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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54)화 (54/92)

54화

맞잡은 손을 풀려고 했는데 어찌나 힘을 주고 잠든 건지 풀리지 않았다.

“그냥 떼어 내. 백진겸 피 안 통하겠다.”

수혁의 말에도 원범의 손길은 조심스러웠다. 둘 중 한 사람이라도 깨지 않도록 손가락 하나하나 공들여 폈다.

진우의 키가 작은 것도 아니고 그래도 성인 남성인데 그를 들어 올리는 동작에 힘겨운 기색은 전혀 없어 보였다. 작은 소리도 내지 않은 채 그대로 침대에 옮겼다.

깰까 봐 조심히 내려놓자 훈일이 자세를 정리해 준 후 이불을 덮어 주었다.

“너네도 이제 가.”

“조금만 더 보고 갈래. 항상 10분은 있었어. 왔는데 그건 채우고 가야지.”

수혁이 의자를 꺼내 앉으며 말하자 훈일이 몸을 돌렸다. 가운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는 빤히 바라봤다.

“왜? 뭐. 할 말 있으면 하고 가. 안 바빠?”

“아니, 웃겨서.”

“뭐가 웃겨?”

“웃기잖아. 선수혁이 병문안을 매일매일, 꼬박꼬박, 하루도 빠짐없이 온다는 거. 이게 말이 돼?”

말이 안 될 건 또 뭐람.

수혁은 대꾸하기도 귀찮아 입을 꾹 다물었다. 잠깐 손가락을 움찔하다가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

사실 전부터 시도했는데 항상 진우가 지켜보고 있어서 고작 1초 정도 툭 닿았다 떨어지는 걸로 끝내야 했다.

손끝이 찾아간 곳은 진겸의 이마였다. 동그랗고 예쁜 라인을 따라 살살 움직이자 부드러운 살결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번에도 오래 닿아 있지는 못했다. 훈일이 수혁의 손목을 잡고서 들어 올린 탓이었다.

“더러운 손으로 어딜 만져.”

“더럽다니. 손도 씻고 소독제까지 바르고 왔어.”

“그거 해도 더러워.”

손에 세균이 많아서 더럽다기보다는 그냥 진겸이를 만지는 게 싫은 모양이었다.

훈일은 팔을 높이 들더니 그대로 뒤로 툭 던졌다. 수혁의 팔이 힘없이 떨어졌다. 힘주면 빼낼 수야 있었겠지만 굳이 실랑이하고 싶지 않았다.

“형.”

“불러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진겸이 만질 생각하지 마.”

“그거 말고. 궁금한 게 있어서.”

“뭔데?”

이상한 거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부리부리하게 뜬 눈으로 바라보자 수혁이 혀를 짧게 찼다.

전에는 안 그러더니 요새 훈일이 조금 이상해진 것 같다. 아니, 원래 이상한 사람이었으니 더 이상해졌다는 말이 맞을 거다.

“이렇게 몸이 약한데 일도 못 하면 뭐 먹고 살아? 지금에야 백 비서가 옆에 있으니 괜찮다지만 나중에 혼자 살면? 자립이 가능하긴 한 거야?”

“몸을 움직이는 일만 있는 게 아니잖아. 쉬엄쉬엄하면서 할 수도 있는 거고. 스트레스에 취약하니 최대한 덜 받는 걸 해야겠지만…….”

사실 그런 직업이 뭐가 있는지는 훈일도 알지 못했다. 어떤 일이든 스트레스는 받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최대한 몸을 적게 사용하는 직업을 택해야 하는 건 맞았다.

요즘 같은 시대엔 인플루언서도 하나의 직업이라고 하니 그런 것도 좋을 것 같은데, 백진겸은 그런 쪽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왜 그러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유명해져서 사람들이 자길 알아보는 게 싫다나 뭐라나. 본인이 싫다는데 강요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제일 좋은 직업군이라고 생각하기는 했다.

“이제 카페 알바도 못 할 텐데.”

“왜? 아파서 쉰다고 한 거 아니었어?”

“언제 일어날지도 모르는데 계속 알바 자리 비워 두라고 할 순 없잖아. 새로 구하라고 했어.”

