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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85화 (85/92)

85화

“노트북 사용할 줄은 알아?”

“…….”

“……그래. 알려 줄게.”

대답 없는 진겸의 모습에 수혁이 노트북 사용법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필요한 프로그램은 이미 설치가 되어 있고, 조작법이 복잡한 건 아니라서 진겸이 사용하기에 어려운 건 없었다.

“모르는 거 있으면 인터넷으로 검색해 봐. 다 나올 거야.”

“네!”

“근데 워드프로세서랑 컴퓨터활용능력 자격증은 왜 따려는 거야?”

수혁은 옆에 있는 책 제목을 보며 물었다. 사무직에서나 필요할 법한 자격증이라 조금 의아했다.

“필요하다고 해서요.”

“그러니까. 어디에?”

“비서 자격증이요.”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수혁이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었다.

“갑자기 웬 비서야?”

“진우도 그렇고 양 비서님도 너무 멋있어 보였거든요.”

비서 보조로 일하는 2주 동안 두 사람의 옆에서 지켜보고 결정한 희망 직업이었다. 게다가 사무직 업무를 익히기 위해 너튜브를 보는 동안 비서가 주인공인 드라마를 봐서인지 그 직업에 대한 환상도 있었다.

“비서라…… 나쁘지 않지. 근데 비서 되려면 되게 똑똑해야 하는 거 알아?”

비죽 웃으며 한 말에 진겸이 입을 삐쭉거렸다.

“알아요. 그래서 공부하려고 책도 샀잖아요.”

“……그래, 뭐. 네가 하고 싶다는 거 말리고 싶진 않네.”

수혁은 현실을 직시시켜 주려다가 말았다.

비서라는 직업은 단순히 자격증만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갖춰야 할 조건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뭐라도 하려는 의지를 내보이는데 괜히 초 치고 싶지 않았다.

물끄러미 진겸을 바라보던 수혁이 슬쩍 눈치를 보다가 새하얀 손을 잡았다. 작은 손은 부드럽고 말랑했다. 진우가 같이 있을 땐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하는 통에 건드리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한다.

진우가 없는 오늘이야말로 한동안 없을지도 모르는 스킨십하기에 좋은 기회였다. 무엇보다 진겸 본인이 스킨십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아 건드려도 거부하는 일이 없었다. 그 점이 좋기도 하고 걱정도 됐다. 이러다가 엄한 놈이 홀랑 채갈 것 같다는 기분 나쁜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렇게 두지는 않겠지만.

‘가르쳐야 할 게 너무 많네.’

다른 사람이 멋대로 건드린다고 생각하니 좋았던 기분이 급격히 나빠졌다. 그래서 더욱더 진겸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진겸은 아까부터 제 손을 슬라임 만지듯 꾹꾹 누르는 수혁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어서 그의 속눈썹이 너무도 잘 보였다.

얼굴을 가까이에서 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내려다보는 건 처음이다. 확실히 원범과는 결이 다른 미남이다. 원범은 선이 굵은 타입인데, 수혁은 그보다는 조금 더 가늘었다. 그래도 예쁘다는 말보다는 잘생겼다는 말이 확실히 어울리는 사람이다.

“비서 자격증 따면 어디에 지원하려고?”

“……그건 아직 생각 안 해 봤어요.”

“내 비서로 오는 건 어때? 저번에도 말했지만 비서가 한 명뿐이거든.”

“비서가 더 필요하면 빨리 뽑아야죠. 아직도 안 뽑았어요?”

“어.”

“왜요?”

“그러게.”

수혁이 고개를 들어 진겸의 눈을 응시했다. 자신을 향한 촉촉한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머릿속을 맴돌던 고민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곧 있으면 또 해외에 나갔다 와야 한다. 분명 영업 이사로 온 건데 왜 자꾸 해외 출장을 가게 되는 건지는 몰라도 다녀오라고 하니 어쩔 수 없이 가야 했다. 전이었다면 빨리 일을 끝내고 현지에서 놀다 오겠다는 마음으로 움직였을 텐데 지금은 왜 이렇게 가기가 싫은 걸까.

‘백진겸 때문이겠지.’

이유가 너무도 명백했다. 아무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백진겸이 기억을 잃고 확 바뀐 후부터 자꾸 관심을 두게 된 건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가 좋았다.

분명 그랬는데…….

정확한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진겸에게 온전히 제 마음이 가고 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애초에 거부한 적 없는 마음이긴 하다. 하지만 그냥 인지하고 있었던 때와는 달리 이제는 제 태도가 확 변할 게 뻔했다. 원하는 걸 갖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거다.

그게 선수혁이니까.

수혁이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여태 안 뽑았던 이유가…… 너였나 봐.”

“……저요?”

“응. 네가 내 비서 할 거잖아.”

이제는 진겸이 싫어해도 자신이 그를 옆에 두어야겠다. 그렇다면 역시 제일 좋은 방법은 같은 직장을 다니는 걸 테다. 물론 진겸에게 일을 시키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저 옆에 묶어 둘 수단이 필요할 뿐이다.

하지만 수혁의 바람은 진겸의 말에 금방 사그라질 수밖에 없었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자격증도 필요하고 이력서도 넣어야 하고 합격하고 나면 면접도 봐야 하잖아요. ……그리고 저 고졸이라 대학교도 다녀야 해요.”

수혁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막연히 진우의 영향을 받아서 비서가 되고 싶어 하는 줄 알았더니 꽤 진지하게 알아본 모양이다.

‘하긴. 백 비서가 입사한 지 1년이 지났는데도 낙하산이란 말 나오는 판국에 얘까지 데려가면 난리 나겠지.’

