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다음 날, 양 비서는 숙취에 절어 의자에 늘어졌다.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지 퀭한 얼굴로 이제 막 출근한 진겸과 진우를 반겼다.
“……나 어제 얼마나 마셨어?”
“소주 3병하고 맥주 500cc 5잔이요.”
“아아…… 어쩐지.”
양 비서는 사무실 바닥에 누울 기세로 의자에 몸을 기댔다. 의자를 툭 건드리면 그대로 바닥에 쓰러질 것 같이 아슬아슬했다.
“숙취 해소제는 드셨어요?”
“……아니, 겨우 일어나서 늦을까 봐 택시 타고 왔어…….”
진우가 짧은 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가끔 맥주 한 잔 정도는 했었지만, 어제처럼 많이 마신 건 처음 봤다. 양 비서의 주량을 몰랐기에 그냥 둔 건데 말릴 걸 그랬나 보다.
“탕비실에 담요라도 깔아 드려요?”
“……그래 줄래?”
“진짜 깔아요?”
양 비서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힘든 모양이다.
가만히 서 있던 진겸이 시계를 봤다. 9시 되기 15분 전이다.
“제가 숙취 해소제 사 올게요.”
“어? 아니야. 진겸 씨 시켰다간 잔소리를 세 명한테 들어야 해서 안 돼.”
가지 말라며 휘적거리는 손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형은 여기 있어. 내가 갈게.”
“넌 이사님께 올릴 서류 준비해야지. 내가 갔다 올게.”
양 비서의 상태가 좋지 않으니 진우가 준비해야 할 서류가 늘어난 건 맞았다. 편의점이 먼 것도 아니고 바로 길 건너에 있으니 9시 전에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터였다.
만약 9시가 넘는다고 해도 이미 출근한 걸 다른 사람들이 봤으니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부탁해요. 진겸 씨.”
“네, 금방 다녀올게요!”
엘리베이터도 바로 오고 신호등도 타이밍 좋게 바뀌어서 빠르게 다녀올 수 있었다.
편의점 봉투를 손에 쥔 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아까보다는 적긴 해도 줄을 선 직원이 꽤 있었다.
지하에서 올라온 엘리베이터에는 원범이 타 있었다. 직원들이 서둘러 허리를 굽혔다.
진겸도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는 그가 올라가길 기다렸다. 아무리 바쁜 시간이라도 이사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직원은 없었다.
“타.”
원범이 턱짓하자 잠시 멈칫한 진겸이 황급히 엘리베이터에 탔다. 이제 이런 눈치는 생겼다.
“이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
짧게 대답한 원범의 시선이 진겸의 손에 닿았다. 정확히는 새하얀 손에 들린 편의점 봉투였다.
“그건 뭐야?”
“아, 이거요? 양 비서님 드리려고요. 숙취 해소제랑 초코우유요.”
“……초코우유는 왜?”
“인터넷 검색해 보니까 초코우유가 숙취 해소에 좋다고 하더라고요.”
진겸은 자신이 취해 본 적이 없어서 정말 효과가 있는 건지는 몰라도 인터넷에 나와 있길래 산 거였다. 비타민도 좋다고 해서 오렌지주스도 샀다.
편의점 봉투를 열어서 내용물을 보여 준 진겸은 엘리베이터가 멈추자 열림 버튼을 꾹 누르며 원범이 내리길 기다렸다.
“……안 내리세요?”
“내려.”
계속 봉투에 시선을 두던 원범이 내렸다. 진겸이 뒤를 졸졸 쫓았다.
“이사님, 오셨어요.”
“으어, 안녕하세요.”
“…….”
창백한 양 비서를 보고는 원범이 짧게 혀를 찼다.
“그러게 적당히 마셨어야지.”
“이사님이랑 같이 마신 게 너무 오랜만이었잖아요. 기분 좋아서 그랬어요.”
탁 이사의 비서로 일하고 나서는 한 번도 그와 어제 같은 술자리를 가져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넷이라는 나름 북적이는 인원에 기분이 좋아져서는 저도 모르게 부어라 마셔라 한 거다.
툴툴거리며 말하던 양 비서가 원범에게 가려 보이지 않았던 진겸을 발견하고는 팔을 뻗었다.
“아, 진겸 씨. 나 빨리…….”
“여기요!”
진겸이 편의점 봉투째 넘겼다. 안을 확인한 양 비서가 제일 먼저 꺼낸 건 환으로 된 것과 마시는 숙취 해소제였다. 서둘러 뜯으려 하다가 원범의 목소리에 행동을 멈춰야 했다.
“내 건?”
“……이사님은 어제 술 안 드셨잖아요.”
“누가 계속 먹어서 나까지 취했었나 봐. 그거 나도 필요할 것 같은데.”
“…….”
양 비서는 잠시 고민했다. 지금 제 손에 있는 걸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속도 울렁이고 머리도 아파. 이거 숙취 아니야?”
“이거 드십시오.”
결국 손에 쥔 환과 약병을 반강제적으로 내밀어야 했다.
