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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91화 (91/92)

91화

진겸은 계속해서 울리는 핸드폰 진동을 애써 무시했다. 지금 연락하는 사람이 누군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사과 메시지를 보내고 난 후부터 끈질기게 연락하는 사람이 몇 있는데 그중 하나였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끈질기면 바로 번호를 차단했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의 핸드폰을 빌려서 하는 건지 정말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을 해 왔다. 게다가 단순히 그동안 있었던 일을 언급하는 게 아니라 욕설이나 음담패설을 섞은 메시지를 보내기까지 했다.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로 전화가 와서 무심코 받았는데 차단했던 사람 중 한 명이 만나자는 말을 집요하게 늘어놓은 적도 있다. 그렇게 차단되는 번호가 다시금 하나둘씩 늘어났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어떻게든 전화를 해 대는 걸 보면 집요한 정도가 보통이 아니다.

그렇다고 아예 무음으로 해 놓자니 해외 출장을 간 수혁의 메시지도 종종 오고 있고, 진우도 일하다가 짬이 나면 연락을 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신고해 버릴까? 이 정도면 스토킹으로 신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스토킹이 아니더라도 다른 죄목으로 신고가 가능할 정도로 증거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백진겸이 그들에게 이것저것 받은 게 많아 괜히 일이 커질 것 같아서 생각으로만 그쳤다.

공부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지만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 소리가 더 정신을 흐트러트렸다. 그래도 집중력을 바닥까지 벅벅 끌어모아 책에 있는 글씨를 읽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 노력은 얼마 못 가 산산이 조각나 공중으로 흩어졌다.

조용한 동네는 아니어도 최근에 공사하는 곳이 없었는데 툭탁툭탁, 너무 시끄러웠다. 꼭 집 앞에서 두들겨 대는 것처럼 소리도 가까웠다.

결국 참지 못하고 일어난 진겸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현관문을 활짝 열었다.

“……어?”

분명 우리 집 마당인데. 낯선 사람들이 있다.

“……누구세요?”

아까부터 시끄럽게 하던 곳이 여기였나 보다. 그들 주변으로 나무판과 공구들이 보였다. 무언가를 만드는 모양이다.

“남의 집 앞에서 뭐 하시는 거예요?”

진겸은 슬리퍼에 발을 끼워 넣고 집 밖으로 나가려다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진겸의 눈가가 찌푸려지더니 눈동자가 점차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낯선 사람들이 일제히 공구를 든 채 자신을 보고 있는 모습에 순간적으로 두려움이 덮쳐 왔다. 슬쩍 뒷걸음질을 쳐 집 안으로 들어가 황급히 현관문을 걸어 잠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 쪽으로 다가오는 인영이 보였다.

‘뭐지? 누구지?’

이곳에 오는 사람이라곤 수혁과 원범이 다였다. 혹시 발길을 끊었던 사채업자나, 요새 협박 메시지를 보냈던 사람들일까 싶어 두려움이 앞섰다. 쿵쿵 뛰는 심장에 워치에서 경고음을 울리기 시작했다.

진겸은 떨리는 손으로 황급히 핸드폰을 쥐었다. 바로 진우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다. 이제 막 잠금을 풀었는데 진동과 함께 핸드폰 화면에 뜬 ‘★원범형★’을 보고는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혹시 밖에 들릴까 봐 최대한 소리를 죽였다.

― 문 열어.

“예?”

“문 열라고.”

순간 전화가 아닌 문밖에서 원범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겸은 핸드폰과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보이는 낯선 인영을 번갈아 보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지금 집 앞에 계세요?”

“어.”

그제야 긴장의 끈을 툭 놓을 수 있었다. 핸드폰을 쥔 팔을 뚝 떨어트린 진겸이 뻐근한 가슴을 손으로 지그시 누르면서 천천히 현관으로 다가갔다.

잠금을 풀고 문을 열자 아직 핸드폰을 얼굴에 붙이고 있던 원범과 눈이 마주쳤다. 진겸은 놀란 마음을 제대로 다독이지도 못한 채 눈가를 파르르 떨면서 입술을 오물거렸다.

