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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60)화 (60/92)

60화

“내일부턴 단정하게 하고 와.”

진겸의 눌린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헤집으며 말했다.

직원들이 어떻게 하고 다니든 전혀 신경 쓰지 않던 원범의 돌발 행동에 양 비서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자신이 머리를 감지 않고 회사에 와도 더럽다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기만 했다. 이틀 연속으로 같은 옷을 입어도, 셔츠에 음식물이 묻어도 원범은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았다.

진겸에게 관심이 있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지만 계속 원범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건 색다른 기분이었다.

원범의 행동을 본 진우 또한 표정이 굳었다.

‘확실히 스킨십이 잦아졌어.’

병실에서도 그러더니 오늘도 어김없이 쓰다듬었다. 물론 진겸의 머리통이 동글동글하고 귀여워서 쓰다듬고 싶게 생기긴 했다. 하지만 원범은 그런 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진우가 원범의 행동을 되뇌는 동안 진겸은 제 눌린 머리를 다시 쓸어내리기만 했다.

원범이 진겸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안 수혁이 알려 준 ‘싫어요’, ‘만지지 마세요’는 입 밖으로 나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원범은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다시 일깨워 주어야 하는 건지 고민하며 작은 머리통을 바라보다가 이사실로 들어갔다.

양 비서가 진우의 옆으로 찰싹 달라붙었다.

“뭐야? 오늘 무슨 날이야? 왜 저래, 무섭게.”

“…….”

“오늘 탁 이사 피해. 무조건 피해. 저렇게 이상한 행동할 때는 무조건 피하는 게 상책이야. 아, 맞다. 오늘 회의 있지?”

“예, 오전에 하나요.”

“……에잇, 기분이다. 오늘은 내가 따라갈게. 진겸 씨 첫 출근인데 동생이 같이 있어 줘야지.”

양 비서는 몸을 부르르 떨더니 이내 자리에 앉았다.

“감사해요. 이따 커피 살게요.”

“아아로 부탁해. 시럽 두 번.”

“예.”

무슨 상황인지 몰라 가만히 서서 눈치를 보던 진겸은 양 비서가 앉으라고 손짓하자 천천히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그 후 진우와 양 비서는 분주히 움직였다. 손이 쉬지를 않았다. 탁 이사가 출근했으니 오늘 하루 일정을 체크해 전달해야 했다. 게다가 오늘 아침 새롭게 올라온 결재 서류가 많아서 정리도 해야 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우가 검은 서류철 몇 개를 들었다.

“형, 나 아침 보고 좀 하고 올게. 갔다 와서 할 거 알려 줄게.”

“응.”

진겸은 바빠 보이는 두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슬쩍 옆으로 물러나 있었다. 진우가 보고하러 이사실로 들어가자 양 비서의 키보드와 마우스 클릭 소리가 유난히 더 크게 들렸다.

첫 출근이라 뭘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앉아 있자 양 비서가 말을 걸었다.

“진겸 씨, 복사할 줄 알아요?”

“해 본 적은 없는데 너튜브로 보긴 했어요.”

“……너튜브.”

모든 것을 너튜브로 배우고 있는 진겸은 이번에도 회사 생활에 대한 영상들을 찾아봤었다.

내선을 연결하는 방법이라든지 복사기 사용법 같은 간단한 업무 위주의 동영상이었다.

양 비서는 뭔가 찜찜하기는 했지만 너튜브를 봐서 알고 있다고 본인이 말하기도 했고, 지금 멀뚱멀뚱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심심해 보여 맡겨 보기로 했다.

고작 단기 아르바이트생에게 임시 사원증을 만들어 준다고 했을 때만 해도 기어코 회사로까지 끌어들이는구나 싶었다.

처음 진우가 왔을 때도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였다. 항상 몸으로 하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그랬는지 사무 쪽은 영 젬병이었다. 게다가 첫날부터 복사기를 고장 내는 일도 있었다.

그나마 일머리가 있어서 전화 하나는 처음부터 똑 부러지게 받았다. 내선 연결은 할 줄 몰라도 받아 적는 건 전부 메모로 남겨놔 나중에 확인만 하면 돼서 문제 될 건 없었다.

‘설마…….’

아무리 그래도 백진겸이 형인데 그때만큼은 아니겠지?

복사기는 복도를 지나 영업팀 쪽에 있다. 멀지는 않다. 그냥 코너 하나만 꺾으면 된다.

파일을 품에 안고 커다란 복사기 앞에 선 진겸의 얼굴엔 비장함이 맴돌았다.

‘첫 업무! 잘해야지.’

이게 바로 진겸의 공식적인 첫 업무였다.

너튜브에서 본 것과는 다른 기계였지만 대부분 사용법은 같다고 해서 머릿속으로 영상을 재생했다.

‘회의 때 사용할 거라서 20부 필요하다고 하셨지.’

그렇다는 건 한 장당 20매가 필요하다는 거다. 복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였다면 한 장 한 장 복사했겠지만, 진겸은 한동안 ‘눈치코치 직장생활’ 채널에 올라온 영상을 본 사람이었다.

‘여긴가?’

복사기를 이리저리 살피던 진겸은 맨 위에 튀어나온 곳을 유심히 봤다. 그러고는 그 위에 복사해야 할 회의 자료를 올렸다.

‘버튼이…….’

보통은 커다랗거나 색이 다른 것이 시작 버튼이라고 했다. 역시나 이 복사기에도 동그랗고 큰 버튼이 있었다.

진겸은 됐다 싶어서 버튼을 꾹 눌렀다.

처음부터 위치를 잘 찾은 건지 올려놓은 회의 자료가 복사기 안으로 쓱쓱 들어갔다가 나왔다.

