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진겸은 병원에 있는 동안 공부에 집중이 되질 않아 학원을 알아봤다.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독학하려니 이해가 안 돼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인터넷 강의도 알아봤는데 동영상을 보면서 하는 것보다 사람에게 직접 배우는 게 나을 것 같아서 학원을 택한 거였다.
국가에서 자격증을 위한 비용을 지원하는 제도가 있어서 생각했던 것보다 돈은 적게 들어갈 듯했다. 진우에게 학원비까지 부담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많이 검색해 봤다. 아르바이트도 생각했지만 수혁이 소개해 준다고 해서 기다리고 있다.
현재 세운 계획은 아직 진우한테 말 못 했다. 학원에 다니겠다고 하면 학원비를 대줄 거라고 할 게 뻔하고, 아르바이트한다고 하면 하지 말라고 할 게 뻔해서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참에 핸드폰 알림 소리가 나 확인해 보니 계좌에 돈이 입금됐다는 알림이었다. 2주 동안 일한 급여가 들어왔다.
“……응?”
순간 잘못 봤나 싶어 손가락으로 뒤에서부터 하나씩 짚어 가며 확인해 봤다.
“일,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3백만 원?”
지금 보고 있는 게 입금된 금액이 아니라 통장 잔액인가 싶어 앱으로 다시 확인해 봤다. 입금된 게 맞았다. 회사 이름이 아닌 ‘탁원범’이라고 찍힌 입금자명과 3백만 원이라는 금액에 진겸의 고개가 점차 옆으로 꺾였다.
“왜? ……왜지?”
한 달 동안 일했어도 금액이 크다고 생각했을 텐데 자신이 일한 기간은 고작 2주에 불과했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큰 금액이다.
진겸은 바로 원범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전 10:22
안녕하세요!! 지금 입금된 거 확인해 봤는데요.. 입금이 잘못된 것 같아요!
★원범형★
뭐가
오전 10:23
오전 10:23
월급이요! 너무 많이 들어왔어요!
1은 사라졌는데 답장은 오지 않았다. 한참 동안 메시지 창을 보고 있자 원범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여보세요!”
― 월급이 뭐.
딱딱한 목소리에 진겸이 숨을 흡 들이켰다가 내쉬었다.
혹시 자신이 보낸 메시지가 일하는 데에 방해가 된 걸까?
“아니, 그게…….”
― …….
“좀…… 많이 들어와서요.”
이따금씩 원범의 차가운 모습을 볼 때면 다시 그가 무서워진다. 자신을 죽일 것 같지는 않아도 괜스레 몸이 움츠러든다.
― 네가 일한 만큼 준 거야.
“이 정도로 하진 않았……잖아요.”
― 알긴 아네.
“……알죠!”
움츠러들었던 진겸의 몸이 순식간에 펴졌다.
할 줄 아는 게 별로 없던 탓에 정말 단순 업무만 했던 건 맞다. 하지만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 진우와 양 비서가 무언가를 할 때면 옆에서 지켜봤다가 기억해 놓고서 다시 그 일을 할 때 먼저 움직였다. 최대한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쪼그라들었던 진겸의 목소리가 커지자 원범이 코웃음을 쳤다.
― 비서 준비한다고 들었어.
“진우가 그래요? 저 비서 준비한다고?”
― 아니, 선 이사가. 너 비서 자격증 따면 무조건 자기가 데려가겠다던데. 약속이라도 했어?
“아니요. 약속보다는 제힘으로 하고 싶다고 했어요.”
― ……네 힘으로 내 회사에 들어오기 힘들 텐데.
순간 진겸의 이가 부득 갈렸다. 맞는 말이지만 심박수를 올리는 말이기도 했다. 손목에 차고 있는 워치에 표시된 심박수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하자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심호흡했다.
그 숨소리가 컸던 탓인지 원범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부드러워졌다.
― 자격증 따면 취업시켜 줄게.
“제힘으로 들어갈 거예요!”
