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진우와 수혁이 은근한 기 싸움을 할 동안 원범은 제 욕심을 채우고 있었다.
“……혹시 반려동물 키우세요?”
“아니.”
“근데 왜 자꾸 머리를 만져요?”
이제는 습관처럼 진겸을 만나면 머리에 손부터 올린다. 툭툭 치는 것 같았던 처음의 손길과는 달랐다. 지금은 정말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진겸은 아침부터 세팅한 머리가 엉망이 되자 머리를 좌우로 털며 커다란 손에서 벗어났다.
“저 드라이했어요!”
원범은 사라진 머리통을 찾아 손을 움직이다가 다급한 외침에 멈췄다. 눈을 찌푸렸다가 펴자 진겸이 변명하듯 이유를 덧붙였다.
“……이거 하는 데 30분이나 걸렸단 말이에요.”
머리를 정리하는 진겸의 손은 바빴다. 툴툴거리느라 앞으로 튀어나온 입술이 유난히 붉었다.
“잘했어. 예쁘네.”
“…….”
진겸이 입술을 들썩이다 꾹 다물었다. 수혁이 말했을 땐 그냥 인사치레처럼 들렸는데 원범이 말하니 느낌이 이상했다. 온몸이 간지러웠다.
“예쁘다니까?”
“……저도 알아요.”
원범의 눈이 다시 가늘어졌다. 수혁에게 보였던 반응과 달라도 너무 달라 약간 언짢아졌다.
수혁이 예쁘다고 했을 땐 웃으면서 안다고 하더니, 자신이 예쁘다고 하니까 떨떠름하게 대답한다.
‘너무 많이 들어서 무감각해진 건가? 웃는 얼굴 한 번 더 볼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동시에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러다가 또 자각한 생소한 감정에 실소를 머금었다.
‘날 어디까지 흔들 수 있을지 궁금하네.’
원범이 손끝으로 진겸의 이마를 툭, 뒤로 밀었다.
“아!”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진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원범이 힘을 준 건 아니지만 이렇게 이마를 맞은 건 처음이라 조금 놀랐다.
“뭐야, 애 이마는 왜 때려?”
“반응이 기분 나빠서.”
“무슨 반응?”
진우와 기 싸움을 하느라 원범과 진겸에게 집중을 못 했던 수혁이 되물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수혁이 무슨 일이냐는 듯 진겸을 봤다.
“저도 잘…….”
너무 뜬금없이 일어난 일이라 진겸도 원범이 왜 저러는지 영문을 몰랐다.
진겸이 이마를 문지르며 진우의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프진 않았지만 옆에 있다가 또 맞을 것 같았다.
갑작스러운 원범의 행동에 황당한 건 진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사님이 갑자기 왜 때린 거야?”
“때린 건 아니고 그냥 툭 민 건데…….”
“그러니까 왜?”
“나도 몰라. 반응이 기분 나빴대. ……나 뭐 잘못했나?”
자신이 무언가 실수한 게 있나 싶어 걱정이 앞선 진겸이 묻자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어떤 상황에서든 진겸이 실수하기보다는 원범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일 거라는 게 진우의 결론이었다.
진우는 살짝 빨개진 진겸의 이마를 살살 문질렀다.
“아니, 형은 잘못한 거 없어.”
진우가 진겸을 달래는 동안 수혁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은 채 원범의 팔을 툭 쳤다.
“뭔데. 애 이마 빨개졌잖아.”
“세게 안 밀었어.”
“쟤 이마를 봐라. 정중앙을 아주 꾹 눌러 놨네.”
“…….”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내일이면 입원할 애야. 살살 다뤄.”
원범이 들은 채도 안 하자 수혁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 자신이 뭐라고 한들 원범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걸 알아서였다.
수혁은 예매했던 영화를 확인하고는 시간을 봤다. 상영까지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시작까지 1시간 남았는데. 뭐 할래? 하고 싶은 거 있어?”