“초코우유랑 오렌지주스도 먹고 싶네.”
“아! 이사님…….”
“왜? 주기 싫어?”
“……아니요. 다 드십시오.”
양 비서는 제 손에 들린 편의점 봉투를 고스란히 원범에게 넘겨야 했다.
모든 상황을 옆에서 보고 있던 진우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원범을 응시했다.
‘별짓을 다 하네.’
술을 아무리 많이 마셔도 숙취 따윈 없으면서, 그것도 어젠 한 잔도 안 마셔 놓고 숙취가 있단다. 수작도 참 다양하게 부린다 싶었다.
진짜 먹을 생각도 없으면서 진겸이 사 온 거라 탐이 나 저런다는 게 진우와 양 비서의 눈에는 보였다. 하지만 진겸은 그것도 모른 채 끼어들었다.
“제가 더 사 올게요!”
“아니. 이거면 돼.”
“그치만 그거…….”
진겸은 힐끗 양 비서를 봤다가 열심히 고개를 좌우로 흔들길래 서둘러 뒷말을 흐렸다.
“나한테 주기 싫어?”
“아니요! 당연히 이사님이 드셔야죠! 저는 괜찮습니다!”
양 비서가 양손을 다급히 흔들며 어서 가지고 들어가시라는 제스처까지 취했다.
원범은 제 손에 들린 것과 편의점 봉투까지 챙겼다.
“그렇게까지 말하니 가져가야겠네. 진겸 씨, 잘 먹을게.”
“……네.”
누가 봐도 강제로 뺏어 가는 거였지만 그 사실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원범이 이사실로 들어가자 양 비서가 다시 의자에 늘어졌다.
“으어…….”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제가 다시 갔다 올게요.”
“아니야, 아니야. 가지 마요. 진겸 씨! 난 커피 마시면 될 것 같아. 그럴 거야. ……그래야 해.”
양 비서는 스스로 최면을 걸듯이 말을 반복했다. 다시 사 온다고 해도 그것 또한 고스란히 원범의 손으로 넘어갈 게 뻔했다. 잠시 자기가 원범의 집념을 얕봤다며 중얼거렸다.
“나 커피 좀 마시고 올게. 백 비서, 아침 보고 좀 부탁해.”
“예. 천천히 오세요.”
“……어. 고마워.”
양 비서가 비틀거리며 탕비실로 향했다. 그 뒷모습이 너무 안쓰러워 보였다.
진겸이 작게 속삭였다.
“이사님 술 약해? 어제 아예 안 드셨잖아.”
“……안 마셔도 숙취가 오는 체질인가 봐.”
“그럴 수도 있어? 와…… 그거 되게 힘들겠다.”
“…….”
진우는 어디서부터 정정해 주어야 하나 짧은 고민을 하다가 그냥 두었다.
* * *
수혁은 2주가 걸릴 거라고 예상했던 해외 출장을 사흘로 줄였다.
여유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1분 1초가 귀했다.
그 덕에 같이 갔던 사람들도 덩달아 잠을 줄여 가며 일해야 했다. 그나마 그들에게 다행이었던 건 선 이사만 먼저 한국으로 왔다는 거다. 남은 시간 동안 천천히 정리하면서 조금은 쉴 수 있는 시간을 얻은 거였다.
‘퇴근 전엔 도착하겠네.’
시간을 확인하고는 서둘러 주차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공항을 나오는 수혁의 한 손엔 캐리어, 다른 한쪽 옆구리엔 인형이 끼어 있었다. 보자마자 진겸이 생각나서 고민도 하지 않고 산 거였다. 짐칸에 실어도 될 걸 굳이 비행기에서도 안고 왔다.
진겸의 피부처럼 새하얗고 보들보들한 털을 가진 북극여우 인형이었다. 한동안 인터넷을 뜨겁게 달군 북극여우는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그 인기에 힘입어 인형까지 제작된 모양이다.
수혁이 사 온 북극여우 인형은 모양이 특이했다. 물개처럼 통통한 몸에 세모난 뾰족한 귀도 있고 짧으면서도 귀여운 발도 있었다. 동그란 눈이 꼭 누구 같아서 귀여웠다.
정장을 입은 수혁이 들고 있으니 더욱 튀어 보였다.
차에 도착한 수혁은 캐리어는 트렁크에 싣고, 인형은 보조석에 놓고서 안전띠까지 매 줬다.
“볼수록 똑 닮았네.”
확실히 잘 산 거 같다.
책상에 올려놓은 진겸의 핸드폰이 진동과 함께 메시지 창을 띄웠다. 회의 자료를 정리하던 진겸은 알림을 무시한 채 일에 집중했다. 하지만 계속 울리는 통에 확인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수혁형
옥상 정원으로 와 | 오후 5:21 |
수혁형
빨리 |
수혁형
지금 | 오후 5:22 |
수혁형
바빠? | 오후 5:27 |
수혁형
...바쁘니? | 오후 5:3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