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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74)화 (74/92)

74화

“어? 이사님!”

“다들 어디 가고 혼자 있어?”

수혁은 자연스럽게 안쪽으로 들어오더니 진우의 자리에 앉았다. 밖에서 보기만 했지, 안으로 들어와 본 건 처음이었다.

수혁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꺾어 진겸을 찬찬히 훑었다. 첫날 입었던 베이지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앉은 자세도 바르고 옷도 참 잘 어울렸다. 항상 부드럽게 내리고 있던 머리가 오늘은 뒤로 넘겨져 있다. 처음 본 스타일인데 역시나 잘 어울린다.

‘뭔들 안 어울릴까.’

수혁이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사님은 회의 안 들어가세요? 오늘 임원 회의라고 알고 있는데…….”

“나는 계열사가 달라서 안 가.”

“일은요? 안 바쁘세요?”

수혁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번부터 진겸은 대화만 하면 자꾸만 일 안 하냐고 묻는 듯했다.

자신이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노는 것도 아니다. 열심히 일할 거 하고 온 거였다.

“나 일 잘해. 그래서 탁 이사가 스카우트한 거잖아.”

“…….”

“그 눈빛 뭐야?”

이번엔 진겸의 눈이 가늘어졌다. 못 믿겠다는 듯 흘겨보자 수혁이 헛웃음을 지었다.

시도 때도 없이 메시지를 보내거나 찾아온 건 맞지만 엄연히 일하면서 한 거였다. 쉬기는 해도 일을 미루거나 하진 않았다.

수혁이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자 찌푸려졌던 진겸의 눈이 서서히 펴졌다.

“근데 어쩐 일이세요? 아직 점심 안 됐는데.”

“그냥 와 봤어.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까 아쉽더라고.”

“뭐가 아쉬워요?”

“지난주에 출장 가서 너 못 본 거. 이번 주에 열심히 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제대로 못 한 것 같아서 지금이라도 하려고.”

진겸은 수혁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커다란 눈을 끔뻑거리기만 할 뿐 대답하지 않자 수혁의 입꼬리가 살포시 올라갔다. 진겸이 앉은 의자 팔걸이를 잡아당겨 바싹 붙었다.

“나 오늘 계속 여기 있을 거야.”

“진우는 어디 앉으라고요?”

“……그게 중요해?”

“당연하죠. 거기 진우 자린데.”

잠시 말문이 막힌 수혁이 콧바람을 길게 내뿜었다.

“이사님도 사무실 따로 있잖아요. 왜 여기 계시려고요?”

“그게 이제 궁금해?”

“……?”

“난 백 비서 자리부터 걱정하길래 나한텐 궁금한 거 없는 줄 알았지.”

여기에 계속 있겠다고 말했으면 왜냐고 먼저 물었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이었다. 하지만 진겸은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렇긴 했지.’

수혁이 기억을 잃기 전의 백진겸을 자주 본 건 아니었다. 그래도 전과 다르게 백진우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처음 같이 백화점에 갔을 때도 정장을 보고서 진우한테 어울릴 것 같단 말을 했었다.

그 후에도 무얼 했을 때 진우를 떠올리는 모습을 종종 봤다.

“너희 형제는 나중에 애인 생기면 어쩌려고 그렇게 애틋해?”

“생기면 생기는 거죠. 애틋하면 좋은 거 아니에요?”

“좋긴 한데 옆에서 보고 있기 질투 나니까 그러지.”

어느새 진겸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작은 손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작다.”

“……저 키 안 작은데요!”

키라는 단어 자체가 입에서 나온 적이 없건만 대뜸 울컥하는 진겸의 모습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니, 내가 뭐라고 했나?

수혁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했다.

“누가 키 얘기했어? 손이 작다고. 이거 봐. 다 가려지잖아.”

“……아. 그럼 손이 작다고 했어야죠. 앞을 그렇게 뚝 자르니까 제가 오해하잖아요.”

