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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78화 (78/92)

78화

“그럼 팝콘을 반으로 나누죠.”

“나눌 통이 어딨어? 이거 봐. 애가 팝콘에서 시선을 못 떼잖아. 계속 이렇게 서 있게 할 거야?”

네 사람 중에서 팝콘을 먹으려 한 건 진겸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를 위해 큰 캐러멜 팝콘을 샀다. 많이 먹지는 못하더라도 먹고 싶은 걸 하나라도 더 먹이려는 마음에서였다.

수혁의 말에 진겸도 잠깐 고민했다. 원범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면서 애써 진우와 떨어트려 놓지 않아도 되었다. 애초에 그래 본 적도 없긴 했다. 게다가 캐러멜 팝콘이 무척이나 먹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진겸이 슬쩍 수혁의 옆으로 붙었다.

사실 수혁이 팝콘을 산 후부터 진겸은 상영관 안으로 들어오는 동안 진우의 눈치를 살피면서 그가 다른 곳을 볼 때마다 서둘러 하나씩 입에 넣었다.

그럴 때마다 팝콘을 들고 있는 수혁과 눈이 마주쳤는데 눈감아 달라며 히죽 웃었다.

이런 것도 마음대로 못 먹는 현실이 조금 서글프기는 했어도 어쨌든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 위해선 절제해야 하는 게 맞았다.

그래서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앉자. 너도 그렇고 원범…… 형도 안 드시니까.”

“……원범 형?”

진우는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강하게 문질렀다. 수혁도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제 옆에 붙은 진겸을 내려다봤다.

원범만이 만족한 얼굴로 진우의 팔을 잡고서 안쪽으로 들어가 앉았다. 그는 어딜 앉아도 상관없었다. 게다가 아까 진우 몰래 팝콘을 먹던 진겸의 모습이 뇌리에 남아 마음 편히 먹으라는 약간의 배려도 섞인 행동이었다.

“이사님.”

“앉아. 통행에 방해돼. 백진겸이랑 떨어지기 싫은 건 알겠는데 고작 2시간이야. 그거 못 참아?”

“……알겠습니다.”

진우가 마지못해 자리에 앉자 진겸이 기다렸다는 듯이 수혁과 같이 앉았다. 빼꼼히 주변을 보면서 시야가 잘 가려지는 게 맞는지도 확인했다.

그 모습을 본 진우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전보다 빈도가 줄긴 했어도 진겸이 걱정되는 순간이 오면 저도 모르게 한숨을 뱉었다.

원범은 광고가 나오는 스크린을 응시한 채 입을 열었다.

“많이 먹는 거 아닌데 저 정도는 그냥 둬도 되지 않아?”

“가끔은 괜찮지만 한번 먹으면 그 맛을 계속 기억하잖아요. 나중에도 먹고 싶어질까 봐……. 그걸 방지하는 거예요. 못 먹으면 속상하니까…….”

여전히 진겸이 있는 쪽을 보며 답했는데, 뉘앙스가 어쩐지 음식에 국한된 것만은 아닌 듯했다.

* * *

영화는 전체적으로 참 괜찮았다. 코미디 영화답게 중간중간 웃음 포인트도 많았고 배우들 연기와 연출이 좋아서 몰입하며 봤다.

평점과 리뷰가 좋았던 만큼 확실히 한 번쯤은 볼만한 영화였다.

처음에는 흥미진진하게 보면서 캐러멜 팝콘을 마음껏 먹었다. 바삭바삭 씹히는 소리가 쉬지 않을 정도로 계속 입에 넣었다.

“너무 많이 먹지는 마.”

수혁의 한마디에 팝콘을 집던 진겸의 손이 멈칫거렸다.

“먹지 말라는 게 아니라 적당히 먹으라는 거야. 많이 먹어 봤자 좋은 거 없잖아.”

진겸은 제 입 앞으로 배달된 팝콘을 말없이 받아먹었다.

‘이상한 사람이야.’

수혁은 말을 참 이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하라면서 하지 말라고 하고, 하지 말라면서 또 하라고 한다.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헷갈릴 정도로 말의 앞뒤가 달랐다. 그래서인지 사람이 진중해 보이질 않는다.

아무렴 어떠냐 싶어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겸은 연신 팝콘을 집어 먹었다.

한편 수혁은 뻔한 전개에 지루해지던 참이었다. 이런 류의 영화는 몇 번이고 봤다. 개중 끝까지 본 것도 몇 작품 안 된다.

그나마 이 지루함을 버틸 수 있는 건 옆에 진겸이 있어서였다. 영화에 집중하는 진겸을 보고 있자니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잠시 스크린에 시선을 줬다가 다시 진겸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수혁은 놀라서 몸을 바르게 세웠다.

스크린에서만 나오는 불빛에 비친 진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와 볼을 따라 아래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진겸만이 아니었다. 영화관 곳곳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연이어 났다. 하지만 수혁의 귓가엔 진겸의 울음소리만이 들려왔다.

“……야, 백진겸?”

“흐읍, 흐, 끅.”

“어우, 어…….”

서럽게 우는 진겸의 모습에 수혁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팝콘을 바닥에 두고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나 봐 봐.”

“흐으…….”

“애도 아니고 뭘 저런 걸로 울어.”

조명이 전부 꺼졌어도 진겸의 얼굴이 너무 잘 보였다. 두 눈에서는 계속해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수혁이 손수건으로 진겸의 눈가를 꾹 누르면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하지만 흡수된 만큼 또 눈물을 쏟아 내는 통에 닦는 의미가 없었다.

