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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66)화 (66/92)

66화

집에 온 진겸은 아까 있었던 일을 곰곰이 되짚어 봤다.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했을까?

‘그렇다고 캔을 던진 건 너무 경우 없었지…….’

당시엔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 그냥 집히는 걸 던진 거였다. 집에 돌아와 다시 생각하니 참 나쁜 행동이었다는 걸 깨닫고는 한참을 이불 속에서 버둥거렸다.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되돌릴 수 없으니 그냥 머릿속에 꼭꼭 담아 두었다.

걱정과는 달리 며칠이 지나도 평온했다.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송 대리와 박 대리는 같은 층이라 화장실을 가거나 복사하러 갈 때 스쳐 지나가긴 했다. 그들은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고 서둘러 시선을 돌리며 자리를 피하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신경을 쓰던 진겸도 점차 아무렇지도 않아졌다.

비서 보조로 일한 지 이제 사흘이 지났고, 내일 보자고 했던 수혁을 못 본 지 이틀이 지났다.

먼저 메시지를 보내려다가 그냥 인사치레였을 수도 있는데 괜히 혼자서 고민하는 걸까 싶어서 안 보냈다.

며칠이 지난 것도 아니고 고작 이틀 가지고 이러는 것도 웃긴 것 같았다.

골똘히 생각하던 진겸이 진우의 옆으로 슬쩍 붙었다.

“진우야. 선 이사님…….”

“…….”

“무슨 일 있으셔? 어제오늘…… 안 보이시네.”

진우는 모니터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제 팔에 얼굴을 붙이며 말하는 진겸의 정수리가 보였다.

“그게 왜 궁금해?”

“아니…… 뭐, 그렇게 막 궁금한 건 아니고 그냥 안 보여서…….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해서.”

우물쭈물 말하는 걸 보니 궁금한 모양이다. 진우는 제 어깨를 들썩였다. 진겸의 머리가 떨어졌다가 다시 붙었다.

“출장 갔어. 2주 정도 걸릴 거야.”

“2주나? 그럼 회사에서는 이제 못 보겠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진우는 보고 싶은 거냐고 물어보려다가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올까 봐 입을 다물었다.

귀를 기울이고 있던 양 비서가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보다 빨리 올 수도 있어요. 지금 엄청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히죽 웃은 양 비서가 슬쩍 눈을 올려 진우를 봤다. 쓸데없는 얘기는 왜 하느냐는 책망이 섞인 눈동자에 헤실헤실 웃음이 더 새어 나왔다.

“사실…….”

양 비서가 비밀 이야기를 하듯 목소리를 낮췄다. 덩달아 진겸도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일주일도 안 걸릴 수도 있어요. 지금 같이 간 직원들이 잠도 못 자고 있다고 엄청 불만이 많대요.”

“……왜요? 많이 바빠서요?”

“아니요. 선 이사가 2주짜리 출장을 일주일로 줄이자고 했대요.”

“……그게 돼요?”

그럴 리가 있겠냐는 듯이 웃던 양 비서가 몸을 다시 일으켰다. 진겸도 서서히 바르게 세웠다.

“될 리가요. 그러니까 직원들이 죽어나는 거죠. 원래 선 이사님이 해외 출장 가면 일 끝나고 남은 시간에 놀거든요. 그래서 같이 가는 직원들도 덩달아 관광하고 노니까 좋다고 따라간 건데, 이번엔 잘못 걸린 거죠.”

그 원인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눈을 껌뻑거리고 있는 진겸이라는 건 양 비서도, 진우도 아는 사실이었다.

진우는 짧은 콧바람을 내뱉었다.

“양 비서님 보고하러 안 가세요?”

“갈 거야. 지금 챙기잖아.”

“…….”

“너무하네. 내가 자기 일 돕겠다고 어? 그 고생을 하고 말이야. 선 이사도. 어? 나한테 일 떠넘기고 가서 내가 그 밤중에 일하고. 어?”

서운하다며 툴툴거리자 진우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나만 만만하지, 다들. 내가 아주 맥가이버야, 맥가이버! 다 해결해!”

“양 비서님 능력이 뛰어나니까 그렇죠!”

“……그래요. 진겸 씨라도 알아주니 내가 참 고마워요. 누구라도 알아줘야지. 내 노고를…….”

마지막 말은 진우를 흘겨보며 했다.

양 비서가 결재 올릴 서류철을 들고 이사실로 들어가자 진우가 눈을 감고 이마에 손을 올렸다.

‘아…… 삐졌다.’

일 년 동안 양 비서와 일을 하면서 그가 삐진 걸 몇 번 본 적이 있다. 그게 오래가지는 않지만 엄청 티를 내는 통에 모를 수가 없을뿐더러 상당히 귀찮아진다.

게다가 삐지면 평소엔 들을 수 없는 까랑까랑한 특유의 톤이 나온다.

가끔 들으면 몰라도 종일 옆에서 그러고 있으면 집에 가서도 양 비서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그냥 두었다가는 제 귀뿐만 아니라 진겸의 귀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다.

‘……끝나고 맥주 한잔하자고 해야겠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양 비서의 마음을 풀어 주는 건 맥주면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세 사람은 끝나고 호프집을 가기로 약속했다.

퇴근 시간이 다가왔고, 다들 가방을 챙겨서 나가려는데 한동안 야근하느라 늦게 퇴근하던 원범이 나왔다.

“지금 퇴근하세요?”

그때 양 비서의 눈이 반짝거렸다.

무더운 여름날의 술집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꽁꽁 얼린 잔에 살얼음이 가득한 맥주를 마시는 직장인들로 북적였다.

양 비서는 최대한 구석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미 자리가 다 차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중앙 쪽에 앉았다.

