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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84화 (84/92)

84화

진겸이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근데 저…… 아까 호출 온 거 다 봤는데요.”

소독할 때 훈일의 의사 가운 주머니에서 반짝거리는 호출기를 이미 목격한 후였다.

“대민이 형도 곧 올 거고 잠깐은 혼자 있어도 돼요. 할 일도 많고요.”

간병인은 진겸의 점심을 챙겨 주고는 식사를 하러 갔고, 그 시간에 훈일이 온 거였다.

할 일이 있다는 말에 훈일의 시선이 침대의 간이 테이블로 향했다. 전에는 공부하라고 해도 그런 거 안 해도 잘 살 수 있다며 거들떠보지도 않더니 이젠 자격증을 따겠다고 관련된 책도 보는 모양이다.

훈일의 시선을 좇아 고개를 돌린 진겸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입원하고 나서 한 번도 펼쳐 보지 않은 자격증 공부 책이었다.

“잘 생각했어. 게임만 하지 말고 공부해. 게임이 뭐 그리 재밌다고.”

“재밌어요! ……공부도 할 거예요.”

“그래. 꼭 해라. 어? 나 간다.”

“네!”

훈일이 나가자 진겸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손가락으로 쓱쓱 빗다가 멈칫하더니 이내 바지에 손을 쓱쓱 문질렀다.

“……머리 감아야겠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진우가 피곤해해도 좀 씻어야겠다.

침대에 기대 누워 핸드폰을 하던 진겸이 삐걱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앓는 소리가 절로 입에서 새어 나왔다. 움직이기 힘든 것도 있지만 진통제로도 감당이 되지 않는 고통이 시시때때로 느껴진다.

몸을 바르게 펴고는 슬쩍 눈동자만 움직였다. 자격증을 따겠다고 호기롭게 인터넷으로 책을 구매했지만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나 공부 싫어했나 봐.’

자격증 책 말고 읽을 만한 소설책도 사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앞부분만 조금 읽고 고이 덮어 캐비닛에 넣어 뒀다. 그 후로 꺼낸 적 없었다. 웹소설은 재밌게 봤는데 종이책을 보면 이상하게 졸음이 쏟아진다. 이게 종이책의 마법인가?

진겸은 자기가 한 생각에 어이가 없어져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나 여기 와서는 웹소설을 본 적이 없네?’

전에는 되게 많이 봤던 것 같은데 세세한 기억이 없으니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걸까?

한번 볼까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금세 접었다. 괜히 시작했다가 푹 빠져 버리면 공부에 집중하지 못할 것이 뻔했다.

다시 게임에 집중하다가 진우의 퇴근 시간이 다가오길래 조금만 더 힘내라며 메시지를 보냈다. 바쁘지 않은 모양인지 바로 전화가 왔다.

“응, 진우야!”

― 뭐 하고 있어? 저녁은 먹었어?

“먹었지. 핸드폰 하고 있었어.”

― 너튜브 좀 그만 보라니까.

“안 봤어!”

너튜브는 안 보고 게임을 했을 뿐이다. 틀린 그림 찾기 게임을 다운받았는데, 한번 시작하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속하던 참이었다.

처음에는 두 그림 사이의 틀린 점이 잘 보였지만, 레벨이 높아질수록 찾는 것이 어려워졌다. 힌트를 쓰고도 깨지 못하는 스테이지를 몇 번이고 반복해 클리어하면 그건 그거대로 보람찼다.

너무 어려울 땐 간병인 대민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작은 화면을 보며 찾다 보니 나름 동료애도 생겼다.

― 잘했어. 천천히 줄이자. 형, 오늘 산책하는 거 잊지 말고.

“응? 같이 안 해?”

― 오늘 집에 들렀다 간다고 했잖아.

“아, 맞다.”

집을 너무 비운 탓에 한번 들렀다 온다고 했는데 그게 오늘이었나 보다.

― 나 늦을 텐데. 진짜 대민 씨한테 더 있어 달라고 안 해도 돼? 아직은 혼자 있기 불편하잖아.

“괜찮아. 이미 퇴근하셨어.”

― 벌써? 아직 6시 안 됐잖아.

“내가 가라고 했어. 오늘은 많이 안 아프기도 하고 퇴근 시간에 맞춰서 나가면 복잡하잖아.”

― 그래도 형 혼자 있으면 안 되지.

이유를 덧붙였지만 진우는 내키지 않는지 불만스러운 목소리였다.

“괜찮대도! 간 김에 저녁도 먹고 와. 자고 내일 퇴근하고 와도 돼.”

― 그건 내가 싫어. 밥 먹고 청소만 하고 갈게.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간호사 호출하고 심심하면 전화해.

“응. 심심하면!”

혼자 있으면 심심하기는 해도 핸드폰이 있다면 버틸 수 있다. 집에 가면 청소하느라 바쁠 텐데 괜히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잘 갔다 오고. 이따 봐!”

통화가 끝나자 병실은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전이라면 에어컨이 돌아가는 소리라도 날 텐데 이젠 덥지 않아 켤 필요가 없었다.

‘혼자 감으면…… 안 되겠지.’

그러다가 수술 부위가 벌어지기라도 하면 안 되니 그냥 버티기로 했다. 너튜브에서 보니까 요즘에는 물로 감지 않고 스프레이로 뿌려 기름진 머리를 해결할 수 있는 드라이 샴푸라는 것도 있던데 그거 사다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싶다.

‘진짜 사다 달라고 할까?’

그러면 진우의 일을 하나라도 덜어 주는 걸 테니 괜찮지 않을까.

멍하니 천장을 보던 진겸이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종일 붙잡고 있었던 핸드폰은 뜨거웠다. 충전기를 연결해 놓고 짧게 숨을 내뱉었다.