눈물이 맺힌 진겸의 얼굴을 본 원범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누구야?”

“……예?”

“너 울게 만든 새끼. 누구냐고.”

어쩐지 이를 악문 듯한 목소리였다.

진겸은 콧잔등을 찌푸렸다가 풀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요새 메시지로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종종 받고 있다 보니 순간적으로 겁을 먹었던 것 같다.

슬쩍 고개를 옆으로 빼 원범의 뒤로 보이는 사람들을 살폈다. 그들은 이쪽에는 관심이 없는지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저 사람들이랑 같이 온 거예요?”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

진겸이 두 손을 모아 꼼지락거리며 눈치를 보자 원범이 살짝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봤다. 자신이 뭐만 하면 자꾸만 겁을 먹는 진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주눅 든 애한테 윽박지르고 싶진 않았다.

“누구냐고.”

“……형이요.”

“나?”

“네. ……연락도 없이 갑자기 와서 놀랐어요.”

원범은 말없이 진겸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거짓말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단순히 연락 없이 왔다고 해서 무서워하는 게 이해는 되지 않았다.

“……정말인데.”

원범은 진겸의 말을 신뢰하는 것 같진 않았다. 원범을 보던 옅은 갈색 눈동자가 점차 아래로 내려가더니 이젠 아예 땅바닥을 응시했다.

‘왜 계속 보기만 하지?’

전화번호를 주고받은 후 가끔 안부 메시지를 보내면서 조금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전보다는 덜하지만 여전히 무섭긴 하다. 아마 그의 눈빛 때문에 더 그런 것 같다.

“믿을게. 쫄지 마.”

“안 쫄았어요!”

“그럼 나랑 있을 땐 바닥 보지 말고 시선도 피하지 마. 아무것도 안 했는데 겁먹으면 내가 기분 나쁘지.”

진겸이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이렇게 금방 들킬 줄이야. 진겸은 이내 무해한 미소를 띠고 화제를 전환했다.

“그럴게요! 근데 저 사람들 뭐 하는 거예요?”

“방구석에 처박혀서 폐인처럼 공부만 하지 말고 바깥 공기 좀 쐬라고.”

“예?”

솔직히 폐인처럼 공부만 한 적은 없는데……. 근데 그거랑 지금 상황과 무슨 관련이 있는 걸까?

원범이 몸을 돌려 무언가를 만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말했다.

“저번에 보니까 휑해서 가져왔어.”

“그러니까 뭐를요!”

자기는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고 해 놓고 자꾸만 여러 번 물어보게 한다.

진겸의 목소리가 커지자 원범의 입꼬리도 덩달아 올라갔다. 겁을 먹은 모습은 금세 사라졌다. 눈망울에 맺혔던 눈물도 그새 쏙 들어갔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참 감정 변화가 빠르다.

원범이 계속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보기만 하자 기다리지 못한 진겸이 밖으로 나와 뭘 하는지 살폈다. 아까보다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이제는 모양을 갖춰 가고 있었다.

“의자? 아닌데…… 더 큰데. 어? 평상이에요?”

아직 조립하지 않은 자재와 어느 정도 잡힌 모양새를 번갈아 본 진겸이 묻자 원범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도 없이 와서 놀라게 하더니 갑자기 평상을 설치한단다. 혹시 진우랑 이야기가 된 건가 싶었다가 아니라는 걸 금방 알았다. 그랬다면 진우가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을 리 없다.

점차 모양을 갖춰 가는 평상을 보던 진겸은 작업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정장을 입고 있는 사람을 발견했다. 원범과 평상에 정신이 팔려서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정장을 입은 사람은 이청오였다. 회사 일이 끝나지 않기도 했고 진우나 양 비서를 데리고 오고 싶지 않아서 원범은 청오를 데리고 왔다.

청오는 진겸과 눈이 마주치자 두 팔을 몸에 딱 붙이고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진겸도 덩달아 두 손을 앞으로 모아 허리를 숙였다. 상대방이 누군지는 몰라도 자신을 향해 인사를 하니 똑같이 예의를 갖춘 거였다.

