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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63)화 (63/92)

63화

결국 음료는 진겸이 결제했다. 제 명의로 된 체크카드를 쓰는 건 생각보다 즐거웠다. 이제는 지갑에 백진우 카드가 아닌 백진겸 카드가 들어 있다.

다들 배려한 건지는 몰라도 아메리카노로 통일했고 진겸은 꽤 고심해야 했다. 커피를 마시고 싶어도 카페인 때문에 안 된다.

메뉴판을 뚫어져라 보다가 디카페인을 발견하고는 진우의 허리 자락을 잡아당겼다.

“나 저거는 괜찮지 않을까?”

“뭐?”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디카페인이어도 카페인이 들어 있잖아.”

“그렇긴 한데 진짜 적어!”

진겸은 앞에 있는 걸 손끝으로 가리켰다. 카페인을 99.9% 제거했다는 팸플릿이었다.

“나도 먹어 보고 싶어. 직장인들 포션!”

“……대신 조금만 먹어.”

결국 허락을 얻어 낸 진겸은 신이 나 방긋 웃는 얼굴로 주문을 끝냈다. 드디어 손에 넣은 아이스 디카페인 아메리카노.

영롱한 빛깔의 커피를 보다가 서둘러 빨대를 물었다. 볼이 쏙 들어가자 투명 빨대를 따라 커피가 올라왔다. 입술 밖으로 빨대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붉은 혀도 같이 나왔다.

“웩.”

“아하하!”

고개를 푹 숙인 채 작은 입을 벌리고 혀를 내미는 진겸의 모습에 수혁의 웃음보가 터졌다. 그는 진겸이 사 준 커피를 놓칠세라 두 손으로 잡고는 어깨를 들썩이며 끅끅거렸다.

원범도 실소를 머금긴 했으나 수혁처럼 크게 웃은 건 아니었다.

“맛없지? 다른 거 사 올게. 에이드 마실래?”

“……아니야. 이거 먹을 거야.”

“맛없을 텐데…….”

진우는 구부러진 진겸의 등을 손으로 조심스레 쓸었다. 커피를 마셔 본 적이 없을 테니 입에 안 맞을 수도 있는 거였다.

진겸은 알약을 먹을 때도 입에 쓴맛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이내 사탕을 찾곤 했다.

“먹을 수 있어. 나도 이제 직장인이잖아!”

엄밀하게 따지면 2주 아르바이트생이라 직장인은 아니었다.

도대체 진겸의 머릿속에 직장인이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심겨 있길래 이러는 건지. 진우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진우가 생각하는 직장인이란 항상 어깨가 아래로 처지고 등에 곰 여러 마리를 얹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직장 동료, 상사, 야근에 치이는 불쌍한 월급쟁이들 말이다.

자기 일에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지금까지 진우가 본 사람 중에선 없었다.

아, 딱 한 명 있다.

탁원범.

그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 확신이 있어 보였다. 문제 해결에 있어 거침이 없으며 가치가 있다 싶으면 아낌없이 투자한다.

회사에 대한 애정도도 꽤 높다. 그걸 아랫사람들이 알아서인지 탁원범과 직접적으로 부딪친 이들은 그에게 전염이라도 된 듯 회사를 향한 충성도가 높았다.

양 비서만 해도 그렇다.

매일 ‘타도 탁 이사’를 외치고 사직서를 가슴에 품고 다니기는 하지만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을 가진 게 눈에 보였다.

처음에 원범을 만나 비서로 취직했을 때, 진우는 쉽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양 비서를 보면서 점차 마음가짐과 태도를 바꿨다.

진겸이 품은 직장인에 대한 환상을 조금이라도 깨트려야 나중에 실망을 덜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던 진우는 계속 커피를 마시고는 얼굴을 구기는 진겸을 바라보기만 했다.

“시럽이라도 넣을래? 그러면 좀 나아질 거야.”

“아니야. 이대로 마실 거야.”

진겸은 고집을 부렸다. 빨대에 입을 붙이길 수십 번. 줄어드는 양은 육안으로는 확인이 어려울 정도로 아주 미미했다.

그 모습에 수혁이 계속 웃자 진겸이 눈을 흘겼다.

“노려볼 줄도 알아? 그만큼 내가 편해졌다는 건가.”

“……노려본 거 아니에요. 그냥 쳐다본 거지.”

“이젠 거짓말까지 하네. 방금 노려본 거 다 봤는데? 눈동자가 여기로 왔는데.”

수혁의 손끝이 진겸의 눈꼬리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꾹 눌리는 느낌에 자연스럽게 눈을 찌푸리며 감았다.

진겸이 눈을 감는 순간, 말도 안 되게 수혁의 눈에 그 모습이 슬로우 모션처럼 재생됐다.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이며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모습까지.

그 순간만큼은 세상이 느리게 흘러갔다.

수혁은 낮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건 좀.’

위험했다. 보통 위험한 게 아니었다.

진겸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위험 경고 센서가 울리고 있었다. 무시했다간 추후 벌어질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하는 건 자신이다.

수혁이 한 손으로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리고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여러모로 위험하네. 누굴 홀리려고 이러지?’

진겸은 수혁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열심히 커피 마시기에 도전하고 있었다. 옆에 있는 진우 또한 응원하면서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지 못했다.