“주어를 생략한 내 탓이다?”

“아니, 이사님 탓이라는 게 아니라요.”

진겸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중얼거리자 수혁의 얼굴에 서서히 미소가 번졌다. 확실히 자신이 전보다 편해진 모양이다.

단지 소리쳤다는 이유로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었다.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고 짓궂은 농담을 하는데도 긴장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초반엔 그래도 경계하더니 이젠 그런 것도 없다. 메시지를 보내면 답장도 잘한다.

친해지려고 말을 많이 걸었던 게 빛을 발하고 있나 보다.

“입원은 언제 해?”

“월요일에 하려고요.”

“혼자 가? 데려다줄까?”

“혼자 안 가요. 진우가 오전에 반차 내고 같이 가기로 했어요.”

“아…… 반차.”

수혁은 대놓고 혀를 찼다. 아쉬운 기색이 그득했다.

진겸이 웃으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손등에 수혁의 손바닥에 닿는 게 느껴졌다. 그도 사무실에서 왔을 텐데 손이 뜨거웠다.

“다들 손이 참 따뜻한 거 같아요.”

“다들? 나 말고 또 누가 손잡았는데?”

웃으며 말했지만 어쩐지 오싹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진겸은 에어컨 바람 때문에 그런 줄 알고 말을 이었다.

“제일 따뜻한 건 탁 이사님이요. 몸에 열이 많은가 봐요.”

“탁 이사랑 손잡았어? 왜?”

“손을 잡은 건 아니고 그냥 어쩌다가…….”

머리를 자주 쓰다듬긴 해도 그걸로 알 순 없었다. 제대로 느꼈던 건 카페 화장실에서였다. 그리고 지난주 갔던 치킨집에서도.

‘뜨거웠지.’

진겸이 그때를 생각하느라 잠시 말을 끊자 수혁이 손에 살짝 힘을 줘 자신을 보게 했다.

“나는?”

수혁이 조금 더 느껴 보라며 손을 완전히 덮어서 쥐었다.

“이사님도 따뜻해요.”

“……그게 다야?”

뭔가 더 말해 보라는 듯 재촉하는 눈빛에 진겸이 최대한 말을 골랐다.

무어라 말을 해야 수혁이 만족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애초에 따뜻하다는 말 말고는 떠오르는 것도 없었다.

“봄 같아요, 이사님은.”

“봄?”

“네. 여름은 뜨겁고 가을은 서늘하고 겨울은 춥고. 근데 봄은 따사롭다고 해야 하나?”

진겸의 말에 수혁이 제 손을 내려다봤다. 손가락을 움직여 안에 있는 손을 지분거렸다.

“……봄.”

제 손이 제일 따뜻하다는 소리가 듣고 싶어서 되물은 거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 들려와 조금 당혹스러웠다.

봄 같다는 말은 처음 들어 봤다.

고작 한 단어인데.

‘두근거리네.’

심장이 평소보다 세차게 뛰었다. 이게 손을 잡고 있어서인지, 진겸과 마주하고 있어선지. 아니면 저 작은 입에서 나온 말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봄 같은 수혁이라는 거지?”

“…….”

“아까부터 표정이 되게 불순한 거 알아? 연기 학원 좀 다녀야겠다. 그렇게 투명해서 사회생활 하겠어?”

진겸의 얼굴은 눈은 찌푸려져 있고 입도 살짝 일그러져 있었다.

그런데 그 얼굴마저 귀여워 보였다. 지금도 저 볼을 옆으로 잔뜩 늘리고 싶었다.

이상하게 자꾸만 손이 간다.

“진겸아.”

“……네.”

“미리 허락 좀 구할게.”

“……?”

“얼굴 좀 만져도 돼?”

수혁은 진지했다. 전에는 허락 없이 만졌지만 지금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진겸의 입으로 괜찮다는 소리가 듣고 싶었다.