지난번 옥상정원에서의 일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도 없다. 자신이야 상관없지만 진겸에게 더는 더러운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를 떠올린 수혁의 미간이 미세하게 구겨졌다. 당시에는 괜히 진겸의 소문이 더 돌까 봐서, 그 자리에 있었던 직원 세 명을 그대로 돌려보냈다. 혹시라도 그들이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떠들어 댄다면 가차 없이 나락으로 떨어트리기 위해 양 비서를 통해 뒷조사도 해놨다. 아직도 그 서류는 서랍 구석에 처박혀 있다.

“그래도 고등학교는 졸업했나 보네.”

“당연하죠!”

자신을 뭐로 보냐는 듯이 눈을 찌푸렸던 진겸이 잡힌 손을 휙 빼냈다.

“근데…… 대학 가려면 수능도 봐야 할 텐데?”

“사이버 대학교는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아, 사이버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진겸이 마냥 논 건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해서 나름 애썼다.

아직도 이곳에서 평생을 살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은 없다. 그래서 날마다 있었던 일을 일기 앱에 기록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빙의했다는 현실이 떠올라 조용히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도 든다.

진짜 백진겸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거니까.

그렇게 되면 자신은 사라지겠지만 남겨진 백진겸은 바뀐 현실에 또다시 적응해야 한다. 그리고 혼란스러운 건 백진겸만이 아닐 거다.

‘진우가 제일 힘들겠지.’

만약 돌아온 백진겸이 변한 지금의 관계를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쩌면…….

‘서로 더 멀어질지도 몰라.’

진우가 지금 관계를 만족하고 있다는 건 옆에서 봐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다. 이건 자신이 《그레이》를 읽어서 백진겸과 백진우의 관계를 알기에 보이는 걸지도 모른다.

게다가 지금은 나름 친분이 쌓인 수혁과 원범과의 관계를 이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걱정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살고 싶진 않았다. 그랬기에 지금까지 아등바등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는 거였다.

‘매일 기록하고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스스로를 다독이며 말이다. 더구나 정말 만약에 자신이 이곳에서 평생 살게 된다면 지금을 후회할 것 같았다.

진겸은 잠시 생각에 잠긴 수혁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렇게 친해질 줄은 몰랐는데…….’

처음에는 책 속의 주인공들을 실제로 본다는 게 신기해서 관심이 생겼다. 무엇보다 빙의한 이 몸은 조연 악역이었고, 메인수인 진우의 곁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얽힌 것도 있다. 물론 자신이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수혁과 원범과의 자리가 만들어졌다.

수혁은 복숭아 알레르기 사건 이후로 자신을 먼저 찾아오기까지 했다.

‘아, 그러고 보니…….’

진겸이 그때를 생각하고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사진!”

“어?”

“내 사진 찍었잖아요. 그때!”

“갑자기 웬 사진 타령이야. 무슨 소리야?”

대뜸 외친 말에 수혁이 눈을 끔뻑거리다가 픽 웃었다.

“……아, 그거?”

사진 찍었다는 말에 생각나는 게 하나 있긴 했다.

“그 사진 아직 안 지웠죠? 그쵸?”

“안 지웠지. 그걸 어떻게 지워.”

“아……! 지워 주세요!”

그땐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고, 지금은 어떻게 찍혔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저 ‘이렇게 찍어도 예쁘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솔직히 정신이 혼미했을 때라 앞뒤 상황도 정확히 떠오르질 않는다.

“지우면 뭐 해 줄 건데?”

수혁이 얼굴에 장난기를 가득 담아 물었다. 이 상황이 재밌는지 눈꼬리가 곱게 휘었다.

그 사진을 다시 본 건 해외 출장을 가서였다. 갑자기 얼굴이 보고 싶은 참에 사진 찍었던 게 생각나 본 거였는데, 환자복을 입은 데다가 너무 아파 보여서 한 번 보고 말았다. 그렇다고 지운 건 아니다. 아직 핸드폰에 고이 저장되어 있다.

‘회사 다닐 때 좀 찍을 걸 그랬나?’

그때는 사진을 찍어야겠다는 생각을 아예 하질 못했다. 사진이 문제가 아니었다. 자꾸만 머릿속을 둥둥 떠다녀서, 그러다 보니 문득 보고 싶어져서 찾아갔었다.

아무 이유 없이 백진겸이 보고 싶었다.

표정을 굳힌 채 바라보면 아직도 겁을 먹는데, 눈치 보면서도 할 말은 하는 것도 웃기고 지금은 그냥 모든 게 재밌고 즐거웠다.

수혁은 슬쩍 손을 뻗어 진겸의 얇은 팔 위로 손가락을 얹었다.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이 하나씩 움직이며 톡톡 건드렸다.

“뭐 해 줄 거냐니까?”

수혁의 물음에 진겸은 기가 차 입을 뻐끔거렸다.

“제가 뭘 해 줘야 해요? 제 사진 막 찍은 건 형이잖아요!”

“나한테 있잖아. 그럼 내 거지.”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이거 초상권 침해야!”

진겸이 씩씩거리며 말하자 수혁의 미소가 짙어졌다. 자그마한 게 성질은 있어서 화도 잘 낸다. 그러면서 웃음도 많다. 참 감정 변화도 빠르고 표정도 다채롭다. 그래서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초상권 침해라는 말도 알아? 너는 상식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없고 참…… 특이해.”

상식 없다는 말에 진겸이 얼굴을 왈칵 구겼다. 진우가 없는 틈에 온 이유가 제 속을 뒤집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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