“네! 저 저기 가고 싶어요!”
어디서 시간을 보내나 고민하지 않아도 됐다. 먼저 도착했던 진겸이 영화관 옆에 있는 오락실을 보고는 그곳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기 때문이다.
오락실은 밖에서 보기에도 시끄럽고 북적거렸다. 안에 사람도 상당히 많았다. 더구나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원범의 굳은 표정과 멈칫하는 다리가 가기 싫다는 속마음을 표현했다. 수혁도 내키지는 않았지만, 진겸이 너무 기대에 찬 얼굴로 오락실을 보고 있어서 그냥 따라가기로 했다.
결정되자 진우가 동전을 바꿔 왔다. 사실 오락실에 간다고 하면 수혁은 둘째치고 원범은 밖에서 기다린다고 할 줄 알았다.
진겸이 기억을 잃고 나서부터 확 바뀐 원범의 태도는 진우가 느끼기에도 새로웠다. 양 비서가 재미있어하는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형, 여기.”
진겸이 손바닥을 쫙 펴자 500원짜리 동전 4개가 놓였다.
“두 분도 받으세요.”
“오, 백 비서가 쏘는 거야? 그럼 받아야지.”
수혁도 동전을 받았다. 원범에게도 주려 하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예 들어가지 않고 멀리서 그냥 구경만 하려다가 셋만 즐겁게 노는 건 또 싫어서 진겸의 옆으로 슬쩍 붙었다.
오락실에 있던 사람들은 잘생긴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오자 힐끗거렸다. 그런 시선에 익숙한 세 사람은 그러려니 하고 있었고, 진겸은 무얼 제일 먼저 할지 고민하느라 신경 쓸 새가 없었다.
진겸은 오락실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농구 게임 두 개가 붙어 있는 걸 보고는 그쪽으로 향했다.
“우리 내기할래요?”
“내기? 좋지. 뭐로 하게?”
“이거요!”
진겸이 농구 게임을 가리키자 수혁이 입꼬리를 비죽 올렸다.
“이길 수 있겠어?”
“모르겠어요!”
“어?”
“처음 해 봐요. 이거!”
수혁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놀리려다가 너무 해맑게 대답하는 통에 허탈해졌다. 이런 애를 상대로 경쟁심을 불태우려 했다니, 괜히 자신이 쪼잔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기계 앞에 선 수혁이 말했다.
“점수 제일 높게 나온 사람이 밥 사기. 어때?”
“낮은 사람이 사는 거 아니고요?”
“그러면 백 프로 너야.”
진겸은 차마 아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입술을 삐쭉거리면서도 수긍했다.
“탁 이사, 붙어.”
그렇게 원범과 수혁이 나란히 섰다. 하지만 둘 다 농구 코트에서만 해 봤지. 이런 기계로는 처음이었다. 그건 다음 타자인 진겸과 진우도 마찬가지였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자 위에 막혀 있던 망이 사라지면서 농구공이 우르르 아래로 내려왔다.
실제 농구를 하는 것과 달라서인지 초반엔 둘 다 한두 번씩 공이 튕겨 나오더니 금세 감을 익혀 던지는 족족 골대로 빨려 들어갔다.
“와……!”
두 사람의 점수는 한 골 차이로 엎치락뒤치락했다.
1쿼터가 끝났을 땐 동점이었다.
고작 농구 게임을 하는 건데 어느샌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다른 기계 앞은 한산한데 이곳만 북적였다.
처음엔 그냥 점수 내기라고 생각했던 두 사람은 어느새 게임에 진심이 되어 버려 2쿼터에 더 열을 올렸다.
역시나 동점이다.
“하나도 안 놓쳤지?”
“……응.”
진겸이 감탄하며 말했다. 진우도 두 사람에게 집중하고 있다가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든 탓에 진겸이 뒷사람에게 밀려 앞으로 나가자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아 제 쪽으로 당겼다.
