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그렇게 일하고 싶으면 내가 소개해 줄게. 우선 해외 출장 먼저 다녀와야 하니까 그때까지 회복에나 전념해. 괜히 공부한다고 머리 팽팽 굴리다가 쓰러진다.”
“괜찮아요. 저 항상 받기만 해서…… 이거 언제 다 갚아야 할지도 걱정이란 말이에요.”
“난 갚으라고 안 했는데? 탁 이사가 갚으래?”
“아니요. 그건 아닌데…….”
“그럼 됐어. 나나 탁 이사나 너한테 뭐 바라고 해 주는 거 아니야. 지금은 그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푹 쉬어.”
진겸이 배웅해 준다는 걸 됐다고 거절하고는 두 팔을 양옆으로 쫙 뻗었다.
“이렇게 배웅해 줘.”
“……안아 달라고요?”
“네가 안기는 거 아닐까? 한 달 동안이나 널 못 본다고 생각하니까 벌써부터 머리 아파. 이거라도 하고 가야겠어.”
“형…… 진짜 이상한 거 알아요?”
수혁의 행동이 일반적이지 않는다는 건 진겸도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을 좋아할 거라는 선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 그저 선수혁은 또라이 기질이 있는 사람이라 그의 행동을 깊게 생각하지 말자고 혼자서 결론을 내렸었다.
역시나 지금도 이해 못 할 행동을 하고 있다. 포옹이라는 건 친밀하지 않은 관계에서 하기엔 어색하니 말이다.
“그건 모르겠고 빨리.”
양쪽으로 뻗어진 손을 까딱인 수혁이 가만히 서서 기다리자 진겸이 천천히 발을 떼었다. 차마 진우를 안는 것처럼 하지는 못하고 허리춤을 잡고서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혁이 진겸을 감싸 안았다.
‘작다.’
겉보기에도 알 수 있지만 확실히 진겸의 몸은 작았다.
수혁은 쿵쿵 뛰는 제 심장 소리가 진겸에게 들릴 것 같아 숨을 깊게 들이켰다.
“진겸아.”
“…….”
“머리는 감아야지.”
“……씨이.”
뚱해진 진겸이 떨어지려고 하자 수혁이 팔에 더 힘을 줬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품에서 놓지 않았다.
수혁의 얼굴에 머리가 닿는 게 계속 신경 쓰인 진겸이 고개를 들었다.
“안 가요?”
“가기 전에…….”
수혁은 지금까지 상대방을 위해 이렇게 참아 본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었다. 당장이라도 자신을 올려다보는 얼굴을 잡아채 입 맞추고 싶었다.
‘입술 되게 빨갛네.’
오물거리는 잡은 입술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짧은 한숨을 내쉰 수혁이 슬쩍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새하얀 볼에 짧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수혁의 행동에 놀란 진겸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말도 하지 못한 채 벙찐 상태로 입을 뻐끔거렸다.
“이걸로 한 달 동안 참아 볼게.”
* * *
병실을 나온 수혁은 주차장으로 내려와 차에 올라타자마자 바로 이청오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예, 형님.
“청오야, 일 하나만 맡기자.”
― 네. 말씀하십쇼.
수혁은 말을 하기 전에 혀로 입술을 느리게 핥았다.
“백진겸, 백진우. 지난번에 준 정보 말고 더 자세하게 알아봐.”
― 알아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래. 수고.”
통화를 종료하고 핸드폰을 조수석으로 휙 던졌다.
진겸의 현재 몸 상태를 혼자서만 모르고 있었을 때, 이청오에게 뒷조사한 자료를 요구했었다. 이미 원범이 알아봤을 것 같았고 예상대로 정보를 곧바로 손에 쥘 수 있었다.
하지만 수혁이 원하는 건 누구나 알아낼 수 있는 정보가 아니었다. 그런 거 말고 더 자세히, 깊숙이 숨겨진 정보까지 속속들이 알기를 원했다.
“뭐가 더 있을 것 같단 말이지…….”
수혁의 읊조림은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수혁이 돌아가고 나서도 진겸은 한참 동안 멍하니 병실 바닥만 응시했다. 입술이 닿았던 뺨이 자꾸만 후끈거려서 저도 모르게 손으로 문질렀다.
‘왜 뽀뽀했지? ……진짜 나 좋아하나?’
