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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73)화 (73/92)

73화

진겸이 일어난 건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후였다. 노을이 지고 있는지 창문으로 주황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깨 멍하게 있던 진겸은 밖에서 들리는 소리에 몸을 일으켰다.

진우가 누군가와 대화하는 듯한데 상대방이 간간이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서 비적비적 걸어 현관문을 열었다.

“어…… 이사님?”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진우의 등이었고 그 뒤로 수혁이 보였다. 항상 정장을 입은 모습만 보다가 반팔에 면바지를 입은 걸 보니 새로웠다.

인상을 쓰고 있던 수혁이 진겸을 보고는 고개를 돌렸다. 짧게 심호흡하고는 서둘러 표정을 바꿨다.

“지금 일어났나 보네.”

“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차 타고 왔지.”

“…….”

진겸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수혁이 픽 웃었다. 잠이 덜 깬 데다가 자면서 뻗친 머리가 귀여웠다.

“그냥. 종일 호텔에 혼자 있으니까 잡생각이 많이 나더라고. 머리도 식힐 겸 궁금해서 왔어.”

진우를 힐끗 본 수혁이 걸음을 떼려다가 제 허리춤에 걸린 팔에 멈춰야 했다.

“궁금증이 풀리셨으니 이제 가셔야죠.”

“…….”

“약속하셨잖아요.”

약속을 강조한 진우의 표정은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진겸을 등지고 있어서 굳이 표정 관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

잠시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뒤에서 들리는 기침 소리에 놀라 진겸을 봤다.

“에취!”

또다시 기침하자 진우가 서둘러 다가갔다. 걱정 가득한 얼굴에 진겸이 괜찮다며 손을 휘적거렸다.

“그냥 재채기야.”

“에어컨 바람을 계속 쐐서 그런가 봐. 위에 뭐라도 입자.”

“더워서 싫어.”

“팔도 차갑잖아.”

드러난 진겸의 양팔을 만지던 진우가 짧게 혀를 찼다. 집이 좁다 보니 에어컨을 켰을 때 금방 온도가 내려간다. 그래서 켜고 끄고를 반복하는 편인데 낮에 너무 더위를 먹은 것 같아서 평소보다 낮게 설정했더니 이 사달이 났다.

이마에 손을 올리니 제 손보다는 차가웠다.

“열은 없네.”

“괜찮대도.”

진겸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확실히 춥긴 했나 보다 밖으로 나오니 따뜻했다. 현관문을 열어 둔 상태로 얘기하고 있던 터라 뒤에서 찬바람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진겸이 슬리퍼를 신고는 밖으로 나와 문을 닫았다.

“이제 가시려고요?”

“어. 약속은 약속이니까. 지켜야지.”

수혁은 영문을 몰라 갸웃거리는 진겸을 부드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일 회사에서 보자.”

“저, 이사님!”

진겸이 가려던 수혁의 옷자락을 다급히 잡았다.

“일부러 말 안 한 거 아니에요.”

“…….”

“진짠데…….”

수혁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진겸을 본 게 아니었다. 자신을 잡은 새하얀 손이, 변명하는 모습이 어여뻐서 그랬다.

“진짜예요!”

“누가 안 믿겠대?”

“말을 안 하시니까…….”

“믿어. 너도 정신없을 텐데 괜한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

진겸의 정수리에 손을 얹고는 살살 문지른 수혁의 입가에는 깊고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충동적으로 움직인 것치고는 굉장히 흡족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됐다.

“갈게.”

“……네. 안녕히 가세요.”

진겸이 살짝 고개 숙여 인사했다.

차를 아래 두고 왔던 건지 시동 거는 소리가 가까웠다.

난간에 붙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익숙한 차가 있었다. 골목을 빠져나가는 걸 끝까지 지켜봤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우는 한 손에 얼굴을 묻고는 거칠게 문질렀다.

이 늦은 시각에 수혁이 찾아온 건 진겸의 상태에 대해 자세히 묻기 위해서였다.

훈일을 통해서 알 수 있었을 텐데도 이곳까지 온 건 직접 듣고 싶어서였다.

진우는 말해 주는 대신 조용히 돌아가는 걸 약속받았다. 잠든 진겸을 깨우고 싶지 않았다.

사실은 두 사람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더 컸다. 그랬는데 진겸이 깨어나 밖으로 나온 거였다.

진우는 제 마음대로 되는 일이 없는 것 같아 착잡했다. 그래도 당분간은 누구를 만날 생각 없다는 진겸의 말을 믿기로 했다.

난간에 몸을 기대고 있던 진겸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왜 오셨던 거야?”

“…….”

“……말하기 곤란해? 그럼 안 물어볼게.”

궁금하긴 해도 진우를 곤란하게 하면서까지 듣고 싶진 않았다.

“덥다. 들어가자.”

진우의 팔을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날 자기 전에 모기 잡는 데 꽤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아까 현관문을 잠깐 열어 두고 있었는데 그사이 모기 몇 마리가 집으로 침투한 거였다.

그게 아니어도 사방에서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오는 게 모기인데 들어오라는 식으로 대놓고 문을 열어 놨으니…….

“진우야, 미안해!”

“괜찮다니까. 어, 형! 거기!”

“잡았어! 여기 잡았어!”

* * *

점심시간마다 찾아오는 수혁과 점심을 거르거나 따로 먹었던 원범까지 합세해 항상 네 사람이 같이 먹었다.

양 비서는 한걸음 물러나서 구경, 아니 관찰했다.

