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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57)화 (57/92)

57화

수혁은 물끄러미 진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살 좀 쪄야겠다. 볼이 통통하니까 보기 좋네.”

원래 볼살이 별로 없었는데 얼굴이 부어서 살이 좀 오른 것처럼 보였다. 잠시 감상하고 있는데 까칠한 목소리에 강제로 시선을 돌려야 했다.

“옆으로 그만 좀 오세요. 저 팔 눌려요.”

“백 비서가 팔을 빼는 게 어때?”

“제가 먼저 올려놨습니다.”

“나중에 온 손님을 위해 비켜 줄 생각은…… 없어 보이네.”

진우가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눈썹을 들썩였다.

진겸은 투덕거리는 두 사람을 둔 채 원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자리에 말뚝처럼 서 있는 게 신경 쓰였다.

“이사님도 제 병문안 와 주신 거 맞죠?”

“…….”

“매일 오셨다고 들었어요. ……감사합니다.”

훈일이 해 준 얘기였다. 정신이 없는 진우를 대신해 일주일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부 말해 줬다.

딱히 사건이라고 할 건 없지만, 중환자실에 있어서 정해진 시간에만 면회할 수 있는데도 진우가 복도에서 살다시피 했다는 것과 수혁과 원범이 매일 찾아왔다는 것.

진우가 밥을 제때 챙겨 먹질 않아서 죽을 사다 주기도 하고, 버티다가 쓰러져 잠든 진우를 옮겨 주었다는 말도 전해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괜히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간지러워 저도 모르게 가슴 중앙을 긁기도 했다.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는다는 것, 그리고 사랑을 받는다는 것. 그게 이런 기분인가 싶었다.

제 옆에 앉아 있는 수혁도 장난스레 말을 하면서도 눈에는 걱정을 한 아름 담고 있다. 훈일에게 말을 전해 듣고 나서인지 그렇게 느껴졌다.

그리고 원범에게서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퇴근하고 바로 오셨을 텐데 배 안 고프세요? 병원 근처에 맛집 있다고 들었는데 셋이서 다녀오시는 건 어때요?”

진겸은 정말 순수하게 식사하고 오라고 한 말이지만 세 사람 전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배 안 고파.”

“나 원래 저녁 잘 안 먹어.”

“…….”

눈을 굴리던 진겸은 알아서 하라며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세 사람을 최대한 부딪치지 않게 하려고 했는데 이젠 소용없다는 걸 안다.

자신이 옆에 없어도 회사에서 얼마든지 마주치게 될 거고, 이번엔 자신이 구심점이 되어 더 만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병원에 입원하지 않았으면 회사에서 보고 끝났을 테니 말이다.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진겸이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진우의 등에 올렸던 손을 아프지 않게 살짝 내리쳤다.

“너! 그동안 회사 안 갔다며?”

“아…… 훈일이 형.”

진우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진겸이 왜 회사에 집착하는 건지는 몰라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출근시키려 했다. 무슨 사명이라도 있는 모양이다.

진우가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리자 진겸이 그의 뺨을 양손으로 잡고 들어 올렸다.

“일주일간 안 갔으면 잘린 거 아니야?”

눈에 힘을 주고 말하는 모습이 무섭기보다는 귀여워 진우의 입술 사이로 웃음이 새어 나갔다.

그 소리에 진겸의 미간과 콧잔등이 더 찌푸려졌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기색이 그득그득했다.

진우가 대답할 것 같지 않자 고개를 휙 돌려 원범을 바라봤다.

“이사님. 혹시 진우…… 잘렸어요?”

“아니. 안 잘랐어.”

“다행이다…….”

저도 모르게 깊은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레이》에서는 진우가 멋대로 결근하는 일은 없었다. 이건 순전히 자신이 쓰러져서 생긴 일이란 거다.

현재 진우의 월급으로 빚을 갚고 생활비를 충당하고 있다. 일을 하지 않는다면 당장 다음 달이 막막한 것이 현실이다. 그걸 진우 본인도 알기에 더욱 열심히 살아왔다.

그런 진우가 일주일이나 결근을 했다는 건 확실히 큰일이었다. 이대로 잘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다. 하지만 원범은 진우를 자르지 않았다고 했다.

‘진짜 진우를 많이 좋아하나 보다…….’

병원비를 지원해 주는 것도 모자라 진우의 많은 부분을 이해해 주고 있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옆에서 보던 수혁은 진겸의 행동에 덩달아 실소를 머금었다.

원범도 슬쩍 입꼬리를 올린 채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병원 바닥과 구둣발이 부딪혀 나는 소리가 퍼져 나갔다.

앞에는 진우. 옆에는 수혁.

진겸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그게 참 못마땅했다.

가만히 보다가 진우를 지나쳐 침대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진겸의 옆에 궁둥이를 붙였다.

진겸이 앉아 있는 곳이 침대 중앙이니 망정이지. 안 그랬다간 원범은 그 큰 몸을 욱여넣어야 했을지도 모른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수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아하하!”

진우는 작게 입을 벌린 채 양쪽으로 눌리고 있는 팔에 힘을 줬다. 이대로 팔을 뺐다간 진겸의 몸에 두 사람이 너무 가깝게 붙을 게 뻔했다.

“덩치도 크면서 형을 사이에 두고 앉으면 어쩝니까! 두 분 다 소파로 가세요. 저 넓은 곳 놔두고 왜 여길……!”