그런데 뿌듯한 마음으로 나오기만을 기다렸던 복사된 용지는 따끈하고 새하얗기만 했다.

“……이게 아닌가? 맞는데.”

영상에서 봤던 거랑 똑같이 했는데 용지가 복사되질 않았다. 당황해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복사기를 살폈다.

다시 버튼을 눌러 보았지만 역시나 변한 건 없었다.

팔짱을 낀 채 심각하게 복사기를 노려보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 만날 때 입으라니까. 오늘 나 만나는 날이야?”

수혁이었다.

“아, 아저씨.”

“아저씨 말고 형이라고…….”

다른 직원들이 이쪽으로 귀를 기울이는 것 같아 수혁이 작게 속삭였다.

“회사에선 이사님이라 불러. 대신 나가면 형으로 불러 주기다?”

“……네, 이사님.”

“착하네. 근데 여기서 뭐 해?”

“복사하고 있었어요.”

복사기 앞에 있으니 당연히 복사하는 중이겠지만, 수혁은 저 작은 입으로 조잘거리는 게 듣고 싶어서 물은 거였다.

사실 아까 진겸이 출근하는 걸 봤다. 지하 주차장에서 올라온 터라 맞은편 엘리베이터 안에서 1층에 문이 열렸을 때 발견한 거였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신의 사무실로 가서 아침 보고를 받자마자 이쪽으로 왔다.

회사에서 누구도 입지 않는 베이지색 정장 차림이라 멀리서도 티가 났다.

진겸이 복사기와 실랑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다른 직원이 다가가려고 하길래 서둘러 움직였다.

“백 비서는 어쩌고 혼자 있어?”

“아침 보고하러 들어갔어요. 이사님, 이 복사기 사용할 줄 아세요?”

“……아마?”

확답은 아니었다.

수혁은 제 방에 있는 프린트기로 인쇄는 해 봤지만 복사는 항상 비서를 시켰기에 사실은 방법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자신을 올려다보는 촉촉한 눈망울에 대고 차마 모른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진겸의 옆에 서서 복사기를 내려다보던 수혁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더라?’

지나가면서 직원들이 하는 건 봤지만 직접 해 본 적은 없었다.

“이사님?”

수혁이 가만히 보고만 있자 진겸이 재차 그를 불렀다.

“……있어 봐. 생각 중이야.”

수혁은 나름 진지했다. 팔짱을 낀 채 복사기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는 사방으로 열심히 움직였다.

버튼이 있는 곳과 방향 그리고 진겸이 복사해서 나온 깨끗한 종이까지.

고민하던 수혁은 진겸이 복사하기 위해 놓은 용지를 뒤집었다. 그리고 버튼을 눌렀다.

“와……!”

복사가 제대로 됐다. 아까와는 다르게 새하얀 종이가 아니라 검은 글씨와 그래프들이 섞인 종이였다.

“역시 이사님이네요!”

“모르는 거 있으면 혼자 끙끙 앓지 말고 다른 사람들한테 물어봐.”

“그래도 될까요? 괜히 방해될까 봐…….”

눈치를 보며 말하자 수혁이 슬쩍 웃었다.

“만약에 말이야. 네가 물어봤는데 짜증 내는 직원이 있다? 그럼 얼굴이랑 이름 외워 뒀다가 나한테 말해.”

“말하면요?”

“그건 말하면 그때 어떻게 할지 알려 줄게.”

분명 웃고 있는데 수혁의 눈빛에는 순간 서늘함이 맴돌았다. 찰나의 순간이었기에 진겸은 눈치채지 못했다.

복사기를 확인한 진겸은 한 부밖에 없는 걸 보고는 복사할 용지를 다시 위에 올리고 버튼을 눌렀다.

분명 한 번에 여러 매수를 복사하는 법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것까지는 기억이 안 나서 그냥 계속 버튼을 눌렀다.

20부를 만들어야 해 속으로 숫자를 세면서 버튼을 누르는 동안 수혁은 떠나질 않았다. 중간에 말을 걸어 까먹으면 어쩌나 노심초사했는데 다행히 묵묵히 보고만 있었다.

두 사람이 딱 붙어 복사기를 사용할 동안 뒤에 있던 직원들은 가서 도와주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서로 시선을 교환하기 바빴다.

선 이사가 이곳을 지나는 일은 잦았다. 탁 이사를 만나러 자주 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렇게 복사기 앞에서 진을 치고 있는 일은 한 번도 없었다. 더구나 옆에 있는 진겸은 직원들 눈엔 너무나 낯설었다.

직원 한 명이 옆자리에 있는 동료에게 속삭였다.

“아까 백 비서님이랑 같이 있던 사람 맞지?”

“어. 그런 것 같은데? 옷이 똑같아.”

“거래처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닌가 봐.”

그랬다면 직접 복사할 리 없으니 말이다.

“이사실로 가던데 손님인가?”

“손님이 복사를 왜 해?”

“그렇지?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긴 해. 근데…… 되게 예쁘게 생겼다. 선 이사님이 옆에 있어서 그런지 몰라도 되게 작아 보여.”

“나 아까 얼굴 정면으로 봤거든? 와…… 대박. 진짜 예뻐.”

소곤소곤 속삭이는 직원들 주변으로 다른 직원들이 모여들었다.

수혁이 슬쩍 뒤를 돌아보자 모여 있던 직원들이 빠르게 해산했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쪽을 보며 수군거린다는 건 눈치챘다.

복사를 다 끝낸 진겸이 종이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탁탁 쳐서 잘 정리했다. 그러곤 품에 안고 수혁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면 이따 점심이나 같이 먹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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