고 당부도 해 주시고.”

“어, 그랬구나.”

그랬겠지. 이미 그런 요소까지 포함해 계산이 끝나고 얘기가 다 된 상태였으니까.

“하여간에 그날 아침은 분위기가 너무 무겁고 어수선해서 버스가 육지로 빠져나왔을 때는 저절로 안도하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니까요.”

둔감한 호빵이 유시호마저 감지한 공포의 기운이었다는 거다.

“너는? 여행 다녀와서 별일 없었지?”

임시 조장의 연락망을 빌려 MT를 다녀온 학우들의 안부를 묻기는 했는데, 본인도 무엇을 달고 육지로 나왔는지 모르는 것이 당연했다. 아직 이렇다 할 사고 소식은 없었다.

물론 사고가 일어나길 기다리는 건 아니고. 무사히 지나친다면 그야말로 안도할 일이지.

처음에는 숙소 결계 안에만 머무른다면 일행 모두 안전이 보장될 거라고 믿었지만, 고용주가 준비해 준 소금 등이 소용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다.

“예. 저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백중이라는 명절은 공휴일이 아니다 보니까 언제인지도 모른 채 지나쳐 왔는데 알고 보니 무시무시한 날이었네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는 전설도 있다면서요.”

돌아오긴 하겠지만 살아서는 아닐걸?

“글쎄. 난 못 들어 봤는데.”

이런 화제는 질색이라 이쯤에서 끊어 내려 했는데, 지리교육이 훼방을 놓았다.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는 건 좀 훈훈한 전설이네.”

“예? 뭐가요.”

신경질을 억누르며 물었다. 미쳤나.

“되살리고 싶은 연인이나 그리운 가족을 백중날 불러낼 수 있다는 얘기잖아요? 완전히 생명을 불어넣는 건 어렵겠지만 술법을 쓰면 일 년 중 그날 하루만큼은 재회하도록 돕는 게 가능하지 않을까? 연구해 보고 싶다.”

“칠월칠석 같은 거? 듣고 보니 로맨틱한걸?”

지리교육의 개소리에 고고미술사학과에 다닌다는 룸메이트가 화답하며 짖었다.

귀신 불러내는 행위를 로맨스로 연결해 버리네? 정신이 외출하셨나, 이 새끼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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