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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79화 (79/92)

79화

다시 자리로 돌아가자 화장실에서 나온 진겸이 여전히 코를 훌쩍거리고 있었다. 하도 울어서 눈가가 붉었다.

원범은 쥐고 있던 페트병을 내밀었다.

“허.”

편의점에 들어가고 나오는 걸 보고 있던 수혁이 대놓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한발 늦었네.’

수혁도 생각을 안 한 건 아니지만 행동으로 옮긴 건 원범이었다. 카페에서도, 여기서도.

진겸이 붉어진 눈으로 올려다보기만 할 뿐 받질 않자, 다르게 해석한 원범이 뚜껑을 열어 다시 내밀었다.

“마셔.”

바로 받지 않았던 건 뚜껑을 열어 달라는 게 아니라 원범이 자신을 챙겨 주는 게 조금 의외라서였다.

“……감사합니다.”

코맹맹이 소리를 낸 진겸이 음료를 받았다. 목마르다는 느낌이 없었는데 한 모금 마시자 이내 꿀꺽꿀꺽 잘도 넘어갔다.

진우가 천천히 마시라며 진겸의 등을 차분하게 쓸었다. 그러면서도 원범과 수혁을 힐끗거렸다.

그들의 눈에는 진겸만이 담겼다. 어느덧 익숙해져 버린 시선이다.

진우는 두 사람의 마음이 완전히 진겸에게 기울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인정하는 것과는 별개로 진겸과 만나게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 와중에 방금 보여 준 원범의 행동으로 진우의 생각이 깊어졌다.

‘의외네.’

원범이 다른 사람을 챙기는 걸 본 적이 없었다. 그는 항상 물질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가끔 자신을 챙기긴 했지만 직접 발로 뛴 적은 없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전에는 저들의 덫에 진겸이 걸리지 않길 바랐지만 그건 이미 늦었다. 게다가 진겸이 두 사람과 함께하는 것을 불편해하지 않고, 오히려 좋아하는 것처럼 보였다.

진우가 이런저런 생각을 할 동안 진겸은 여전히 이온 음료를 마시고 있었다. 입도 작은데 입 안도 작아서 들어가는 양이 너무 적었다.

“후아!”

많이 마신 것도 아닌데 갈증이 사라지고 울렁이던 감정도 어느새 가라앉았다.

“이제 좀 진정이 돼?”

“네. ……너무 울어서 놀라셨죠?”

“어. 아주 대성통곡을 하더라. 나 영화관에서 너처럼 우는 사람 처음 봤어. 그렇게 슬펐어?”

수혁의 말에 페트병을 꽉 쥔 진겸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까는 창피한 줄 모르고 그냥 제 슬픈 감정을 쏟아 내기 급급했는데 돌이켜 보니 자신이 생각해도 좀 과하게 울었던 것 같긴 하다.

“뭐가 그렇게 슬펐는데?”

“……겨우 만난 가족을 영원히 못 본다는 게. ……안타까웠어요.”

차분히 말하는 진겸의 손은 어느새 진우의 손을 향해 갔다. 검지를 살짝 걸었다.

“가족과 헤어지는 건 슬픈 일이니까요.”

* * *

집에 온 진겸은 옷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 위로 풀썩 엎어졌다. 돌아다닐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집에 들어오자마자 몸에 힘이 쭉 빠졌다.

영화를 보고 나서 밥도 먹고, 서점도 들르고, 쇼핑도 하느라 시간이 꽤 늦었다.

“옷 벗고 누워.”

진우가 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진겸은 못 들은 척하며 몸을 벽 쪽으로 돌렸다. 침대 가장자리가 푹 꺼지는 게 느껴졌다. 진우가 앉은 거였다.

“돌아봐. 단추 풀어 줄게.”

“……내가 할게. 너 먼저 씻어.”

“상태를 보아하니…… 씻고 나와도 그대로일 것 같은데?”

진겸은 아니라는 말을 선뜻 하지 못했다. 정말 귀찮아서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회사에 다녔을 때와는 다른 묵직한 피곤함이었다. 진우에 비해 일의 강도는 현저히 낮았지만 퇴근하고 돌아오면 몸이 천근만근이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내내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한 데다 지난 주말엔 집안일을 한다고 제대로 쉬지 않았고 어제도 진우랑 나갔다 와서 그런지 체력 회복할 시간이 부족했다.

진겸이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진우가 등을 콕 찔렀다. 움찔 떨면서 귀찮다는 듯 베개에 얼굴을 더 파묻었다.

“억지로 돌린다?”

“…….”

“읏차.”

진우는 일부러 소리를 내가며 진겸의 몸을 돌렸다. 힘을 주지 않은 가벼운 몸은 휙 돌아갔다.

“푸흐…….”

웃긴 상황도 아니건만 괜히 웃음이 나와 진겸이 피곤한 얼굴로 키득거렸다. 애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자 진우의 얼굴에도 덩달아 웃음꽃이 피었다.

하나를 하더라도 진겸의 눈치를 살폈던 때와는 달랐다. 전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일들을 요새 너무 많이 하고 있다. 진겸이 변한 것도 있지만 자신 또한 변하고 있다는 걸 절절히 느꼈다.

진우가 단추를 하나씩 푸는 동안 진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팔 들어.”

아예 셔츠를 벗겨 주려고 움직여 보라 하니, 진겸은 누운 자세 그대로 이리저리 몸을 비틀기만 했다.

“바지도 벗긴다?”

이미 양말을 벗긴 진우가 손을 뻗으려 하자 진겸이 서둘러 막으며 말했다.

“아…… 거긴 좀…….”

