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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68)화 (68/92)

68화

“남이 건드리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저번에 선 이사가 알려 줬잖아.”

“……이사님은 남이 아니잖아요.”

“남이 아니면 뭔데?”

“음…… 직장 상사?”

원범의 입에서 실소가 새어 나갔다.

기껏 고민해서 내뱉은 단어가 직장 상사라니.

“선 이사는?”

“선 이사님은…… 형이니까. 지인, 아는 사람? 그 정도 되지 않을까요?”

“선 이사는 형이라서 아는 사람이고 나는 이사님이니까 직장 상사다?”

진겸의 말이 틀린 건 아닌데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자신과 선 이사가 동급에 놓여 있다고 생각했는데 격차가 있었던 모양이다.

원범은 일부러 손가락에 다시 힘을 줬다. 손끝에 두피가 닿는 게 느껴졌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한 손에 잡히는 머리를 괴롭히는 건 너무 쉬웠다.

“아, 아파요…….”

“나한테도 형이라고 해 봐.”

“이사님한테요? 에이, 그건 아니죠! 이사님은 이사님이잖아요.”

맞는 말인데 이번에도 묘하게 거슬렸다.

그렇게 따지면 수혁도 이사니까 이사님으로 불러야 하는 게 맞지 않나?

원범은 자기 쪽으로 진겸의 고개를 돌렸다. 정말 아팠던 모양인지 금세 촉촉해진 눈망울과 시선이 얽혔다.

주황색 조명이 비친 눈동자는 옅은 갈색이 아니라 진한 황금색으로 보였다.

‘황금을 녹여 낸 눈이라…….’

실내에 에어컨이 있어도 사람이 많아서 더운 모양인지 붉어진 복숭앗빛 볼이 눈에 확 들어왔다.

“…….”

머리에 있던 커다란 손이 진겸의 얼굴선을 따라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한 손에 다 감싸지는 작은 뺨을 쓰다듬고는 엄지로 느릿하게 입술을 문질렀다. 손끝에 닿는 모든 곳이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과실같이 붉은 입술이 너무도 탐스러웠다.

먹고 싶을 정도로.

이건 불가항력이었다. 자기가 제어할 수 없는 거였다. 원범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천천히 몸을 숙이자 서로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졌다. 상대방의 숨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원범이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내가 지금 뭘 할 줄 알고 그렇게 봐?”

“……뭐 하시는 건데요?”

상대방이 가까워지면 긴장이라도 해야 하지 않나?

긴장은커녕 너무 말간 눈으로 보니까 순진한 애한테 못 할 짓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하.”

이런 어린애를 데리고 내가 뭘 하겠다고.

원범은 허탈한 숨과 함께 제 이마를 진겸의 이마에 콩 박았다. 이 정도도 아픈 건지 진겸의 눈이 찌푸려지더니 입에서는 짧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이렇게 다가오는 새끼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밀쳐. 안 밀리면 뺨이라도 때려.”

“…….”

“대답.”

“……네.”

진겸은 영문도 모른 채 아린 이마를 만지지도 못하고 대답했다.

대화가 끊긴 테이블은 조용했다. 주변은 시끄러운데 이곳만 동떨어진 느낌이었다.

진겸은 아직도 통증이 느껴지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다가 제 눈에 담긴 원범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지금껏 봤던 손 중에서 제일 커 보였다.

순간 피어오른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이사님.”

“왜.”

“저 손 한 번만 대 봐도 돼요?”

“손?”

“네!”

원범은 잠시 뜸을 들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역시나 거절의 말이 선뜻 나오지 않는다.

“곤란하시면 거절하셔도 돼요.”

“곤란한 건 맞는데. 거절하긴 싫으니까 줄게.”

원범이 왼손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위를 향해 있었다.

진겸은 기대에 찬 얼굴로 손을 조심스레 그 위로 겹쳤다. 역시나 원범의 손이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더 컸다. 제 피부가 하얗고 창백한 편이다 보니 다르다는 게 확연히 티가 났다. 애초에 크기가 달랐으니 당연한 거였다.

“와…… 이사님은 뭐 먹고 그렇게 컸어요?”

“……뭐 먹었을 것 같은데?”

“멸치나 우유? 아니면 영양제 같은 거?”

“글쎄. 가리지 않고 먹었던 것 같긴 하네.”

“그렇구나.”

원범은 제 손에 맞닿은 손이 작다는 걸 새삼 느꼈다. 손가락 끝을 움찔거리다가 천천히 구부리자 손바닥 위에 있던 진겸의 손이 제 손에 잡혔다.

“이사님?”

“형.”

“……예?”

“이사님 말고 형이라고, 나도.”

진겸은 눈을 껌뻑거리며 원범을 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왜 다들 호칭에 이렇게 집착하는 건지는 몰라도 원하는 대로 불러 주는 게 어려운 것도 아닌지라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형.”

“…….”

“원범…… 형.”

“……어.”

그런데 부르고 나니까 괜스레 쑥스러워 손을 꼼지락거리자 꽉 잡는 힘이 느껴졌다.

“저…… 손 좀.”

“이대로 잡고 있으면 안 되나?”

“안 될 건 없는데…… 굳이…….”

“그럼 됐어.”

원범은 계속 들고 있던 손을 자기 허벅지에 올렸다. 절대 놓지 않겠다는 듯 약간 힘을 준 게 진겸에게도 느껴졌다.