제 품에 안겨 있으면서도 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진겸을 보니 괜히 심술이 나서 그의 귓가에 입술을 붙여 속삭였다.
“나도 할 수 있어.”
그에 진겸이 어깨를 떨며 키득거렸다.
“당연하지. 우리 진우도 운동 잘하지!”
“……왠지 놀리는 것 같은데.”
“아니야. 진심이야!”
웃음기가 가득 묻어난 목소리에 아무렴 어떠냐 싶어 더 품으로 당겼다.
그사이 3쿼터까지 끝났다.
점수 차는 3점. 한 골 차이로 원범의 승리였다.
“내가 이겼네.”
어쩐지 원범의 턱이 아까보다 조금 올라간 듯했다.
수혁이 잠깐 진겸을 살핀다고 힐끗거렸다가 진우의 품에 안겨 있는 걸 보고 손을 삐끗해 하나를 놓친 탓이었다.
“아, 넌 갑자기 왜 애를 안아서는.”
“제가 뭘요.”
“후…… 됐고. 둘이 해 봐.”
원범의 점수가 높았기에 밥을 살 사람은 이미 결정됐다.
그저 진겸이 하고 싶어 했던 거라 자리를 비켜 준 거였다. 하지만 진겸은 2쿼터를 할 수 있는 점수를 채우지 못해 그대로 게임이 끝났고, 진우는 원범의 점수를 넘겠다는 일념 하나로 집중했다.
“아…… 아깝다.”
원범과의 점수 차이는 6점. 두 번만 더 골을 성공시켰으면 동점이었을 텐데 시간이 부족했다.
진겸은 자신이 꼴찌라는 걸 예상했던 터라 금방 털고 일어났다. 하지만 이내 들리는 수혁의 말에 샐쭉하니 그를 노려볼 수밖에 없었다.
“이 몸을 얻다 쓰지?”
“…….”
“약해. 운동 신경도 없어. 작아. 쪼끄매. 미니미…… 윽!”
참지 못한 진겸이 어깨로 수혁의 몸을 들이박았다.
“다른 거 해요, 다른 거!”
그 후에도 몇 개의 게임을 했으나 진겸은 번번이 졌다. 그러다가 유일하게 하나 이긴 게 있었다.
자동차 게임.
멀티가 가능해 두 사람이 같은 트랙을 돌 수 있는 게임이다.
진겸과 수혁이 붙었는데 드리프트를 하는 그와 달리 운전 자체가 처음인 진겸은 액셀만 꾹 밟으며 안전 운전을 선택했다.
무조건 도로 안쪽으로 달리라는 진우의 조언을 토대로 자기 페이스대로 하자 마지막 피니시 라인을 먼저 통과할 수 있었다.
“와아!”
진겸이 뛸 듯이 기뻐하자 수혁도 덩달아 웃으며 승리를 축하해 줬다.
그렇게 남은 시간을 전부 오락실에서 보냈다.
영화 시간이 되어 상영관에 입장하고 나서도 바로 앉지는 못했다. 어떻게 앉느냐로 또 한 번 기 싸움이 오갔다.
이번에도 원범은 끼지 않았고 수혁과 진우만이 으르렁거렸다.
“팝콘 내가 들고 있잖아. 진겸이랑 나랑 같이 앉아야지.”
“제가 들면 되죠.”
“그럼 나는? 나도 먹고 싶은데.”
“하나 더 사 오겠습니다.”
“낭비야, 그거. 어차피 둘은 안 먹잖아. 고작 영화 보는 걸로 빡빡하게 굴지 마.”
일반 영화관이었다면 일렬로 앉을 텐데 이곳은 커플석처럼 한 좌석이 넓고 다른 좌석과는 조금 사이가 떨어져 있다. 게다가 가림막이 있어 은근 가려지기도 했다.
진우도 넓은 좌석에서 편하게 영화를 보는 건 좋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과 진겸이 나란히 앉았을 때의 얘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