“그건 또 싫어? 알겠어. 나 먼저 씻을 테니까. 나 나오면 바로 들어가. 오늘 돌아다니느라 땀 났잖아.”

“잔소리쟁이!”

“잔소리가 아니라 형을 위한 사랑의 속삭임이라고 해 줘.”

“……너 아까 서점에서 이상한 거 봤지?”

진겸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서점에 들렀을 때 진우가 베스트셀러 쪽에 있는 걸 봤다. 그때 매대에 있는 책 대부분이 사랑에 관한 거였다. 거기서 몇 권 샀던 걸로 기억한다.

“이상한 거라니. 그냥 소설책이야. 아…… 찝찝해. 씻고 올게.”

진우는 자신이 벗은 옷과 진겸의 옷을 챙겨 방에서 나갔다. 곧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고 물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귀찮아서 멍하니 있던 진겸은 에어컨을 켜고는 이불로 몸을 꽁꽁 감쌌다.

빼꼼히 내민 팔로 침대 구석에 있는 북극여우 인형을 톡 건드렸다. 이걸 볼 때마다 진우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알면서도 침대에 뒀다.

부드러운 새까만 코를 손끝으로 문지르다가 몸을 일으켰다.

“너도 내일 나랑 가자. 수술하고…… 한 달은 병원에서 지내야 할 것 같은데 여기 뒀다간 진우가 널 가만히 안 둘 거야.”

딱히 진우가 인형에게 몹쓸 짓을 하지는 않겠지만 볼 때마다 눈에 불을 켜는 걸 자주 목격해서인지 살짝 불안했다.

“……괜찮겠지, 나?”

인형의 양 볼을 꾹꾹 누르다가 품에 꽉 안았다. 동글동글해서 안고 있으면 편했다.

한참 동안 인형을 만지던 진겸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난번에 크게 아프고 나니까 괜히 머릿속이 복잡했다. 훈일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못 일어나면 어쩌지…….”

“그럴 일 없어.”

“……진우야.”

너무 생각에 빠진 나머지 문 열리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목에 수건을 두른 진우가 다가와 바닥에 앉았다. 그러고는 진겸의 손을 꽉 잡았다.

“걱정되는 건 알지만 안 좋은 생각은 하지 마. 훈일이 형이 수술하잖아. 절대 형…… 죽게 안 둬. ……알았지?”

어쩐지 애절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진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자신보다 진우가 더 불안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응. 너도 훈일이 형도 믿을게.”

진겸은 안심하라는 듯 밝게 웃어 보였다.

* * *

입원 수속은 빨랐고 이내 검사를 진행했다. 결과가 나오자 바로 수술 날짜가 확정되었다. 훈일은 그날까지 컨디션 조절을 잘하라고 했다.

오전 반차를 냈던 터라 진우는 회사에 있었다. 진겸은 이 소식을 메시지로 보냈다. 그러자 진우에게서 바로 전화가 왔다.

“응. 진우야.”

― 바로 잡혔네. 몸은 어떻대?

“괜찮대. 수술 충분히 할 수 있대. 너 바쁜 거 아니야?”

― 괜찮아.

― 진겸 씨! 보고 싶어요!

갑자기 들리는 양 비서의 목소리에 진겸이 키득거렸다. 진우의 옆에 붙어서 소리쳤을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송별회 때 양 비서는 참석하지 못했다. 같이 먹고 싶었지만 선약이 있어서 미안하다며 다음에 따로 보자고 했었다.

진겸은 제 발가락을 보며 꼼지락거렸다.

“나도 양 비서님 보고 싶다고 전해 줘.”

― 형이 보기 싫대요.

“응? 아니. 보고 싶다고!”

― 형이 완전 보기 싫대요.

― 어디서 거짓말을!

― 아, 좀!

양 비서가 뭔가를 했는지 진우가 짜증을 냈다.

“제대로 전해야지. 오해하시겠다!”

― 오해 안 해. 소리가 커서 다 들렸어.

“아…….”

― 푹 쉬고 있어. 인형이랑 놀지 말고, 너튜브도 많이 보지 말고 책 산 거 봐. 퇴근하면 바로 갈게.

“알았어. 이따 봐.”

― 응. 끊을게.

통화를 마친 진겸은 침대에 드러누워 병실을 둘러보았다. 저번보다 더 좋은 곳이다. VVIP에게만 제공되는 병실이라나 뭐라나.

훈일도 자기 환자가 이곳에서 지내는 거 처음 봤다고 했다. 더구나 하루 입원 비용이 몇백이라는 사실에 부담스럽기도 했다.

병원비는 전적으로 원범이 지원하고 있다. 그렇다는 건 입원비 또한 원범이 낼 거란 거다.

‘그래도 너무 비싼데.’

며칠만 있을 것도 아니고 한 달 넘게 입원해야 한다는데 그동안 발생할 비용이 걱정이었다.

‘보니까 돈을 좀 막 쓰는 것 같기도 하고…….’

진겸은 아직도 원범이 다단계를 하고 있다고 알고 있었다. 수혁과 얘기했을 당시 그 오해를 정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상위 1% 재벌인 것도 아니잖아?’

물론 뒤로 번 돈이 많다 보니 원범의 재산이 정확히 얼마인지는 몰라도 이렇게 막 낭비해도 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침대에서 바둥거리던 진겸은 북극여우 인형을 꼭 안았다. 진우는 놀지 말라고 했지만 혼자 있는 병실에서는 인형이 유일한 친구였다.

“……심심해.”

한동안 바쁘게 움직이다가 이러고 있으려니 괜히 더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빨리 7시 됐으면 좋겠다.”

그래야 진우가 퇴근하고 올 테니까.

진겸은 한참을 인형과 함께 침대에서 뒹굴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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