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표정부터 다르긴 했다.
자신을 바라볼 때 어떻게 해서든 유혹하려 가늘게 뜨고 일부러 휘게 웃었던 눈과 확연히 달랐다.
환한 빛 같았다. 백진우가 웃었을 땐 ‘기분이 좋다’에서 그쳤지만, 진겸이 웃으니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같이 올라갔다.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원범은 아무에게도 물을 수 없던 걸 입에 담았다.
“네가 보기에도 내가 달라졌어?”
“그걸 말이라고 해? 표정부터가 다르잖아. 내가 청오한테 그 선글라스 얘기 들었을 때 네가 진짜 미쳐 버린 건가 했다니까.”
진겸의 의지와 상관없이 받아 낸 선글라스는 지금 원범의 드레스룸에 있는 보관함에 고이 들어가 있다.
“선글라스는 곧 죽어도 안 쓰던 놈이 썼다는데 믿을 수가 있어야지.”
당시 수혁은 거짓말하지 말라며 이청오를 타박하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가 억울하다며 몰래 찍은 사진을 증거로 보여 주었다.
보잉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있는 원범의 사진은 수혁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모종의 사건 이후로 원범은 제 눈앞이 캄캄한 걸 좋아하지 않는다. 게다가 블랙만 선호할 것 같이 생겨서는 집은 생각보다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이제 괜찮아진 거야?”
“아니. ……근데 그건 괜찮더라.”
아이러니하게도 그 보잉 선글라스는 괜찮았다.
원범의 눈빛이 부드럽게 풀리는 걸 본 수혁의 눈이 순간 커졌다.
‘……위험하네.’
수혁은 입매를 굳게 다물었다. 자신에겐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님을 단박에 알아챘다.
* * *
진겸의 회복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좋은 영향을 끼친 모양이었다.
병원 밥이 맛없어도 열심히 먹었고 약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검사받을 때도 협조적으로 임했다.
검사가 끝나고 혹시 기억에 변화가 있나 싶어 정신과 전문의인 기택과 다시 만나게 됐다.
“잘 지냈니?”
“네.”
“다행이네. 그동안 기억나는 거 있었어?”
“아니요. 없었어요.”
“그랬구나. 앨범이나 예전에 썼던 다이어리, 일기 같은 건 읽어 봤어?”
진겸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짐을 정리할 때도 앨범을 본 적이 없었다. 진우의 책 더미에도 없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진겸의 고개가 점차 옆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진짜…… 사진이 하나도 없잖아?’
앨범만이 아니다. 집에서 사진을 본 기억이 아예 없다. 하다못해 작은 액자조차 보지 못했다.
이사 오면서 전부 잃어버리기라도 한 걸까? 이따가 진우에게 물어봐야겠다.
기택은 기억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딱히 도움이 될 만한 건 없다고 생각했는지 질문을 멈췄다.
“요즘 기분은 어때?”
“음…… 좋아요.”
“기분이 안 좋을 때도 있었어?”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기분이 안 좋았어?”
“……제 실수로 ……진우가 상처받아서요.”
이제 고작 한 달하고도 일주일인데 진우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너무 많았다. 특히 이번 일로 진우는 많이 지친 듯 보였다.
상담을 위해 병실을 나올 때도 진우는 웃어 주었지만, 몸과 마음 모두가 지쳤다는 걸 숨길 수 없었다. 눈치가 없는 진겸도 그건 알 수 있었다.
다시는 진우의 역린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솔직히 이번 일은 무조건 제 잘못이라고 하기엔 애매했다.
놀라고 싶어서 놀란 것도 아니고 그 남자가 테이블을 갑자기 내리쳐서 그랬다. 물론 그 전에도 몸이 경고를 보내긴 했다.
처음 빙의했던 날에도 아프긴 했지만 심하지 않았고, 알레르기 같은 특수한 상황 말고는 제대로 아파 본 적이 없어서 방심한 것도 맞다.
조금 있으면 나아지겠지. 괜찮아지겠지.
턱도 없는 일이었다. 괜찮아지기는커녕 더 악화되었고 종국엔 쓰러져서 병원으로 실려 오기까지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시야에 담긴 진우의 몰골은 처참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해 볼이 쏙 들어가고 눈 밑이 퀭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진겸의 어깨가 축 처지고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긴 속눈썹이 잘게 떨리고 입술을 가만히 두지 못해 계속 오물거렸다. 촉촉한 눈망울에 물기가 어렸다.
상담은 길지 않았다. 심리 치료를 원한 것도 아니었고 그냥 현재 상황에 관한 이야기만 나누었다.
그나마 진겸이 솔직하게 이야기해 주어 기택이 소소한 팁을 주는 것으로 상담을 끝냈다.
진겸은 서둘러 병실로 돌아왔다. 멍하니 앉아 있던 진우는 큰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에 흠칫 몸을 떨었다.
“진우야!”
“어? 어.”
병실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은 진겸은 빠른 걸음으로 진우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가느다란 두 팔을 벌렸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된 진우가 가만히 있자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고마워.”
팔 안에 진우를 가뒀다. 에어컨을 맞은 팔은 차가웠다.
“네가 내 옆에 있어서 너무 좋아. 진짜 다행이야.”