어떻게든 먹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보이는 진겸의 행동이 너무 귀여워서였다.

진겸과 나란히 걷던 수혁이 천천히 걸음을 늦추더니 원범의 옆으로 다가갔다.

“입에 꿀이라도 발라 놨어? 오늘따라 더 말이 없네.”

“네가 시끄러운 거야.”

“그러면 네가 말을 하든가. 너나 백 비서나 말주변이 없어서 입 꾹 다물고 있으니 나라도 떠들어야지. 백진겸 혼자 심심하잖아.”

“…….”

혼자 심심하다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수혁이 있어서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건 원범 본인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자신이야 원래 말이 없는 편이고, 진우도 필요한 말 외에는 입을 잘 열지 않는다. 그나마 진겸 앞에서는 말을 하긴 해도 대부분이 걱정 어린 말이었다.

원범은 의외라는 듯 수혁을 봤다.

“네가 웬일로 남을 신경 써?”

“너보다는 신경 썼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한 수혁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원범아.”

원범의 발걸음이 순간 멈칫거렸다. 전에는 이름을 자주 불렀지만, 같은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후부터는 탁 이사라고 불렀다. 간혹 이름을 부르긴 했어도 필요에 의한 거였다.

원범이 자리에 멈춰 서자 한 걸음 앞으로 간 수혁이 슬쩍 몸을 틀었다.

“나 요즘 너무 재밌다?”

“…….”

“백진겸이 너무 재밌어.”

무어라 대답을 해야 하는 걸까. 자신도 그러하다고. 그렇게 답하면 되나?

대답이 없는 원범을 향한 수혁의 눈빛은 어쩐지 매섭기까지 했다. 원범이 동요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그 탁원범이. 자신이 백진우에게 관심을 표할 때도 인상 찌푸리고 말았던 놈이 눈동자까지 돌리고 있다.

‘백진겸 진짜 여우 아니야? 이게 사람을 몇이나 홀린 거야?’

수혁이 실소를 머금었다. 도대체 몇 사람이나 더 홀려야 그만둘는지.

“난 너랑 부딪치기 싫어. 내가 피지컬로 밀리잖아.”

“…….”

“요새 운동을 좀 쉬었더니 더 엄두가 안 나.”

일부러 콧잔등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난스레 말하는 듯 보여도 원범은 그가 진심이라는 걸 알아챘다. 나름의 경고를 한 거였다.

백진겸에게 관심을 보이지 말라고.

이번엔 원범이 실소를 머금었다.

“글쎄. 나도 요즘 백진겸이 재밌어서 말이야.”

“기어코 같이 재미를 보시겠다?”

“그거야 해석하기 나름이겠지.”

원범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겸과 진우를 향해 나아갔다. 수혁은 제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위험한 향기에 눈을 감았다가 떴다.

순간 찾아온 어둠과 눈을 떴을 때 보인 진겸의 해맑은 웃음이 너무도 대조됐다.

수혁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대로 있다간 장난이 아니라 진짜 위험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사람이 아닌 수혁, 본인이.

* * *

진겸은 첫날부터 야근이라는 회사원의 강적과 맞닥뜨렸다. 그래 봐야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복사해 오거나 문서 파쇄 정도가 다였다. 청소라도 할까 싶었지만 청소하시는 분이 따로 계셔서 그럴 필요도 없었다.

간간이 진우가 일을 주려고 하긴 했다. 하지만 자기 일로도 정신이 없는 데다가 진겸이 할 만한 게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먼저 퇴근을 시킬 수도 없었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던 진겸은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주변을 조금 돌아보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은 사람이 퇴근했지만 아직도 불이 켜져 있는 사무실이 군데군데 있었다.

‘와…… 넓다.’

파티션으로 자리가 나누어져 있을 뿐 한 공간이었다. 괜히 방해될까 봐 입구에서 기웃거리다가 몸을 돌렸다.

종일 에어컨 바람을 맞았더니 조금 쌀쌀하기도 하고 답답하기도 해서 야외 공기를 마시러 옥상 정원으로 향했다.

직원들이 쉴 수 있는 옥상 정원은 꽤 잘 꾸며져 있었다. 이제 막 7시가 넘은 시간이라 아직도 해가 지지 않았다.

‘이것도 다 관리하는 사람들이 있겠지? 와, 꽃도 있어.’

진겸은 옥상 정원 곳곳을 돌아다니며 구경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다가 벤치에 앉아서 쉬려고 하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입구로 세 명이 우르르 들어왔다.

야근하는 사람들이었는지 그들의 손에는 작은 종이컵이 들려 있었다. 야근의 필수품 커피 믹스였다.

세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있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진겸이 앉아 있는 곳은 덩굴로 뒤덮인 아치형 펜스의 안이었다. 게다가 그들을 등지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있어?”

“아니, 아무도 없어.”

진겸을 발견하지 못한 세 사람은 난간 쪽에 붙어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에 시답잖은 말을 주고받다가 이내 상사 욕으로 넘어갔다.

귀에 속속 박히는 말에 진겸은 여기서 언제 나가야 하나 고민했다.

‘아까 나갈걸…….’

지금 자신이 나가면 그들이 민망해할 것 같아 조금만 더 기다릴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

“후…… 너네도 봤지? 베이지.”

진겸은 제 이야기라는 걸 알아채고는 귀를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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