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81화 (81/92)

81화

두 사람을 내보낸 진우는 어쩐지 개운해 보였다. 정리해야 할 게 있다고 했지만 대부분 아침에 해 놔서 더 할 건 없었다.

진겸은 침대에 걸터앉아 천천히 다리를 흔들었다.

“진짜 여기서 잘 거야?”

“응. 계속 같이 있겠다고 했잖아.”

“그래도…… 불편하잖아.”

진우는 병실 문이 잘 닫혔는지 확인하고 진겸의 옆에 앉았다.

“저기 내가 잘 침대도 있고 에어컨도 있고 화장실도 있고.”

진우는 침대를 짚고 있던 진겸의 손을 겹쳐 잡았다.

“무엇보다…… 형이 여기 있잖아.”

진겸은 제 손 위로 포개어진 손의 온기와 손가락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느꼈다. 진우가 진심으로 하는 소린지 아니면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하는 말인지는 몰라도 괜스레 기분이 간질간질했다.

보통 보호자가 병실에 같이 있는 건 간호를 위해서일 때가 대부분이다. 수술 후라면 모를까. 지금 진겸의 옆에 보호자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었다.

진겸은 손을 뒤집고는 진우의 손가락을 톡톡 건드렸다. 따라 움직이는 손가락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가끔은 집에 가서 푹 쉬고 와. 시설이 좋아도 집이 최고지.”

“필요하면. 그때 그럴게.”

“알겠어. 꼭 옆에 안 있어도 돼. 무리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해.”

“형 옆에 있는 게 내가 하고 싶은 거야.”

따스하게 웃는 진우를 따라 진겸의 얼굴에도 완연한 꽃이 피었다.

* * *

수혁과 원범은 자주 찾아왔다. 약속이라도 한 듯 항상 같이 오곤 했다.

진우는 언제나 귀찮다는 얼굴로 그들과 함께 병실 문을 열었다. 혼자 오는 날에는 문을 여는 순간부터 이미 얼굴에 웃음이 만발했다. 혼자 오는 게 그렇게나 좋을까 싶은 정도로 밝은 웃음이었다.

매일 오는 것도, 미리 연락하고 오는 것도 아닌지라 진겸은 진우가 올 시간이 되면 항상 문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기다리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이제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일정 시간만 되면 문 쪽을 보고 앉아 있기 일쑤였다. VVIP 병실은 일반병실과 동떨어져 있다 보니 복도를 오가는 사람이 한정적이다.

더구나 진겸이 있는 병실은 복도 끝에 있어 방문객이 아니라면 오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이틀 동안 오질 않았으니, 오늘은 오겠거니 싶어 빤히 문만 바라보고 있길 20분쯤 지났을까. 드디어 복도를 울리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진우 혼자가 아니었다.

“형, 나 왔어.”

병실로 들어오는 진우의 뒤로 원범이 보였다. 진겸은 그대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안녕하세요!”

“어.”

역시나 단답형이다.

진겸은 해맑게 웃으며 진우를 향해 팔을 벌렸다. 그러자 진우도 익숙하게 팔을 벌려 진겸을 품에 꽉 안았다.

“어서 와. 오늘도 수고했어.”

진우의 등을 톡톡 두드려 쓸어내렸다.

요즘 진우가 퇴근하면 항상 안아 주고 있다. 집안의 가장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진겸이 고안해 낸 방법이다.

그렇게 진우를 안고 있다가 가만히 서 있는 원범에게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눈을 굴려도 수혁은 보이지 않았다. 항상 같이 오더니 오늘은 혼자 온 모양이다.

진겸은 팔을 풀면서 높이를 맞추기 위해 들었던 뒤꿈치를 내렸다.

“수혁이 형은?”

“야근. 저녁은 다 먹었어?”

“응. 오늘도 안 남기고 다 먹었어. 근데 좀 출출해.”

배를 문지르며 말하자 진우가 가방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뭐라도 좀 사 올까?”

“음…… 떡볶이?”

“죽 사 올게.”

“아, 그럼 왜 물어봤어!”

“먹어도 괜찮은 거 말하면 사 올 생각이었지.”

진겸이 입술을 삐쭉거리자 진우가 픽 웃었다.

전에는 절반밖에 안 먹던 병원 밥도 요새는 다 먹는다. 병원에 있으면서 심심하다고 계속 이리저리 돌아다녀서 먹는 양이 조금 늘어난 모양이다. 물론 여전히 맛은 없다며 툴툴거리긴 한다.

“그럼 나간 김에 네 거랑 형 것도 사 오면 되겠다.”

“이사님은 집에 가서 드셔야지. 아주머니가 정성스레 만들어 놓은 음식들이 있을 텐데. 여기서 드시고 가면 다 버려야 하잖아.”

“아…… 그건 생각 못 했어.”

진우는 이때다 싶어 몸을 돌렸다.

“저 나갈 때 같이 가시죠, 이사님.”

“온 지 5분밖에 안 됐어.”

“5분이면 충분하죠. 더 하실 말씀도 없으시잖아요.”

“……생각해 보니 오늘 아주머니 쉬는 날이야. 집에 가도 먹을 거 없어. 죽 사 오는 김에 내 것도 사 오면 되겠네.”

그렇게 원범의 말에 진우는 죽을 사러 가야 했다. 끝까지 원범과 같이 나가려 했던 진우는 진겸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자 어쩔 수 없이 병실을 나섰다.

