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지금 일을 하고 싶다고 어필하는 게 아니었다. 진우와 같은 공간에서 일할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였다.
그 말에 진우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손에 힘이 들어갔다가 화들짝 놀라 손을 떼어 냈다. 한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순간 혹했다.
계속 옆에 있기만 한다면 병원보다 회사가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회사가 노는 곳도 아니고 아무리 보조라지만 일을 해야 한다.
더구나 탁 이사는 하는 일이 많아서 하루하루가 바쁘다. 회의도 가야 하고 야근도 잦다. 이것저것 재고 따지면 차라리 병원에 있는 게 컨디션 회복에는 더 좋다.
“같이 있으면 내가 아플 때 바로 알 수 있잖아. 회사에서 병원도 멀지 않고…… 일주일에 한 번씩 검사받으러 오면 되지 않을까?”
“어차피 오래 일 못 하잖아. 그래도 하고 싶어?”
“응. 비서 보조면 힘든 거 아니잖아. ……아닌가?”
눈을 크게 굴리며 사무직이 뭘 하는 거더라. 떠올린 진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누워서 웃던 수혁이 몸을 일으켜 한마디 거들었다.
“안 힘들어. 그냥 복사랑 문서 정리만 잘하면 돼. 보조니까 크게 어렵진 않을 거야.”
“아…….”
“탁 이사는 비서도 둘인데 보조까지 필요해? 나는 할 일 별로 없는데. 내 비서로 오는 게 어때? 비서 보조보다는 비서가 낫지 않아?”
이때다 싶어 수혁이 은근슬쩍 숟가락 얹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이내 진우의 방어 앞에 튕겨 나갔다.
“아니요.”
“매정하네. 탁 이사랑 일하는 것보단 나랑 하는 게 편할 텐데.”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인 수혁이 여전히 웃음기를 입매에 머금고는 원범의 손이 닿았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진겸은 머리가 흔들거리는데도 쓰다듬을 거부하지 않았다.
“진겸아.”
항상 ‘진겸 씨’ 또는 ‘백진겸’이라 부르던 수혁이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자 진겸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수혁은 눈을 곱게 휘더니 입으로는 그렇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기억을 잃으면서 ‘경계’라는 단어도 같이 잊었어?”
“예?”
“다른 사람이 만지면 ‘싫어요’라거나 ‘만지지 마세요’라고 해야지. 이렇게 가만히 있을 게 아니라.”
그러면서도 쓰다듬는 걸 멈추지 않았다.
“지금도 그래. 탁 이사가 만져도 가만히 있고. 내가 이러고 있어도 가만히 있고. 백 비서는 다리에 손까지 얹었는데도 가만히 있고.”
“아니…… 그건.”
“아무리 아는 사람이어도 경각심 좀 가져야 해, 넌.”
“……싫어요. 만지지 마세요.”
입술을 씰룩인 진겸이 고개를 휙 돌리며 수혁의 손을 피했다.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수혁의 입꼬리가 더 올라갔다.
“그래. 잘하네. 근데 나한텐 하지 마. 상처받는다?”
하라고 할 땐 언제고 또 자기한테는 하지 말란다. 참 이상한 심보를 가진 게 틀림없다.
지난번 복숭아 알레르기 사건 때도 멋대로 사진을 찍질 않나. 고맙다고 하라고 해서 고맙다고 했더니 말하지 말라고 하질 않나.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원래부터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으면서 더 확신이 섰다.
“두 분 다 우리 형 좀 만지지 마세요.”
진우는 아까 원범이 만졌을 때도 가만히 있었고, 이번에도 그랬다. 제재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었는데, 진겸이 딱히 거부하지 않길래 참은 거였다.
무엇보다 짜증은 나지만 수혁이 하는 말 중 틀린 말은 없었다.
“이사님, 진짜 형 일하게 해 주실 거예요? 지금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게 안 되면 지금 말씀해 주세요.”
괜히 기대하게 했다가 자르지 말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게다가 바로 출근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금 더 경과를 지켜보고 퇴원을 결정해야 했다.
담당의인 훈일은 수술 때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길 원했다. 그건 진우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이 오기 전에 겨우 설득했는데 원범의 한마디에 수포로 돌아가게 생겼다.
방금 한 말은 어쩌면 건방지다고 받아들여질지도 모르는 행동이었다. 기껏 일자리를 주겠다고 한 상사에게 일 안 하고 앉아만 있다가 갈 수도 있다고 하는 거였으니까.
다리를 꼬려던 원범은 진겸의 다리와 닿자 멈칫거리다가 다시 내렸다.
어딘가에 앉으면 습관적으로 다리를 꼰다. 그런데 지금 그랬다간 진겸이 자신과 수혁 사이에 짓눌리게 될까 봐 멈춘 거였다.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원범 혼자만의 배려였다.
“바라지도 않았어. 사고만 치지 마.”
“……감사합니다.”
진우의 대답에 진겸의 입술이 씰룩이더니 곧이어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숨길 수 없는 기쁨으로 인해 튀어나온 광대와 곱게 접힌 눈을 보니 진우도 덩달아 웃음 새어 나왔다.
일하는 게 그렇게 좋을까. 다른 사람들은 쉴 수 있으면 쉬려고 할 텐데. 제 진겸은 왜 자꾸 일하려고 하는 건지 도통 이해가 되질 않았다.