가만히 보고 있자 청오가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수행비서 이청오입니다.”

“……수행비서요?”

원범에게 비서는 진우와 양 비서만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수행비서가 따로 있었을 줄이야. 잠깐 눈을 깜빡거리던 진겸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수행비서 이청오? ……이청오!’

그가 누군지 생각났다. 회사 일을 하는 비서는 진우와 양 비서지만 그 외에 모든 일을 하는 건 이청오였다. 아직 남은 뒷세계의 잔재가 바로 그였다.

그렇다고 아는 척을 하는 건 바보 같은 짓이기에 진겸은 서둘러 놀란 얼굴을 지우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안녕하세요! 백진겸입니다.”

뭔가 붙일 만한 수식어가 없어서 그냥 이름만 말했다. 청오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는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형.”

원범이 말하라며 진겸과 시선을 맞추었다.

“여기 월세라서 저런 거 함부로 설치하면 안 돼요.”

진겸은 설치했다가 집주인이 철거하라고 하면 일이 더 커질 것 같아서 아직 조립이 덜 됐을 때 말리려 한 거였다. 집주인의 허락 및 동의 없이 이렇게 멋대로 설치하면 안 되니 말이다.

“주인아저씨, 되게 착한 분이긴 한데…….”

“좋아했다던데?”

“……아?”

집주인이랑 얘기가 끝났나 보다. 평상도 사서 설치하려면 돈이 꽤 들 텐데 알아서 설치하겠다고 하니 허락한 모양이다.

진겸도 마당을 볼 때마다 평상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했었다. 넓지는 않아도 아무것도 없이 휑한 마당을 볼 때면 채우고 싶은 욕망이 샘솟곤 했다.

무엇보다 밖에서 뭘 먹을 때마다 돗자리를 깔아야 해서 귀찮았다. 평상이 있다면 닦기만 하면 될 테니 편할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설치되려면 시간 좀 걸릴 거야. 여기는 시끄러우니, 잠깐 나가지.”

“어디로요?”

“어디로든.”

잠시 고민하던 진겸은 어차피 공부도 안 될 것 같고 한동안 집에만 있던 터라 원범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렇다고 맨몸으로 갈 순 없어서 집에서 짐을 챙겨 나왔다. 잠깐 나갔다 오는 거라지만 혹시 몰라서 약도 챙겼다.

“옷이 얇잖아.”

“잠깐인데 갈아입기 귀찮……. 갈아입고 올게요.”

집에서 편하게 있느라 반팔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그 위에 외투만 하나 걸치고 나왔다가 원범의 눈빛이 너무 흉흉해서 다시 집으로 들어왔다. 옷 입을 때마다 진우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과 비슷했다.

‘에이 설마……. 그냥 이따가 춥다고 징징거릴까 봐 입으라고 한 거겠지.’

원범이 자신이 추워할까 걱정돼서 그렇다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옷을 갈아입으면서 진우에게 메시지도 보냈다. 원범이 집으로 왔고 밖에 평상 설치 중이며 시끄러워서 잠깐 나갔다 올 거라고. 현재 상황을 한 문장에 압축해서 보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왔다.

진겸은 메시지로 보냈던 상황을 다시 말로 설명했다.

― 그래서 지금 같이 나가려고? 어디 가는데?

“어디 가는진 안 알려 주셨어. 그냥 근처 카페에 가지 않을까? 지금 밖에서 기다리고 계셔서 어디 갈지 정해지면 메시지 보낼게!”

― ……알았어. 너무 늦지 마.

“응!”

긴팔과 긴바지로 갈아입은 진겸은 외투를 걸치고 가방을 메고 밖으로 나왔다. 그사이 평상 설치는 마무리 단계였다.

‘곧 끝나겠네. 그냥 집에 있어도 되겠는데?’

이제 시끄러울 게 없어서 집에 있어도 될 듯했다.

진겸이 잠시 멈칫거리며 완성되어 가는 평상을 보자 원범이 시야를 가리고 섰다.

“훨씬 낫네.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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