“……해야지.”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막막했다. 책 표지를 보자마자 외면하고 싶다니. 그래도 더는 미룰 수 없었다. 수술 전에는 ‘수술한 다음에 하자’라며 혼자서 공부 시작을 미루었다. 그러나 이제는 핑계도 없다. 진지하게 공부해서 진우의 짐을 조금이나마 덜어 주고 싶었다.

드디어 마음을 먹고 책을 들었다. 이제 겨우 표지를 넘겼는데, 병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오늘 집에 들렀다가 온다고 했고, 훈일도 아까 왔다가 가서 올 사람이 없었다. 혹시 간병인 대민이 다시 온 건가 싶어 고개를 꺾어 방문객을 확인했다.

병실 문을 연 사람은 수혁이었다.

“어?”

“뭐야, 인사가 ‘어’야?”

“그럴 리가요. 이 시간에 오셔서 놀라서 그랬어요.”

진겸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곧 퇴근 시간이기는 했다. 더구나 항상 진우랑 같이 왔었기에 따로 오는 건 처음이었다.

고개를 빼꼼 내민 진겸이 수혁의 뒤를 살폈다. 혹시 진우나 원범과 같이 온 건가 싶어 본 거였다.

“왜? 뭐 있어?”

수혁이 몸을 돌려서 뒤와 복도까지 확인했지만 저 혼자였다.

“혼자 오셨어요?”

“응. 백 비서 집 간다고 하길래 냉큼 왔지.”

문을 닫은 수혁이 안으로 들어왔다. 침대로 다가가면서 진겸이 보고 있던 책을 발견하곤 물었다.

“공부하고 있었어?”

“……네.”

이제 막 표지만 넘긴 거지만 공부를 하려고 했던 건 맞으니 거짓말은 아니었다.

진겸은 어렵게 첫 장을 넘겼던 책을 다시 덮었다. 공부하려고 했지만 수혁이 와서 미룬 것뿐이지, 절대 하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며 스스로 합리화했다.

“그건 뭐예요?”

매일 오고 있으니 선물은 더 안 사 와도 될 것 같은데 수혁은 올 때마다 항상 뭔가를 들고 왔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귓등으로도 듣질 않는다. 이젠 포기했다.

“노트북. 독학하려면 인강이 필수라고 하길래.”

“……비싸잖아요! 사 오는 거 무조건 받는 대신 싼 거 사 주기로 하셔 놓고!”

“그럼 이걸로 일주일 치 해. 이미 산 거 뭐 어쩔 거야.”

“그래도요. 그냥 과자면 된다고요…….”

진겸의 눈썹과 입매가 축 늘어졌다. 비싼 선물은 부담스러우니 정 사 오고 싶다면 과자나 음료수로도 충분하다고 말했었다.

물론 수혁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리 없었다. 매번 이렇게 실랑이하면서도 꿋꿋하게 자기가 주고 싶은 걸 사 왔다.

진겸은 늘 수혁의 선물을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 수혁의 입에서 너 주려고 사 온 건데 안 받으면 그냥 버리겠다는 말이 나와야 내키지 않아 하면서 받아 주었다.

그럴 때마다 찝찝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감사하다고 인사하는데 수혁은 그런 진겸을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비싼 것도 아니고. 그냥 받으면 좋겠는데, 참…….’

수혁은 짧게 혀를 차고는 쇼핑백에서 노트북 박스를 꺼냈다.

“기본 세팅은 다 해 왔어. 바로 써도 돼.”

“……한 달로 해요.”

“뭘?”

“일주일 치 말고 한 달 치요!”

뭔 소리인가 했더니 선물 사 오는 거 말하는 모양이다.

“싫은데.”

“그럼 저 이거 안 받을래요.”

진겸이 손으로 노트북 박스를 밀었다. 그에 수혁이 얕은 숨을 내쉬었다.

“한 달이면 되지?”

“네.”

“……알았어. 그렇게 해.”

영 내키지는 않아도 노트북을 받게 하려면 약속을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그러라 했다. 물론 지킬 생각은 없었다.

약속했음에도 진겸은 여전히 불만스러워 보였다. 선물이랍시고 고가의 물건들을 사 오는 것이 고맙지만 역시 부담스러웠다. 혹시라도 나중에 저도 모르게 받는 걸 당연하게 여기게 될까 봐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한 달 후면 퇴원이니까 괜찮겠지.’

그때면 병문안 선물이라고 들고 올 수 없을 테니 괜찮지 않을까 싶다.

“이걸로 열심히 공부해서 자격증 꼭 따라고 주는 거야. 나중에 합격하면 내 덕 잊지 말고. 알았지?”

“……순수하지 못한 목적이네요.”

“지금까지 너한테 준 거 다 내 마음이야. 그러니까 거절하지 마. 내가 덩치는 커도 마음이 좀 여려. 상처 잘 받는다.”

진겸은 뭐라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자꾸 상처받는다고 하는데 자기가 아는 선수혁은 원범 못지않게 매정했다. 다른 사람한테 상처받을 위인이 아니란 의미였다.

“또, 또. 표정 관리 좀 하라고 했지. 네 생각 다 티 나거든?”

“……아무 생각도 안 했어요.”

“거짓말하지 마. 얼굴에 다 써 있어.”

수혁은 픽 웃으며 노트북 박스를 개봉했다. 병원으로 오기 전에 직접 매장에 가서 산 거였다. 가장 가볍고 성능이 좋다는 최신형 제품이었다. 괜히 무거운 거 줬다가 들고 다니지 못하면 사 준 의미가 없으니 말이다.

그사이 진겸은 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지난번에도 비슷한 말을 들어서인지 괜히 신경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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