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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90화 (90/92)

90화

차마 읽지는 못하고 그대로 뒀다. 깊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그냥 넘어가도 상관없는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꿈을 꾼 이후부터는 자꾸만 위화감이 든다.

잊지 않았던 한 가지, 백진겸은 악역이라는 것.

혹시 그와 관련된 일인가 싶었지만 주변에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메시지가 도착했던 날, 진우에게 이 사람을 아느냐고 물어보려다가 말았다. 혹시라도 연이 닿아 좋을 게 없는 사람일까 봐 조심스러웠다.

연락을 취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지만 백진겸에게는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아팠다고 해도 친구가 하나도 없을 줄은 몰랐다. 진우에겐 까칠하고 나쁜 놈일지언정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러지 않았다는 걸 알기에 더 충격이었다.

처음에는 사사로운 연락이 오지 않아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의아했다. 메시지 함을 확인했을 때도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인간관계가 엉망일 수 있나 싶었다.

생각해 보면 기억을 잃었을 때 진우도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에 대한 기억이 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진우도 백진겸의 인간관계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의미였다.

‘내가 물어본 적도 없긴 한데…… 이상하긴 해.’

처음 아르바이트 지원을 위해 이력서를 작성할 때, 초중고를 적으면서 진우와 전부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다는 건 친구가 겹칠 수도 있다는 건데. 진우도 누군가를 만나는 걸 본 적이 없었다.

백진겸은 그렇다고 쳐도 진우까지 친구가 하나도 없다는 게 이상했다. 물론 《그레이》에서도 진우의 친구는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이 일하다가 만난 사람인데 그것조차 등장이 적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자꾸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진겸은 점점 복잡해지는 생각에 머리를 좌우로 털었다.

“친구 만날 시간이 없는 거겠지.”

하루하루가 버겁고 힘들면 주변 사람을 만날 여유가 없을 수 있다. 게다가 빚도 갚아야 하고 백진겸의 몸도 좋지 않으니 진우가 누군가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진겸은 그렇게 믿기로 했다.

퇴근하고 돌아온 진우는 차려진 밥상에 조금 놀란 듯 보였다.

“오늘도 수고했어.”

진겸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온 진우를 꽉 안아 주었다. 수술하고 나서는 조심해야 해서 못 했던 퇴근 포옹이다.

“다녀왔어.”

진우도 오랜만에 진겸의 가느다란 몸을 조심스레 팔로 감싸 안았다. 처음에 진겸이 퇴근 포옹을 제안했을 때 믿기지 않았었다. 포옹은 어색했으나 기뻤다. 이 작은 몸을 제 품에 안는 날이 올 줄은 몰랐으니까. 그저 잠들 때 옮겨 주는 게 다였는데 말이다. 이제는 스스럼없이 먼저 손을 뻗어 온다.

그게 참…… 욕심났다.

앞으로도 이 몸을 품에 안을 수 있는 사람이, 만질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자신뿐이길 바라게 됐다.

진우는 진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겨 주었다.

“좀 잘라야겠다.”

“네가 봐도 그렇지? 내일 미용실 갔다 올까 봐.”

“주말에 나랑 같이 가자. 나도 다듬게.”

“그럴래? 그럼 나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좀 놀다 올까?”

그건 안 된다고 말하려던 진우가 입을 꾹 다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진겸은 단 한 번도 답답하다는 말도, 밖에 나가고 싶다는 말도 하지 않았었다.

자신을 배려해서인지, 정말 괜찮아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항상 옥상정원을 산책한 걸 보면 답답해도 참고 있었다는 쪽이 신빙성이 있다.

“좋아. 내가 미용실 예약해 놓을게. 밥 식겠다 먹자!”

진겸은 오늘따라 밥이 맛있어 보인다며 박수를 두어 번 쳤다. 진겸이 한 거라고는 쌀을 씻어서 전기밥솥에 앉힌 것뿐이지만 말이다.

밥을 다 먹고 설거지를 끝낸 진우가 손을 탈탈 털며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진겸을 향해 물었다.

“오늘도 수건으로 닦아 줄까?”

“응? 싫어. 이제 간단한 샤워는 괜찮다고 했는걸.”

병실에 있던 동안 물수건으로만 몸을 닦았지, 샤워를 한 적은 없었다. 3주가 지났을 때 훈일이 상처가 잘 아물었다며 이제는 가벼운 샤워는 괜찮다고 했지만 괜히 덧날까 봐 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물수건으로만 닦는 게 찝찝했지만 땀을 흘리지 않아서 그런지 나중에는 그냥저냥 익숙해졌다. 그래도 따뜻한 물줄기를 맞으며 씻는 것만 못했다.

“알았어. 더 귀찮아지기 전에 씻어.”

진우는 보일러를 켜며 말했다. 입원 전에 종종 귀찮다며 자기 전까지 뭉그적대다가 씻는 일이 잦았기에 진우는 진겸을 다독이며 일으켜 세웠다.

진우가 눈치챈 대로 조금 더 있다가 씻으려 했던 진겸은 속옷을 챙겨 화장실로 들어갔다. 샤워를 해도 된다지만 최대한 물이 닿지 않는 게 좋아서 방수 드레싱 밴드를 붙였다.

오랜만에 따뜻한 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느긋하게 씻은 진겸은 나른해진 얼굴로 거울을 봤다. 수증기로 뿌옇게 변해 버린 거울을 물 묻은 손으로 쓱 닦아 냈다.

“…….”