지금까지 수혁이 보여 주었던 행동을 떠올려 봤다. 그간 지켜본 수혁은 원작에서처럼 진우에게 관심을 보이며 집착하고 있지 않았다. 그건 원범도 그랬다.
그저 자신이 끼어들어 틀어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진짜면 어떡하지?’
정말 수혁이 자신을 좋아하는 게 맞는다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이곳에서 계속 산다는 보장이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와의 관계를 진전시키기란 어렵다.
진겸은 머릿속이 복잡해져 점차 열이 몰렸다. 게다가 아까부터 가슴께가 자꾸만 간질거렸다. 긁고 싶은데 괜히 건드렸다가 잘 아물어 가던 수술 부위에 문제가 생길까 봐 꾹 참았다.
‘……확실해지면 그때 생각하자!’
혼자 헛다리 짚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에 고개를 좌우로 털며 생각을 떨쳐 냈다.
침대에서 일어난 진겸이 창문 앞으로 다가갔다. 노을이 스쳐 지나가 어느새 완전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여름이 끝나 가자 자연스럽게 해도 짧아졌다. 멀리서 보면 형광등이 환하게 켜져 있는 병실 내부가 비치지만 가까이 붙으면 병원 주변 야경이 보였다.
‘언제 다 연락하지?’
계속 병원에 있으니 잠시 잊고 있었던 게 떠올랐다.
처음 핸드폰을 확인했던 날, 백진겸의 어장 속에 사는 사람들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급한 일을 해결한 후에 하자고 여태 미루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그래선 안 되겠다 싶었다.
이건 자신을 위해서도, 언젠간 돌아올 백진겸을 위해서도 반드시 해결할 문제였다.
주고받은 메시지를 확인하면서 받았던 물건 중에서 그 사람이 준 거라는 증거가 명확히 있는 것들은 따로 빼놓았다. 주인을 모르는 물건들을 판 건 좀 양심에 찔렸지만 부득이한 사정이라고 스스로를 이해시켰다.
게다가 그들에게 백진겸의 이미지가 좋을 리 없을 거라는 생각에 막상 연락하려니 조금 무섭기도 했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마냥 피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에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벌어지지도 않은 일을 미리 걱정하고 싶지 않아서 천천히 준비해 왔다.
노트에 연락해야 할 번호와 메시지를 통해 파악한 사항들을 적어 놓았다.
그동안 미안했다는 내용이 담긴 메시지를 쓰기 위해 한동안 인터넷 검색도 열심히 했다. 직접 사과문을 쓰려고 했는데 어떻게 써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그래서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여러 형태의 사과문을 참고해 가며 나름 장문으로 작성해 놨다.
창밖을 구경하던 진겸이 침대로 돌아갔다. 크게 하품하고는 수혁이 사 온 노트북을 켰다. 함부로 만지면 고장이 날 것 같아서 알려 준 것만 해 봤다. 처음 접해 봐서 그런지 모든 게 조심스러웠다.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사과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는 글을 보고는 노트를 펼쳐 빼곡히 적어 놓았던 글을 다시 읽어 내렸다.
“……지금 하는 게 낫겠다.”
자꾸 미루다 보면 더 하기 싫어질 게 뻔했다.
진겸은 핸드폰을 들고서 노트에 적은 글을 정성스레 메시지 창에 입력했다. 그러고는 노트에 있는 번호와 대조해 가며 제대로 보내는 게 맞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그렇게 몇 명에게 보내다 보니 읽은 사람들에게서 답장도 왔다.
확인하려는데 밤이 되자 온몸의 모든 감각이 살아나기라도 한 건지 아니면 진통제의 효과가 끝난 건지는 몰라도 갈비뼈와 어깨가 너무 아팠다. 조금만 움직여도 입에서 앓는 소리가 절로 나갈 정도였다.
누워야겠다 싶어 노트를 베개 아래에 넣었다. 지금 하는 일은 진우가 평생 몰랐으면 했다. 백진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진우가 모를 리 없지만 그래도 내키지 않았다.
졸리지 않았는데 베개에 머리를 붙이자마자 멍해지면서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왔다. 답장을 확인해야 하는데 너무 졸려서 글자가 제대로 읽히질 않았다.
“…….”
졸린 눈을 비비며 부릅떠 봤지만 소용없었다. 이내 눈꺼풀이 감겨 버렸다.