진우는 한결같았다. 언제나 진겸을 중심으로 살고 있다. 그게 일하는 와중에도 보였다. 진겸이 복사라도 하러 가면 돌아올 때까지 자꾸만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일쑤였다.

탕비실에 가거나 화장실을 가도 마찬가지였다. 자기 일에 집중하다가도 진겸이 늦는 것 같으면 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참 중증 브라콤이야. 저렇게 하기 쉽지 않은데.’

그렇다고 다른 두 사람이 덜한 것도 아니었다.

진겸을 직접 비서 보조로 취직시킨 원범은 처음에는 방치하더니 이젠 종종 직접 일을 지시했다.

복사나 문서 파쇄 같은 일은 대부분 진우를 시켰는데 이젠 진겸을 호출했다.

더구나 한동안 바쁘게 움직이느라 빡빡했던 외근도 줄였다. 아니, 이번 주는 아예 나가질 않았다.

‘사람이 바뀌면 죽는다던데……. 탁 이사가 죽으면 돈 나올 곳이 없어서 안 되는데.’

원범만큼 많이 주는 사람을 찾기는 힘들다. 특히나 근무 외 수당이 짭짤해서 힘들어도 통장을 보면 평온을 찾곤 했다.

양 비서가 봤을 때 제일 의외였던 사람은 수혁이었다.

원래부터 탁 이사를 만나러 자주 오기는 했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물론 지금은 원범이 아닌 진겸을 만나러 오는 거겠지만.

게다가 하는 행동도 참 가관이었다.

‘저런 사람인 줄 몰랐지.’

출장을 최대한 빠르게 끝내고 돌아오는 것도, 다른 사람을 위해 낯간지러운 선물을 사 오는 것도 처음 봤다.

진겸에게 준 인형을 직접 고르고 구매해서 들고 왔을 수혁을 떠올리면 웃음이 나올 정도였다. 참 상상이 안 되는 그림이다.

‘아무튼…… 난리다, 난리.’

양 비서는 우르르 멀어지는 네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들이 뭘 하든 간에 자신에게 피해만 없으면 된다.

* * *

수혁은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얼굴도장을 찍었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가끔 진겸에게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출근했냐, 점심에 가겠다, 퇴근 언제 하냐 같은 일상적인 물음이었다.

수혁과 메시지를 주고받던 진겸이 요즘은 잠잠한 핸드폰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수신 차단한 번호로 가끔 연락이 오긴 해도 최근 통화 목록에 남을 뿐이라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연락하는 사람이라곤 진우와 수혁, 둘 뿐이다.

그나마도 진우는 이제 같이 출퇴근하고 있어 따로 연락할 필요가 없었다.

가끔 자리를 오래 비우면 하기는 해도 딱 거기까지였다.

‘슬슬 연락해야 할 것 같은데…….’

처음 핸드폰을 열었을 때 가득했던 랜덤 채팅 앱, 어장 속 물고기들과 나눴던 메시지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 나중에 날 잡고 정리하려고 했던 게 벌써 한 달이 넘었다.

‘아빠란 사람한테도 더 이상 연락은 없는 것 같고.’

전에는 유선전화로도 연락하더니 이젠 그런 것도 없다. 남겨진 메시지도 없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차단한 거였는데 요새는 조금 마음에 걸렸다. 빙의한 자신은 어떨지 몰라도 어쨌든 진우에겐 친아빠니까.

‘백진겸이 연락하는 거 알고 있었을까?’

진우가 준 돈 전부를 사치에 쓰지 않았다는 건 은행 앱을 통해 알았다. 백씨 성을 가진 누군가에게 입금한 내역이 꽤 많았다.

진겸은 업무에 집중하고 있는 진우를 힐끗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모니터에 고정되어 있었다.

‘……말 안 하는 게 낫겠지.’

아무리 아빠라지만 빚만 떠 안겨 주고 떠난 사람이다. 진우와 연락하려 했으면 진작에 했을 거다.

진겸은 큼,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선 이사님이 마지막 날인데 꼭 구내식당에서 먹어야 하냐고 묻는데?”

“형은 어디서 먹고 싶은데? 형이 먹고 싶은 곳으로 가자.”

“난 어디든 상관없어.”

“그럼 마지막이니까 구내식당으로 갈래? 밖에선 언제든 먹을 수 있잖아.”

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혁에게 오늘도 구내식당에서 먹는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이제는 익숙해진 회의록 정리를 도왔다.

아침부터 회의가 줄줄 잡혀 있었던 터라 양 비서는 종일 자리에 없었다.

“형, 나도 회의 갔다 올게.”

“응. 다녀와.”

진우까지 가자 주변이 썰렁했다. 딱히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 불안하진 않았다.

보조라고 해도 하는 건 별로 없었다. 할 줄 아는 게 없으니 당연한 거였다. 기껏 원범이 비서 보조로 취직시켜 줬는데 제대로 못 한 것 같아 아쉬웠다.

진겸은 제 목에 걸린 사원증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 너무 환하게 웃지 말라고 해서 옅은 미소만 지었었다.

“그래도 예쁘다.”

이름이 쓰인 곳을 손끝으로 매만졌다. 플라스틱의 딱딱함과 매끈함이 느껴졌다.

“……백진겸.”

제 이름인데 얼굴은 제 얼굴이 아니다. 원래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 기억도 안 난다. 이젠 이 얼굴이 익숙해졌다.

“네가 너무 예뻐서 계속 보고 있는 거야?”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진겸이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데스크에 기댄 수혁과 눈이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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