만약 아주머니가 쉬는 날이라면 전날 모든 음식을 만들어 놓았을 거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보내 저녁상을 차려 놓으라 했을 터였다.

원범의 집 청소와 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아주머니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그의 곁에 있던 사람이기에 갑작스레 쉴 리 없었다.

진우도 그걸 알기에 이번에도 수작질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진겸이 배고픈 걸 원치 않아 마지못해 음식을 사러 나간 것이다.

오랜만에 단둘이 남게 되자 진겸이 슬그머니 눈동자를 굴렸다. 다 같이 있을 땐 괜찮은데 둘만 있으려니 뭔가 어색했다. 이런 일이 흔치 않아서 더 그랬다. 그렇다고 불편한 건 아니었다. 그저 몇 번 경험해 보지 못했기에 생소할 뿐이다.

“앉으……세요.”

원범이 계속 서 있자 진겸이 소파 쪽으로 이끌었다.

“몸은 어때?”

“좋아요. 먹고 자고 쉬고.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게 한가해요.”

“공부한다고 하지 않았어?”

소파에 앉자마자 다리를 꼰 원범이 등받이에 편하게 기대고는 허벅지에 손을 올렸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던 진겸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자꾸 다리 꼬면 골반 틀어진대요.”

“……뭐?”

원범이 황당하다는 투로 물었다.

“그러면 척추가 휘어서 나이 들면 힘들다고 했어요.”

“허.”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대답이었다.

“너튜브?”

“예?”

“너튜브에서 본 거냐고.”

“네! 많이 안 좋으면 디스크 수술할 수도 있대요. 그러니까 이거…….”

진겸의 시선이 원범의 다리로 향했다.

원범은 어릴 적 말고는 제 자세를 지적한 사람을 처음 만나 봤기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다리를 움찔 떨었다.

남이 그랬으면 무시하거나 눈앞에 보이지 않게 처리했을 거다. 그런데 그 말을 한 사람이 진겸이라서 둘 중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미치겠네.’

원범의 다리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옅은 갈색 눈동자는 그가 어서 꼰 다리를 풀길 원하는 듯 보였다.

서서히 움직이는 다리에 진겸의 눈동자가 따라갔다.

“이러면 되나?”

“네!”

원범은 진겸이 원하는 대로 꼬았던 다리를 풀었다. 다리 위에 올린 커다란 손이 움찔거렸다.

다리 푼 것이 만족스러운지 진겸의 표정이 너무도 해맑았기 때문이다.

저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날이 오기는 할는지.

‘딱히 보고 싶진 않네.’

이 얼굴은 마냥 웃고 있는 게 어울린다. 원범은 그렇게 생각했다.

원범이 빤히 응시하자 그 시선을 피해 진겸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그러고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검은 화면에 지문이 남을 정도로 꽉 쥐었다가 뭉개질 정도로 벅벅 문지르더니 슬쩍 입을 열었다.

“전화번호…… 알려 주실 수 있어요?”

“내 번호? 왜.”

“아니 그냥…… 알고 있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요. 지원해 주신 거, 천천히 조금씩이라도 갚고 싶어서요.”

핸드폰을 쥔 새하얀 손이 꼼지락거렸다. 나름 용기를 내어 말한 거였다.

진겸이 생각해도 원범과 자신이 계속 볼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진우야 비서이니 보겠지만 자신은 그저 비서의 형에 불과했다.

원작에서는 원범에게 치근덕거리느라 그와 강제적인 접점을 만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자신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기에 빚을 갚기 위해서 알아 두려 했던 거였다.

물론 진우를 통해 연락하는 방법도 있다. 원범은 어쩌면 그걸 원할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다.

번호를 달라는 건 순전히 제 욕심이다.

《그레이》의 주인공이기도 하고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맺은 인연이기도 했다. 이 관계를 얼마나 유지해 나갈 수 있을지는 몰라도 고마움을 조금이나마 갚고 싶은 마음이 컸다.

원범은 긴장한 진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그깟 전화번호가 뭐라고.’

자기가 물어봐 놓고 거절이라도 당할 줄 아는 건지 눈동자와 손가락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원범이 말없이 자기 핸드폰을 켜서 화면을 몇 번 터치하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통화 연결음이 두어 번 들리다가 연결이 되지 않는다는 음성이 나왔다.

진겸은 원범이 뭘 하는 건지 몰라 가만히 기다렸다.

원범의 시선이 진겸의 핸드폰 화면으로 향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다. 이력서에 적혀 있던 번호는 이게 맞았다. 진우와 뒷번호도 같다.

의문이 살짝 서린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였다.

“네 번호, 이거 아니야?”

원범이 자기 핸드폰을 내밀자 진겸이 번호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맞아요. ……어라? 왜 전화가 안 오지?”

“…….”

원범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다.

“핸드폰 줘 봐.”

진겸은 순순히 핸드폰을 넘겼다. 커다란 손가락이 움직였다. 잠금장치도 없어 바로 켜졌다. 배경 화면은 푸른 하늘이다.

최근 통화 목록에 제 번호가 떠 있긴 했다. 앞에 동그라미 안에 빗금이 그어진 차단 표시와 함께 말이다.

진겸이 직접 전화번호가 뭐냐고 물었으니 차단을 한 건 원범의 전화번호를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그리고 그 대상이 누군지 금세 좁혀졌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