게다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입술을 앙다물고 있는 게 안쓰러워서 엄지로 아랫입술을 살포시 눌렀다.

“세게 물지 마. 입술 상할라.”

“흡!”

주르륵 흘러내리는 건 눈물만이 아니었다. 코에서도 투명한 물이 흘렀다. 그게 수혁의 손가락에 닿자 진겸이 서둘러 닦으려 했지만 손수건이 코에 닿는 게 더 빨랐다.

“킁 해.”

“…….”

“……이건 좀 그런가?”

살짝 웃음기가 서린 목소리에 진겸이 슬쩍 수혁을 봤다. 그는 눈썹을 아래로 늘어트렸음에도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다.

수혁은 자신의 인내심을 최대한으로 끌어 올려야 했다. 당장이라도 양팔에 진겸을 가두고 이곳저곳 마음껏 만지고 싶었다.

우는 모습이 안쓰러운데, 그것보다 귀엽다는 감정이 너무 앞선 탓이었다.

‘아, 미치겠네.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거야?’

진겸이 귀엽다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지만 매번 새로운 귀여움으로 자신의 마음을 흔들고 있다.

‘후…… 참자. 참아야지.’

하고 싶은 대로 했다간 겨우 좁혀 놓은 거리가 한순간에 멀어질 수도 있으니 천천히 다가가야 했다.

수혁은 여전히 자신을 보며 눈물을 떨구는 진겸의 얼굴에 입을 꾹 다물었다. 입을 열었다간 마음의 소리가 새어 나갈 것 같았다.

짧게 심호흡하고는 어린아이를 달래듯 머리를 쓸어 넘겨 주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갈래?”

“……아니요. 다 볼래요.”

“그래.”

다시 스크린으로 고개를 돌린 진겸을 계속 살피던 수혁은 조심스레 속삭였다.

“……더 붙어도 돼?”

스크린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진겸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이 떨어지자 수혁이 빠르게 진겸의 등 뒤로 팔을 뻗었다. 그러고는 얇은 팔을 감싸 안아 품으로 당기고는 울지 말라는 듯 토닥였다.

그냥 옆으로 다가온다는 의미인 줄 알았던 진겸은 수혁이 확 붙어 오자 순간 몸이 굳어 버렸다. 수혁은 그걸 알아챘으면서도 떨어지지 않았다.

만약 진겸이 싫어했다면 바로 팔을 풀었을 테지만, 이내 진겸은 영화에 온 신경을 집중해 스크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다가 겨우 그쳤던 눈물을 영화 막바지에 다시 한번 쏟아 냈다.

수혁은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억지로 내리고는 진겸의 눈물을 닦아 주느라 바빴다.

오랜만에 보는 영화에 진우도 꽤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옆에서 서럽게 우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진겸이 우는 게 보였다. 그쪽으로 가려 했지만 이미 수혁의 품에 안겨 있었기에 주먹을 꽉 쥐고 참아야 했다.

‘……겸아.’

그리고 이 모든 장면을 원범 또한 지켜보고 있었다.

영화가 끝난 후, 진겸은 눈물과 콧물로 범벅된 얼굴을 닦기 위해 화장실로 갔고 그 뒤를 진우가 쫓았다.

수혁과 원범은 잠시 밖에서 기다렸다.

수혁은 영화가 끝나서도 훌쩍거리던 진겸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다. 이런 영화는 취향이 전혀 아니건만 진겸과 함께라면 또 봐도 될 것 같았다.

‘누가 우는 게 귀엽다고 느끼게 될 줄은 몰랐는데……. 좀 심하게 예뻤지.’

눈물을 흘리는 것도 제 마음을 울렁이게 했다. 그냥 주르륵 흐르는 게 아니라 뚝뚝 떨어지는데, 그 모습이 뇌리에 팍, 박혀 버렸다.

‘근데 그렇게까지 울 정도였나?’

감성적인 사람이라면 충분히 울 순 있을 거다. 그러라고 만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너무 우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건 아닌지. 작은 의문이 들었다.

혹시 영화를 보다가 단편적이나마 기억이 돌아오기라도 한 걸까?

수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원범에게 물었다.

“탁 이사, 영화 슬펐어?”

“아니.”

원범의 빠르고 단호한 대답에 수혁의 고개가 미세하게 옆으로 꺾였다. 그에게서 슬프다는 대답이 들려올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물은 거였다.

“나도 그래. ……백진겸은 확실히 우리랑 다르네. 감정에 충실하다 못해 깊게 파묻혀 있어.”

극장 안에 있던 관객들의 훌쩍거림도 들리긴 했다. 애초에 감정을 흔들어 눈물샘을 자극하려고 작정한 장면이니 당연한 거였다.

그저 그런 걸로 울기엔 수혁과 원범의 감정은 무딘 것뿐이었다.

“기분이 이상해.”

“…….”

“백진겸이 울어서 그런 건가?”

“…….”

“여기 나 혼자 있냐?”

수혁이 뚱하게 말해도 원범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건너편을 향해 있었다.

“응? 어디가?”

“…….”

“저거 아주…… 내 말이 맛있지.”

원범은 자신을 부르는 수혁을 내버려 둔 채 목적지가 확실한 사람처럼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한 곳은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이었다. 그렇게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을 펑펑 쏟아 냈으니 수분 보충이 필요할 듯했다.

‘……미쳤군.’

자신이 누군가를 신경 쓰고, 그 사람이 너무 울어서 탈수가 올까 봐 걱정돼서 물을 사러 편의점에 왔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음료 냉장고 앞에 서서는 어떤 걸 사야 하나 꽤 고심했다.

‘물보단 이온 음료가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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