졸지에 장정 둘 사이에 끼게 된 진겸은 묵묵부답으로 옆에 앉은 원범을 봤다.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수혁의 웃음소리와 어떻게 해서든 공간을 만들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담긴 팔이 꿈틀거리는 것도 느껴졌다.

진겸은 무언가 활기찬 기운에 동화돼서는 이를 내보이며 활짝 웃었다.

“다 같이 이러고 있으니까 좋다.”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지만 다들 똑똑히 들었다.

원범은 손가락을 움직일까 말까 고민하듯 쥐었다 펴기를 반복하다가 그대로 팔을 들어 올려 진겸의 뒤통수에 붙였다.

전에도 느꼈지만 제 손이 큰 건지. 진겸의 머리가 작은 건지는 몰라도 한 손에 들어왔다.

“백 비서 무단결근이 일주일이야.”

“……안 잘랐다면서요?”

“아직 안 자른 거지. 앞으로도 그러겠다고는 안 했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진겸은 입을 크게 벌리고는 눈을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진우의 옷을 붙잡고 마구 흔들었다.

“내일부터 출근해!”

“조금만 더 옆에 있을래.”

“그러다 너 잘리면 어떡해? 내가…… 어, 내가 먹여 살리고 싶긴 한데…… 나 돈 없는데…….”

점차 줄어드는 목소리에 수혁이 또다시 웃음을 터트렸다.

저 작은 머리로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길래 거기까지 가는 걸까?

자신을 이렇게 웃게 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데 참 대단한 형제다 싶었다.

수혁의 웃음소리에도 진겸은 심각했다.

“……우리 진우 잘려요? 안 자를 거죠? 그렇죠, 이사님?”

“내가 왜 안 자를 거라고 생각해?”

“어…… 어…….”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하던 진겸이 서둘러 이유를 덧붙였다.

“진우처럼 유능한 비서는 다시 만나기 어려우니까요!”

두 주먹을 꽉 쥐고 크게 외치자 수혁은 아예 침대에 누워 끅끅거렸다. 어떻게 해서든 진우의 퇴사를 막겠다는 진겸의 행동이 너무 재밌었다.

원범도 미세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진우가 일머리는 있는 편이다. 옆에서 양 비서가 알려 주는 것도 곧잘 해냈고 무엇보다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컸다. 정확히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지만.

“그 유능한 비서가 너무 빠져서 비서 보조를 뽑을 생각이야.”

보조라는 말에 가만히 듣고만 있던 진우가 반응했다.

“보조라뇨? 인원 충당해 달라고 할 땐 사람 많은 거 싫다고 하셨잖아요.”

“그랬지.”

원범은 아직 진겸의 뒤통수에 붙였던 손을 투박하게 움직였다. 분명 쓰다듬으려고 하는 것 같은데 그냥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진겸의 머리가 톡톡 튀어 앞으로 점차 수그러들었다.

“그래서 말인데…… 카페에서 잘린 김에 내 회사에서 일해.”

“……지금 형한테 하신 말씀이세요?”

“어.”

할 말은 그게 다였는지 손을 거뒀다.

영문도 모른 채 뒤통수를 내주었던 진겸은 원범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가만히 있다가 점차 눈을 크게 뜨고는 고개를 들었다.

“저 취직시켜 주시는 거예요? 비서로?”

“비서가 아니라 비서 보조.”

비서나 비서 보조나. 무슨 차이가 있는지 모르는 진겸은 그저 취직시켜 준다는 말에 눈을 반짝거렸다.

그 눈빛을 본 원범이 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촉촉한 눈망울을 마주하니 진작 말할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는 병원복이 없는 건지, 아니면 말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병원복 사이로 앙상한 몸이 보였다.

핏기 없이 창백해서는 입술만 새빨간 얼굴.

‘달라진 게 없는데.’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했던 얼굴 그대로였다. 변한 거라곤 지금은 조금 부었다는 것,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

그 사소한 것들이 모여 전혀 다른 사람이 됐다.

진겸은 날카롭게만 보였던 원범의 눈빛이 어쩐지 조금은 따뜻하게 느껴졌다. 냉기를 폴폴 풍기며 당장이라도 상대방을 찢어 버릴 듯이 살기를 내뿜는 눈이 아니었다.

“저 그럼 이제 이사님 비서 되는 거예요?”

“내 비서가 아니라 내 비서의 보조가 되는 거지. 두 번 말하는 거 싫어한다고 했는데. 이해가 잘 안 돼? 그럼 고용하기가…….”

“아니요! 완전 이해했어요!”

원범이 말을 철회할세라 진겸이 고개를 빠르게 저으며 등허리에 힘을 주고 바르게 폈다.

“그래서요? 저 언제부터 일할 수 있는데요? 내일부터 해도 돼요?”

“형.”

“……어?”

기대에 찬 목소리가 한순간에 사그라졌다.

진우는 제 어깨에 올려진 진겸의 손에서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짐작하고 있나 보다.

깍지 낀 팔을 풀고는 얇은 허벅지에 올렸다. 그러고는 시선을 맞췄다.

“아까 나랑 약속했잖아.”

“그렇긴 한데…….”

“일은 나중에라도 할 수 있어. 알지? 지금은 형 몸만 생각할 때잖아. 응?”

타이르듯 잔잔한 목소리로 말했지만 그 속에 담긴 단호함을 숨길 순 없었다.

진겸은 손을 아래로 툭 떨어트렸다. 제 허벅지에 놓인 진우의 손등을 손끝으로 문지르자 뼈와 핏줄이 만져졌다.

“……너랑 같이 있을 수 있잖아.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출근도 같이하고 퇴근도 같이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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