5분도 채 되지 않아 진겸의 숨이 고르게 변했다. 그리고 진겸이 잠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우가 왔다.
진우는 병실을 둘러보다가 침대에 누워 있는 진겸을 보고는 발소리를 죽여 다가갔다. 그리고 간이 테이블에 놓인 노트북을 발견했다.
‘웬 노트북?’
처음 보는 노트북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진겸이 직접 샀을 리는 없으니 줄 만한 사람은 딱 둘뿐이었다. 선 이사와 탁 이사. 원범은 오늘 회의하느라 바빴기에 수혁일 가능성이 컸다.
진우는 짧게 혀를 차고 노트북을 옆으로 치우고는 간이 테이블을 접었다. 이불도 잘 덮어 주고 주변을 정리하려 하는데 배게 아래에 빼꼼히 나온 노트 모서리를 발견했다. 실수로 배게 아래로 들어간 건가 싶어 진겸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빼냈다.
요즘 공부 좀 하겠다고 하더니 오늘도 했나 보다. 잘하고 있나 궁금해서 슬쩍 펼쳐 봤다.
휘갈기듯 쓰인 글들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후.”
눈을 꾹 감았다가 뜬 진우의 얼굴은 덧없이 굳어져 있었다. 이를 어찌나 악물었는지 턱과 목에도 핏줄이 섰다.
“미안하다고…….”
노트에는 그동안 미안했다는 내용이 구구절절하게 쓰여 있었다. 상대방이 특정되어 있지 않은 것이 그동안 만나 왔던 이들을 향한 말이라는 걸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갑자기 왜 이러는 건지는 몰라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백진겸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계속 옆에서 봐 왔기에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한다. 이 사과문에 쓰여 있는 것처럼 진심이 담기지 않은 말로 상대방을 기만한 건 맞다.
진우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말리는 것도 오래 가지 않았다. 백진겸이 제 말을 들을 사람도 아니었고 소용없다는 걸 안 후로는 큰일만 일어나지 않길 바라야 했다. 그래도 적정선을 지킬 줄 알아 지금까지 별다른 사건이 일어난 적은 없었다.
노트를 닫아 노트북 위에 올려놓고는 진겸의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쓸어 옆으로 넘겨 주었다. 기억을 잃고 나서 이런 것도 전부 잊은 줄 알았는데…….
‘기억이 돌아온 건가?’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 놓기에 왜 그러냐 물은 적이 있었다. 그때 진겸은 오는 연락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고 했었다. 그때 자신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눈치챘을 수도 있다.
옅은 한숨을 내쉬던 진우는 아까부터 자꾸만 울리는 진겸의 핸드폰을 들었다. 이 늦은 시간에 연락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아서 그냥 일반적인 알림이라고 생각했다가 화면에 뜬 메시지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까득 이를 갈았다.
진겸은 핸드폰 잠금장치를 해 놓지 않아서 메시지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게다가 한 사람이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연락에 반갑다는 듯이 반응하는 사람도 있지만, 욕설과 함께 도를 넘은 내용도 담겨 있었다.
하나씩 차분히 읽어 내려가던 진우의 손과 턱이 파르르 떨렸다. 그동안 백진겸이 이들과 어떤 식으로 대화를 했는지 엿본 기분이었다.
눈을 꾹 감았다 뜨고는 이내 메시지들을 삭제하기 시작했다. 사과를 받아 준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았다.
“……이럴 필요까진 없었을 텐데.”
진우는 지금이 너무 좋았다. 수술도 잘 끝났고 진겸의 회복도 생각했던 것보다 빨랐으며 차분히 빚도 갚아 가고 있다. 앞으로도 지금처럼만 지낸다면 진겸 외에 다른 사람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들이 상처를 받든 말든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진우에게 제일 중요한 건 백진겸이었다.
최근 들어 제 신경을 자꾸만 긁던 원범과 수혁의 관심도 사라졌다. 물론 그게 누구에게로 향하는지 알고 있다. 무엇보다 그들로 인해 꽁꽁 감춰 두었던 제 욕심이 자꾸만 새어 나오려 한다.
위험한 감정이다.
잠든 진겸을 바라보는 진우의 눈에서 감춰 두었던 욕망이 나타났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빨리 빚 갚고…… 다른 곳으로 가자. 겸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