― 그래 보든가. 월급은 그거 맞으니까 엉뚱한 데 쓰지 말고. 저번처럼…….
“저번이요? 저번이…… 아! 저 이제 그런 거 안 해요!”
원범이 말한 저번이 무엇인지 눈치챈 진겸이 콧잔등을 잔뜩 찌푸렸다. 잊을 수 있는 일은 아니라지만 자꾸만 이렇게 언급할 필요도 없는 사건이었다.
“그건 저 말고 형이 하잖아요!”
― ……내가?
“네! 저번에 계약도 했으면서.”
아직도 원범이 다단계를 한다고 믿고 있는 진겸은 당당했다. 하지만 이내 들리는 소리에 찌푸렸던 콧잔등이 자연스럽게 펴졌다.
처음 들어 보는 원범의 웃음소리였다. 크지는 않지만 그가 웃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수혁은 시원하게 웃는데, 원범은 어딘가 웃음에도 절제가 묻어났다.
웃음소리는 길지 않았다. 금방 그쳤다. 계속 들으면 저도 모르게 같이 웃을 것 같았는데 너무 빨리 끊어져 버렸다.
“…….”
― 지금까지 하는 줄 알았나 보네.
“……아니에요?”
― 그거 해결한 지가 언젠데. 난 누구랑 달라서 멍청하게 다단계에 안 속아.
“저도 이제는 안 속는다고요…….”
다단계라는 게 뭔지 몰랐던 때라 그랬던 거지. 진우에게 설명을 듣고는 단박에 나쁜 거라는 걸 이해했다. 원범이 아직도 하는 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다. 다행이다.
대부분의 기억이 없는 지금은 모든 경험이 새로웠다. 그래서 더욱더 너튜브를 보는 걸지도 모른다. 저번처럼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하는 일이 다시는 없도록 말이다.
― 백진겸.
“네?”
― 자격증 따면 소원 하나 들어줄게.
“소원이요?”
― 어. 목표를 정할 땐 동기 부여가 확실해야 하거든. 보상도 있는 편이 좋고.
“……아무 소원이나 다요?”
―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선에선 뭐든지.
솔깃했다. 그런데 자신은 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이런 제안을 하는 게 좀 의아했다. 수혁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을 텐데 원범이 하니까 더 그랬다.
“왜 형이 소원을 들어줘요?”
― 그냥. 그러고 싶어서. 잘해 봐.
통화는 여기서 끝이었다.
결론은 통장에 입금된 돈은 실수가 아니고, 비서 자격증을 따면 소원 하나를 들어준다는 것이다. 원범은 나름대로 진겸에게 공부할 동기를 부여해 준 거다. 하지만 실제로 확 와닿은 건 없었다. 딱히 빌고 싶은 소원이 없기 때문이었다.
핸드폰 화면을 톡톡 치자 밝게 켜지면서 집에서 찍은 맑은 하늘과 그새 또 쌓인 메시지가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전에 양 비서가 진우의 핸드폰 배경 화면을 확인해 보라고 했는데, 그때 원범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가득 차 버려 아예 까먹고 있었다.
‘이따가 퇴근하면 보여 달라고 해야지.’
필사적으로 막았던 진우를 생각하니 더 보고 싶어졌다. 이미 시간이 꽤 지난 후라 바꿨을 수도 있지만 궁금했다.
그날 저녁, 진우의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기본 배경 화면이었다. 도대체 뭘 확인해 보라고 했던 건지 궁금해서 물어봤지만, 진우는 양 비서가 착각한 거라며 말을 얼버무렸다. 진우가 그렇다고 하는데 더 파고들고 싶진 않아서 그냥 넘어갔다.
병원에서 지내는 기간이 길어지자 병실에 진겸의 물건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 보려고 노트에 필기했다가 글씨가 맘에 안 들어서 글씨체 연습을 할 수 있는 책을 샀고, 거기에 맞춰 펜글씨용 노트와 펜도 구매했다. 비싼 것들은 아니지만 자잘한 물건들이 점차 쌓여 갔다.