이렇게 눈동자를 빤히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어딘가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눈을 감자 속눈썹에 방울방울 맺혀 있던 물방울이 눈동자로 스며들어 갔다.

이물감에 눈을 비비면서 손을 뻗어 수건을 휙 잡아챘다. 그 바람에 수건 옆에 놓아두었던 속옷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욕실 배수가 시원찮아 물이 잘 빠지지 않아서 속옷이 반 이상 젖어 버렸다.

나가서 새로 꺼내 입어야겠다 싶어 수건으로 대충 물기만 닦아 내고 화장실 문을 벌컥 열었다. 진우는 화장실에서 나오는 진겸을 보고 화들짝 놀라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그 반응에 오히려 진겸이 놀라 화장실 문턱을 넘으려던 다리를 그대로 멈춰야 했다. 혹시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 게 있나 싶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한 거라고는 지금 씻고 나온 거밖에 없다.

진겸이 조심스레 입을 뗐다.

“……왜?”

진우는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대답하지 않았다. 그에 더 불안해진 진겸이 발꿈치를 들고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슬그머니 화장실에서 나왔다. 고개를 휙휙 돌려 가며 주변을 살폈으나 진우가 왜 그러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왜 그러는데?”

“……팬티는?”

“팬티? 아, 젖었어.”

“……그럼 갖다 달라고 하지. ……왜 벗고 나와.”

“두 걸음이면 방인데 뭐 하러 그래.”

그제야 진우가 고개를 돌린 이유를 안 진겸이 들고 있었던 발꿈치를 내렸다. 그러고는 방으로 들어가 속옷을 입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옷부터 입어.”

“입었어.”

고개를 들었던 진우가 다시 눈을 꾹 감았다. 그러고는 마른세수하고는 긴 숨을 내쉬었다.

‘잠옷까지 다 입으라는 거였지. 누가 속옷만 입으라고 했느냐고!’

진우는 빠르게 뛰는 심장 때문에 거친 숨을 내뱉었다. 최근 물수건으로 닦아 주느라 수없이 본 몸이건만 장소가 바뀌자 느낌이 너무 달랐다. 게다가 따뜻한 물로 씻어서인지 새하얀 몸이 군데군데 발그레 달아올라 있어 더욱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몸을 더 웅크리기 시작한 진우를 바라보던 진겸은 드레싱 밴드를 찍 떼어 내고는 새로운 걸 꺼내서 붙였다.

상처가 아물긴 했어도 당분간은 붙이고 있기로 했다. 자다가 저도 모르게 긁는 경우가 있어 조금이나마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 간지럽다 보니 무의식적으로 자꾸만 손이 올라간다.

잠옷까지 입은 진겸은 아직도 그 자세 그대로 있는 진우에게 물었다.

“계속 그러고 있을 거야?”

“…….”

“왜 그러는 건데?”

자기가 옷을 안 입고 나와 당황해서라기에는 진우의 반응은 과했다. 물론 남자들끼리 알몸 보는 걸 싫어할 수도 있지만 진우에게서 그런 기색을 읽은 적은 없었다. 병원에 있었을 때 민망해했던 건 오히려 진겸이었다. 진우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야아.”

진우의 앞으로 다가가 쭈그려 앉은 진겸이 팔을 잡고 흔들었다.

“어디 아파? 아니면 피곤해?”

“……아니.”

“왜 그러는데.”

“……생각할 게 좀 있었어. 미안.”

느리게 고개를 든 진우가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진겸은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싶어 순간 걱정이 앞섰다. 이제 원범은 진우를 건드리는 것 같지 않은데, 지난번 옥상정원에서처럼 다른 사람이 진우의 욕을 한 건가 싶었다.

아무리 못 미더운 형이라지만 그의 걱정을 들어 줄 순 있다. 무릇 근심 걱정은 다른 사람에게 털어놔야 마음이 편한 법이다.

“회사에서 무슨 일 있었어? 혹시…… 누가 괴롭혀?”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냥 요즘 피곤한가 봐.”

진우의 얼굴을 빤히 보던 진겸은 그의 귀가 붉어진 걸 발견했다. 귀뿐만 아니었다. 목도 붉었다.

“너 열 있는 거 아니야?”

서둘러 진우의 이마에 손바닥을 붙였다. 방금 따뜻한 물로 씻고 나온 탓에 제 손이 더 뜨거운 건지 오히려 시원했다. 하지만 진우의 얼굴까지 붉어진 탓에 이마에서 손을 떼고 양 뺨을 잡았다.

“너무 붉잖아.”

“…….”

진우는 너무 가까워진 진겸의 얼굴에 아랫입술을 이로 꽉 깨물었다. 어찌나 세게 깨물었는지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입 안에 고이기 시작한 피와 침을 삼키지도 못하고 허공에서 방황하는 손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른 채 그렇게 맥없이 진겸만 바라봤다. 이렇게 가까웠던 적이 아예 없던 것도 아니었건만 막 씻고 나온 진겸은 너무도 자극적이었다.

제대로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물기가 또르르 흘러내려 진우의 발등에 톡 떨어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진우가 참았던 숨을 한 번에 몰아쉬었다.

“집에 감기약이 있었나? 잠깐만.”

진우가 감기에 걸린 거라고 생각한 진겸이 황급히 약상자를 뒤지기 시작했다. 얇은 실크 잠옷이 당겨지며 몸 선이 그대로 드러났고, 그 늘씬한 뒷모습에 진우가 손으로 눈을 가렸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도 않았을 똑같은 일상이다. 이 집에서 바뀐 거라곤…….

‘……하아.’

진우의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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