회사에서 가까운 곳이다 보니 탁 이사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자기들끼리 소곤거리는데 어떤 말이 오갈지 너무도 뻔했다.

“탁 이사님 아니야? 왜 여길 왔지?”

“아…… 다른 데 갈걸!”

“빨리 먹어. 2차 가게.”

소음 속에서도 힐끗거리며 속삭이는 말들이 들려왔다. 대부분 탁 이사에 관한 거였는데 정작 본인은 개의치 않아 하며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간의 간격이 넓지 않은데도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원범의 모습에 양 비서의 눈동자가 반들거렸다. 지금 상황이 너무 재밌었다.

진우는 황당해하면서도 진겸을 데리고 안쪽으로 들어왔다. 같이 앉으려는데 양 비서가 진우의 몸을 툭 밀었다.

“백 비서는 나랑 앉아야지.”

“예?”

“나 낯가리잖아.”

“그게 무슨…….”

양 비서는 진겸을 원범의 옆에 앉히고는 진우를 끌어 자기 옆에 앉혔다.

“……양 비서님.”

“응. 나 여기 있어. 진겸 씨, 뭐 먹을래요? 여기 골뱅이무침도 맛있고 치킨도 맛있어요. 이거, 이것도 맛있고.”

메뉴판을 펼친 양 비서는 진우의 타오를 듯한 시선을 무시한 채 진겸에게 물었다. 그러자 진우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세를 바르게 했다.

테이블 끝에 두 손을 올린 채 메뉴판을 보던 진겸이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이사님은 뭐 드시고 싶으세요?”

“진겸 씨 먹고 싶은 거 먹어.”

“……예?”

아,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고 했는데.

“먹고 싶은 거 시키라고.”

원범은 짜증 내지 않고 똑같은 어조로 말했다.

진겸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이며 다시 메뉴판으로 시선을 돌렸다.

원범이 자신을 ‘진겸 씨’라고 부른 건 처음이라 당황해 되물어 버렸다. 회사에서 직접적으로 원범과 일할 일이 없어서 그의 입에서 나온 호칭이 낯설었다.

괜히 가슴이 쿵쿵 뛰었다. 친해지지 못한 맹수와 가까워진 느낌이랄까.

“들었어? 진겸 씨래.”

양 비서가 진우의 팔에 자기 팔을 붙이고는 말했다. 보통 이렇게 말할 땐 조용히 말하는데 양 비서는 아니었다. 앞에 있는 두 사람에게 다 들릴 정도로 컸다.

진우도 들었다며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불만이 그득그득 묻어 있었다.

수혁이 급하게 해외 출장을 가고 원범도 바빠서 이사실에서 잘 나오질 않아 부딪힐 일이 없었다. 그런데 양 비서를 달래 주기 위해 당일 정한 약속 자리에 원범까지 끼게 될 줄은 몰랐다.

애초에 이런 자리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다. 시끄러운 것도, 사람 많은 것도 싫어하는데 같이 가잔다고 따라온 것 자체가 신기했다.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 이런 자리가 생기면 탁 이사에게도 가시겠냐고 매번 물어봤었다. 그는 항상 귀찮아하며 카드를 주고는 했다.

솔직히 오늘도 그럴 줄 알았다. 그런데 진짜 같이 올 줄이야.

‘빨리 먹고 가야지.’

그래 봐야 진우에게는 일적으로만 엮이고 싶은 사람일 뿐이다.

“골뱅이무침하고 프라이드치킨 시키죠. 이사님, 맥주 드실 겁니까?”

“아니.”

“그럼 맥주는 두 잔만 시키죠.”

빠르게 정리한 진우가 주문까지 마쳤다.

진겸은 오랜만에 먹는 치킨에 입에 침이 고일 지경이었다. 분명 머릿속에 치킨이 어떤 맛인지 떠오르긴 했는데 이 몸으론 먹어 본 적이 없어서인지 더 기대됐다.

음식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진겸은 제 앞접시에 놓인 새하얀 속살을 바라보기만 했다.

“…….”

“안 먹어?”

“……우리 프라이드치킨 시킨 거잖아.”

“응. 치킨이잖아.”

진겸의 물음에 뭐가 문제냐는 듯한 진우의 모습에 양 비서가 대놓고 혀를 찼다.

“이게 어떻게 치킨이야!”

“껍질만 없을 뿐이지. 치킨이잖아.”

“이……!”

자고로 프라이드치킨이란 영롱한 황금빛 튀김옷을 두르고 나온 닭을 의미한다. 하지만 앞접시에 놓인 치킨은 새하얀 속살만 남아 있는 벌거벗은 단백질 덩어리였다.

어차피 기름에 들어갔다 나온 거 튀김옷이랑 껍질을 같이 먹는다고 해서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거 같았다. 하지만 진우는 당연하다는 듯 프라이드치킨의 생명을 벗겨 냈다.

진겸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고는 포크를 쥔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제 몸을 생각해서 이렇게 준 건 알지만 그래도 이럴 때만큼은 진우가 야속했다.

그냥 먹어도 되는 거 아닌가? 매일 먹는 것도, 일주일에 한 번 먹는 것도 아니고, 빙의하고 처음인데!

진우도 부들거리는 포크를 봤으면서 여전히 튀김옷을 분리하고 있었다. 단 하나의 튀김 조각도 묻히지 않겠다는 듯 아주 섬세한 포크질이었다.

“먹기 싫으면 집에 가서 밥 먹을래?”

“……누가 안 먹는데?”

진겸은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채 하얀 살을 먹었다. 프라이드치킨이라도 숙성을 시킨 덕인지 짭조름한 간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맹탕이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얻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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