왕진을 온 훈일이 그것들을 보며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예 여기서 살려고?”
“아니요!”
“아닌 게 아닌데? 아예 살림을 차리고 있네.”
외출을 할 수 있는 몸 상태가 아니라 병원에만 있는데도 옷이 어느새 옷장의 반이나 차 버렸다. 진우의 옷도 있지만, 수혁이 예전에 샀던 옷들을 가져온 탓이었다. 안 받는다고 해도 자기한테 맞질 않는다며 억지로 주고 갔다.
“공부는 잘돼 가?”
“…….”
“시작은 한 거야?”
“…….”
슬쩍 시선을 옮긴 진겸은 흐린 눈으로 훈일의 옆을 응시했다. 분명 공부를 하겠다고 호기롭게 이것저것 샀으면서도 아직 책을 제대로 펼쳐 본 적은 없었다.
진겸이 티 나게 시선을 피하자 훈일이 픽 웃으며 말했다.
“그럴 거면 그냥 마음 편히 놀아. 괜히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스트레스받지 말고. 그게 더 안 좋아.”
훈일의 말에 진겸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확실히 전보다 마음이 조급해진 건 사실이다. 곧 퇴원을 앞두고 있어서 더 그런 것 같다.
“몸은 어때? 기운이 없거나, 아프다거나, 잠이 안 온다거나.”
“그런 건 없는데…… 여기가 좀 간지럽고 온몸이 뻐근해요.”
진겸이 수술 부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간지러워도 긁으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최대한 참고 있지만 잠결에 자꾸만 손이 가서 문제였다. 드레싱 밴드를 도톰하게 하고 병원복을 입고 있어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진작에 수술 부위가 터졌을 거다.
훈일은 그건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라며 말을 이었다.
“잘 아물고 있어서 그런 거니까 간지러워도 긁지 말고 참아. 검사했을 땐 괜찮았어. 통증 심하면 진통제 꼭 먹어. 괜히 참다가 심장에 무리라도 가면 큰일 난다.”
“알겠어요. 매번 같은 말 하는 거 안 힘들어요? 저 이제 다 아니까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자신을 걱정해서 하는 말이라는 건 알지만 항상 듣다 보니 이젠 잔소리 같아졌다. 물론 가장 중요한 주의 사항들임은 알고 있다. 그래도 매일 들으니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다.
“어. 안 힘들어. 다른 불편한 건?”
“음……. 약을 제시간에 먹어야 하는 거?”
“그게 왜 불편해? 간병인이랑 진우가 알아서 챙겨 주잖아. 약은 평생 먹어야 하는 거니까 네가 익숙해져야 해.”
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혼났다.
“여긴 챙겨 주는 사람이 많아서 괜찮지만 퇴원하면 아니잖아. 약 떨어지지 않게 잘 체크해. 핸드폰에 꼭 알람 맞춰 놔. 아, 그리고 까먹고 못 먹었으면 생각나는 즉시 바로 먹어. 알았지?”
“알겠어요.”
“저번에 준 건 다 읽어 봤어?”
“아주 꼼꼼하게 읽었어요. 다 외웠다고요!”
진겸이 손끝으로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이번 수술을 끝으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더는 재수술은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 훈일이 준 자료에는 약을 먹는 동안 상성이 좋지 않은 음식들이 적혀 있었다. 그것 말고도 먹어도 되는 약과 아닌 것들도 구분되어 있다.
조심해야 하는 음식이 상당히 많긴 해도 아예 먹지 말라는 게 아니라 소량 섭취를 하라는 거라서 나쁘진 않았다. 어차피 지금도 못 먹는 게 많아서 그런지 안내문을 봐도 별 감흥은 없었다.
훈일은 모호한 눈빛으로 진겸을 바라봤다.
“네 기억, 믿을 수 있어?”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