잠시 원범을 힐끗거리던 진겸이 조심스레 손을 뒤집었다. 힘을 주고 있었던 것치고는 원범은 쉽사리 뒤집는 걸 허락했다.

“…….”

“뭘 그렇게 봐.”

“아, ……흉터가 많아서요.”

진겸의 눈동자 안에는 흉터가 가득한 손등이 담겼다. 아예 몸을 원범을 향해 틀어 앉더니 다른 손으로 그 흉터를 살포시 쓸어 봤다.

“아프진 않아요?”

원범은 잠시 말을 잃었다. 제 손을 본 사람들 대부분이 눈살을 찌푸리거나 겁을 먹는다. 아프냐고 묻는 이는 없었다.

더구나 이 손등에 흉터를 만든 사람도 이젠 세상에 없어서 한동안 잊고 살았다.

“……오래전에 생긴 거라 안 아파.”

“그땐 아팠겠다…….”

“…….”

맞다. 그땐 아팠다. 하지만 몸에 새겨진 상처를 자각할 새도 없이 주변의 일들에 휩쓸려 다니고 있던 터라 신경 쓸 겨를도 없었다. 게다가 이런 건 자질구레한 쪽에 속하기도 했고.

원범은 잊고 있었던 기억이 떠올라 순간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줬다.

“아!”

그러다가 진겸의 짧은 신음에 서둘러 힘을 뺐다.

“미안.”

“…….”

원범이 손을 펼치더니 진겸의 손에 이상이 생겼나 살폈다. 힘을 세게 준 건 아니지만 진겸이 워낙 약한 탓에 순간 걱정이 됐다.

제 허벅지에 작은 손을 펼쳐 놓고는 손가락 하나하나를 눌러 보기까지 했다. 일반인이라면 이런 힘으로 골절이나 부러질 리는 없겠지만 진겸이라면 그럴 가능성이 있을 듯했다.

“많이 아파?”

“……아, 아니에요. 조금 놀라서…….”

진겸이 서둘러 대답했다. 아주 잠깐이지만 제 손을 살피는 원범에게서 자신을 걱정하는 진우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설마…….’

지난번부터 원범의 행동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다. 진우에게 할 법한 행동을 자신에게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이랬다면 ‘나한테 관심이 있나?’ 싶었을 텐데 그게 원범이라서 그런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었다.

솔직히 지금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게 혼자 착각하는 것 같았다.

‘원래는 백진겸을 싫어했으니까…… 지금은 좀 마음을 연 건가?’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의 마음을 아주 조금 얻은 듯했다.

생각을 정리한 진겸이 헤실헤실 웃었다.

“왜 웃어?”

“그냥요. 이렇게 신경 써 주시니까 괜히 좋아서요.”

“……내가?”

계속 진겸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움직임이 멈췄다.

‘……널 신경 썼다고?’

원범은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며 진겸을 타박하려 했다. 그런데 해맑게 웃는 얼굴로 자신을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진겸을 보고 있자니 입술이 딱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그러다가 지금 자신이 했던 행동이 결코 정상적인 게 아니라는 생각에 온몸이 굳어 버렸다.

다른 사람이 아프든 말든 자신과는 상관없었다.

몇 개월 전 수혁이 독감에 걸려 골골거릴 때도 괜히 집에 있으면 옮을까 봐 병원으로 쫓아냈었다.

그건 수혁만이 아니었다. 그나마 오래 알고 지낸 양 비서와 이청오가 아프다고 해도 일에 지장 주지 말라는 말만 했지, 신경 쓴 적은 없었다. 애초에 걱정이 안 되니 당연했다.

‘……신경?’

진겸의 얼굴을 보던 눈동자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 와중에도 새하얀 손을 놓지 않은 제 손이 보였다.

‘놓고 싶지 않아. ……그래. 그러네.’

원범이 짧은 숨을 내쉬었다.

‘나는 백진겸을 신경 쓰고 있는 거였어.’

바뀐 모습에 관심이 간 건 맞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라고 생각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과 말을 하면서도 깊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이사, 아니 형? 왜 그러세요?”

“……듣기 좋네. 다시 불러 봐.”

“……원범이 형.”

쑥스러운 듯 웃는 얼굴에는 붉은 홍조가 들었다.

원범은 제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진 않았지만, 진겸에게 관심이 가고 신경이 그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는 걸 인정했다.

“어. 진겸아.”

항상 비웃듯 한쪽 입꼬리만 올리던 원범이 처음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진겸은 자신이 잘못 봤나 싶어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있는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미쳤다!’

날카로운 눈이 사르르 풀리는 걸 정면으로 보게 된 진겸의 얼굴이 점차 붉게 물들어 갔다. 복숭앗빛이 아니라 아예 홍옥이 되어 버렸다.

‘뭐 이리 잘생겼어!’

원래부터 잘생긴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웃는 걸 보니 인상이 날카로운 탓에 그의 외모가 반 이상 묻혔었다는 걸 확실히 인지했다. 이 또한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진겸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는 손을 동글게 말아 힘을 줬다. 원범의 허벅지 위에 놓인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진우야…… 너 어떡해?’

저 얼굴을 보고 누가 안 넘어갈 수 있을까?

진겸은 언젠간 원범에게 사로잡힐 진우를 걱정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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