“……형?”
“아프게 해서……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진겸은 팔을 풀더니 두 손으로 진우의 양 뺨을 잡았다. 울 듯한 얼굴로 최대한 밝게 웃었다.
“미안해. ……기다려 줘서 고마워.”
“…….”
“우리 진우 진짜 강하다. 너무 멋있어.”
한 글자, 한 글자. 자신의 마음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도록 진심을 담았다. 울렁이는 마음에 진겸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진우에게 그 진동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떨림을 멈추기 위해 힘을 주자 진우의 뺨이 사정없이 짓눌렸다.
입술이 툭 튀어나오고 놀라서 커진 눈까지 더해지자 웃긴 얼굴이 됐다.
이래도 잘생기면 어쩌자는 건지.
“왜 아무 말이 없어? 이럴 땐 ‘형도 멋있어’라든지. ‘형도 강해’라고 해야지.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것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진겸이 툴툴거렸다. 자신은 고맙다, 미안하다, 강하다, 멋지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단어를 동원해 진심을 표현했는데 돌아온 거라곤 멍한 눈이라니.
이해는 한다.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놀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너무 말이 없으면 말한 사람은 조금 의기소침해지기 마련이다.
‘이게 아닌가……?’
기택이 알려 준 방법이다. 자기 마음을 다 표현하라고 했다. 그래서 했는데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하다.
혹시 방법이 잘못된 건가?
볼을 누르던 손에 힘을 빼고 거두려 하자 진우가 다급하게 그 위로 포개어 잡아 왔고 이내 진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힘이 들어간 진우의 손가락이 진겸의 가느다란 손가락들을 옥죄었다. 진겸을 바라보는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어쩐지 두려움이 섞여 있는 듯했다.
기택을 만나러 간다고 들었는데 오자마자 미안하다고, 기다려 줘서 고맙다고 말하는 게 낯설게 와닿았다.
일주일 동안 일어나지 못한 것에 대한 말인지, 아니면 기억을 잃었던 동안을 의미하는 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기억, 돌아왔어?”
만약에 기억이 돌아왔다면 자신에게 이런 행동을 하진 않았을 거다. 지금껏 그래 왔으니까.
혹시 기억이 돌아와서, 예전 기억과 기억을 잃고 난 후의 기억이 공존하는 건 아닐까?
진우의 힘없는 목소리에 진겸이 느리게 고개를 저었다.
“응? 아니……. 미안, 하나도 안 돌아왔어.”
자신은 진짜 백진겸이 아니니까. 기억은 영영 돌아올 수 없을 거다.
제 말에 진우가 실망할 줄 알았다. 하지만 진우는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잘게 떨리던 눈동자는 안정을 찾아갔고 손가락을 쥐고 있던 손에서도 힘이 풀렸다. 이상한 생각이라는 건 아는데 어딘가 모르게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한숨을 내쉬는 진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기억을 찾았으면 좋겠어?”
지난번엔 찾지 않아도 된다고 했으면서 기억이 돌아왔냐고 묻는 게 이상했다.
혹시라도 기억을 찾길 원하는 거라면 자신은 어떻게 해 줘야 하는 걸까?
하지만 진겸의 걱정과는 다르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안 찾아도 돼. 그냥 이렇게 살아도 돼. 내가 앞으로 더 잘할게. 잘 챙길게. 형이 아프지 않도록 내가 옆에 계속 있을게.”
쉬지 않고 말을 쏟아 낸 진우가 한쪽 팔을 뻗어 진겸의 허리를 감싸 안더니 자기 쪽으로 당겼다.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기에 벌어진 진우의 다리 사이로 진겸이 자연스럽게 들어갔다.
진우는 제 뺨에 있는 새하얀 손을 어깨 너머로 넘기고는 몸을 숙여 진겸의 가슴에 귀를 붙였다.
쿵. 쿵. 쿵.
심장이 뛰는 소리라고 알고 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판막이 열렸다가 닫히는 거다. 그리고 심장이 약한 진겸에겐 너무도 중요한 소리다.
규칙적으로 들리던 소리가 점차 빨라졌다. 그 변화는 귀를 대고 있던 진우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진우가 슬쩍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왜 긴장해?”
“……내가? 나 긴장 안 했는데?”
“소리가 빨라졌어. 심박수 올라간 거 아니야?”
진우가 손목에 있는 워치를 확인하려 하자 진겸이 서둘러 뒷짐을 지며 피했다.
“왜 안 보여 줘?”
“내가? 아닌데. 그냥 뒷짐 지고 싶었어.”
진우가 눈을 가늘게 뜨고 올려다보자 진겸이 천천히 시선을 옆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점점 턱을 위로 치켜들더니 아예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러다가 또 쓰러지는 거 아니지?”
“……아니야.”
“지금 이러고 있는데도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 ……좋다.”
다른 사람의 심장 소리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다. 느리게 뛰든 크게 뛰든. 소리가 이상하든 말든. 하지만 진겸의 심장 소리라고 생각하자 마음이 편해졌다.
진겸이 누워 있던 일주일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았다.
진겸이 건강해진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괜찮다.
평생 그렇게 아무도 옆에 두지 않고 둘만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