무슨 차이가 있겠냐마는 그러고 싶었다.

진겸도 갑자기 허락을 구하는 통에 눈을 느리게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수혁은 한 손으로 작은 손을 꽉 잡은 채 다른 손으로 진겸의 뺨을 문질렀다. 계속 에어컨 바람에 노출된 탓에 차가웠지만 여전히 부드러웠다.

하도 주변에서 진심이 아니면 접근하지 말라, 건드리지 말라 해서 자신이 정말 진심인지 아닌지 확인 중이다.

‘이제 진짜 욕심나네.’

수혁은 뺨을 문지르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시원하게 드러난 목에 닿자 진겸이 움찔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이사님?”

말간 눈동자를 본 수혁이 손을 뗐다. 여기서 더 움직였다간 천하의 나쁜 놈이 될 게 뻔했다.

아쉬움을 가득 담은 손끝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움츠러들었던 진겸의 몸이 다시 펴졌다.

“종일 있으려고 했는데 안 되겠다. 여기 있다간 큰일 치르겠어.”

“가시게요?”

수혁이 일어나자 진겸이 아쉬운지 놓으려는 손을 잡았다.

“어. 내가 날 못 믿겠어서 갈란다. 이따가 퇴근할 때 올게.”

“점심은요?”

“오늘은 셋이서 먹어. 탁 이사 옆에는 가지 말고 백 비서 옆에 딱 붙어 있어. 아, 그리고 오늘 저녁에 송별회 하자.”

살짝 걸쳐져 있던 손가락이 떨어지자 수혁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진겸은 아까 수혁이 만졌던 목덜미를 문질렀다.

* * *

“진짜 이걸로 되겠어? 한우 사 준다니까?”

“저 삼겹살 좋아해요.”

수혁은 진겸의 손에 들린 집게를 못마땅하게 보며 혀를 찼다.

송별회라고 해서 맛있는 거 사 주려고 했는데 진겸이 원한 건 삼겹살이었다.

“입원하면 못 먹고, 수술하고 나서도 한동안 못 먹을 텐데 이럴 때 먹어야죠!”

호기롭게 삼겹살을 먹고 싶다고 했으나, 지난번에도 먹어서 안 된다는 진우의 말에 목살도 함께 시켰다.

2주가 너무 금방 지나갔다. 이번 주말이 지나면 입원해야 한다. 하기 싫어도 관리를 해야 해 어쩔 수 없었다.

그저께 진우가 훈일과 통화할 때 입원을 꼭 2주나 해야 하냐고 물었다가 잔뜩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 달 입원시키려던 거 하도 답답해해서 2주로 줄여 준 거라고.

진겸은 오늘 많이 먹겠다는 비장한 얼굴로 삼겹살을 뒤집었다.

“왜 안 익지?”

“올린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아.”

진우가 궁금증을 해결해 줬다.

열기를 가득 머금은 프라이팬이나 솥뚜껑에 비계로 기름칠하고 굽는 영상을 많이 봤더니 이렇게 숯불로 굽는 게 답답했다.

“내가 구울게.”

“아니야. 내가 할 거야.”

진겸은 누구에게도 집게를 넘기지 않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처음 구워 보는 거라 언제 뒤집어야 하는지, 익은 게 맞는 건지 알 수는 없어도 그냥 그것만으로도 재밌었다.

“앗, 따가워!”

조마조마하게 바라보는 눈빛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고기 굽는 데 집중했다.

진겸은 잘 자른 고기를 유심히 살폈다.

“……탄 건가?”

거뭇한 것들이 좀 많았다.

“탄 거 먹지 말고 이거 먹어.”

어느새 새로운 집게로 고기를 뒤집던 진우가 탄 부분을 가위로 전부 잘라 냈다.

작아지는 고기의 크기에 진겸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분명 1센티미터 두께의 고기였건만 왜 저렇게 작아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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