빚을 갚고 살림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알지만 몸이 아프니 쉬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그래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덩달아 제 기분도 좋아졌다.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같은 공간이니 이번에도 진우는 진겸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형, 수완 좋다. 바로 취직했네.”
“……흐흐.”
최대한 웃음을 참으려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서둘러 손으로 입을 막았지만 입술 사이로 새 버린 웃음까지 막을 순 없었다.
진우가 손을 뻗었다. 머리가 앞뒤로 흔들린 탓에 흘러내린 진겸의 앞머리를 부드럽게 뒤로 넘겨주었다.
“무리하지 않겠다고 약속부터 해.”
진겸이 고개를 위아래로 열심히 끄덕였다.
“아프면 바로 말하고.”
이번에도 대답 대신 고개를 움직였다.
“워치 항상 차고. 핸드폰 손에 꼭 쥐고 있어.”
“알겠어.”
“……그래. 형이 좋아하니까 나도 좋다.”
마음 같아서는 병원에 있으라고 하고 싶지만 이렇게 좋아하는데 못 하게 하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당연히 몸 상태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것도 컨디션 회복에 중요하기 때문이다.
진겸이 티를 낸 적은 없지만 기억이 없어 불안할 때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게 스트레스로 작용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진겸이 양 손가락 끝을 맞대더니 천천히 문질렀다. 눈을 빠르게 깜빡이면서 슬쩍 원범을 힐끔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는 행동에 진우가 말하라는 듯 빤히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도 사원증…… 생겨요?”
“갖고 싶어?”
아까보다 더 격하게 고개를 끄덕여 결 좋은 머리카락이 덩달아 찰랑거렸다. 진우가 정리해 준 앞머리가 금세 흐트러졌다.
원범은 저러다가 머리만 뚝 떨어져서 굴러다니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만 움직이라며 턱을 잡자 숨을 다급히 들이켰다.
“그게 왜 갖고 싶은데?”
“정장 입고 사원증 거는 게 꿈이에요!”
“……꿈?”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보통 꿈을 얘기할 때 구체적인 직업을 얘기하지 않나? 이런 걸 꿈이라고 할 수 있나?
꿈이란 자고로 크게 가져야 한다는 말을 지겹도록 듣고 자랐기에 진겸이 말한 꿈은 귀엽다 못해 소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진겸의 눈은 아까 비서 보조로 일하란 소리를 들었을 때처럼 반짝거렸다. 눈망울이 너무 촉촉해서 눈물을 매달고 있다는 착각이 일 정도였다.
“일단 아침에 알람 소리에 깨서 정장을 입고 사람이 꽉 찬 지옥 버스랑 지옥철에 타는 거죠!”
흥분이 섞인 목소리에 세 남자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내용은 끔찍한데 목소리는 너무 밝았다.
“사원증을 대면 자동으로 열리는 출입문을 지나서 사무실로 출근하는 거예요!”
“…….”
“팀원들이랑 좋은 아침이라고 인사도 하고 업무를 하다가 점심 먹고 카페에서 커피 테이크아웃해 가지고 걷는 거죠!”
차마 누구도 진겸의 말을 끊지 못했다. 두 손을 불끈 쥐며 말하는 모양새가 귀여워 그냥 지켜보기만 했다.
“퇴근하면 다 같이 치킨집도 가고! 고깃집도 가고! 그게 회사 생활이잖아요!”
“그런 건 어디서 봤어?”
“너튜브에서 봤어요!”
역시나였다.
원범이 짧은 숨을 내쉬면서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걱정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이 순간 진지하게 걱정이 되는 걸까.
“……백 비서.”
“예.”
“너튜브 그만 보게 해.”
“……예.”
* * *
진겸은 하루라도 빨리 정장을 입고 출근하고 싶어서 몸이 드릉드릉했다. 하지만 훈일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제는 괜찮아졌다고 퇴원시켜 달라 졸라도 그는 굳건했다.
보다 못한 진우가 나서서 얘기해 주어 겨우 퇴원 허락을 받아 낼 수 있었다.
그동안 병원에 있으면서 너튜브를 보거나 훈일이 빌려준 판타지 소설책을 읽었다. 진우가 퇴근하면 같이 병원 주변을 산책하기도 했다.
나흘째 되던 날 오전. 드디어 고대하던 퇴원이었다.
“밥 꼬박꼬박 먹고 영양제도 챙겨 먹어. 하루에 운동 30분 이상 꼭 하고. 졸리지 않아도 밤엔 자려고 노력해. 숙면도 훌륭한 약이야.”
“그 말 벌써 세 번째인 거 알아요?”
“네 번, 다섯 번을 해도 모자라. 만약 또 쓰러져서 병원에 실려 오면 진짜 병실에 감금시킬 거야.”
“의사가 그래도 돼요? 완전 협박이잖아요…….”
가방을 고쳐 멘 진겸이 놓고 가는 것이 없는지 병실을 둘러봤다. 진우가 다 정리해 놓은 덕에 가지고 갈 건 가방뿐이었다.
훈일은 병실 문을 열어 주며 끝나지 않은 잔소리를 이어 갔다.
“진짜 협박이 뭔지 보여 줘?”
“아니요. 안 볼래요.”
“보기 싫으면 내가 말한 거 다 지켜. 지금 위랑 장 기능이 많이 떨어진 상태니까 자극적인 거 먹지 말고 웬만하면 죽 먹어.”
“죽 맛없는데…….”
웅얼거리는 목소리에 훈일의 입술이 씰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