수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면서 은근슬쩍 다시 진겸에게 팔을 뻗었다. 이번엔 얼굴이 아닌 손을 노렸다.

핏줄이 보일 정도로 새하얀 손을 뒤집었다. 곱게 말린 손가락을 톡톡 건드렸다. 반응은 없었다. 손가락을 폈다가 놓으면 다시 천천히 오므라졌다.

훈일은 가늘게 떴던 눈을 찌푸렸다. 방금 나눈 대화는 수혁이 아닌 진우와 해야 할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네가 새로 구하라고 했다고?”

“어.”

“왜 그걸 네가 카페에 얘기해?”

“그럼 누가 해? 백 비서? 아니면 누워 있는 본인이?”

진겸이 누워 있는 동안 진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 연락할 정신이 없었을 수 있다.

그랬다면 진겸의 핸드폰으로 연락이 왔을 테고 그때 사정을 얘기할 수도 있는 거였다.

잘한 일은 맞다. 하지만 왜 그걸 수혁이 했느냐가 궁금한 거였다.

훈일이 팔짱을 끼고서 가만히 보고 있자 수혁이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를 흘겼다.

“왜 그렇게 보는데?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괜히 돌려 말하지 말고.”

“너 진겸이한테 정말 관심이 생긴 거야? 장난이 아니라 진짜로?”

“형이 보기엔 어떤데? 그래 보여?”

역으로 질문을 던진 수혁은 어느새 웃고 있었다.

지금껏 보인 수혁의 태도만 보면 관심이 있다는 게 티가 났다. 하지만 수혁과 오래 알아 온 훈일 또한 그 관심이 긍정적인지 아니면 일시적인 호기심에 따른 관심인지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본인도 구분을 못 하는데 남이 할 수 있을 리가.

수혁은 바로 대답하지 않는 훈일을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백 비서도 똑같이 물어보더라. 진심이냐고.”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는데?”

“형도 진심이 아니면 백진겸한테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

수혁은 턱을 괴고는 진겸의 손가락에 제 손가락을 걸었다. 크기 차이가 확연히 났다.

마디가 굵은 제 손가락과는 다르게 진겸의 손가락은 가늘고 길다. 게다가 굳은살도 박이지 않고 깨끗했다.

“왜 꼭 진심을 담아야 하는 거지? 그냥 하고 싶어서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걸까? 진심이라고 말해도 그게 거짓이면 어쩌려고.”

“…….”

“뭐, 그렇다고.”

“너도 참 너다. 근데 나도 네가 그냥 진겸이한테 그러는 거 별로 좋아 보이진 않아.”

여기나 저기나. 사방이 전부 백진겸을 위해 한마디씩 얹는다. 이 상황이 우습기도 하고 재밌기도 했다.

확실히 예전의 백진겸이었다면 자신이 이렇게 관심을 표하진 않았을 거다. 그건 부정하지 않는 진실이다.

진겸의 손가락을 지분거리던 수혁이 고개를 들었다.

“백 비서한테 그럴 땐 아무 말도 안 하더니. 왜 얜 안 돼?”

“진우는 강하거든. 쉽게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걸 아니까 내가 참견할 필요가 없었지.”

백진우는 강하다.

이건 수혁도 인정하는 부분이다. 흔들리지 않고 자기 소신대로 움직이는 사람은 흔치 않다. 특히나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주변에 휘둘리기가 쉬운데 진우는 그렇지 않았다.

그를 휘두르고 싶으면 백진겸을 걸고넘어지면 된다. 그러면 백진우는 한순간에 무릎을 꿇는다. 굳건해서 그 누구도 꿇릴 수 없던 무릎이 백진겸 한마디에 무너진다.

훈일은 고개를 꺾어 잠든 진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 걱정을 바라지도 않을 거야. 워낙 심성이 착한 애라 남한테 피해 주는 걸 싫어하니까.”

“퍽이나.”

수혁이 읊조리듯 내뱉었다. 그간 진우가 해 왔던 일들을 보면 절대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한 말이었다.

“……근데 진겸인 아니야. 쟨 순두부야. 틀이 있을 땐 괜찮은데 그게 없으면 순식간에 으깨질 거야.”

“비유를 해도 꼭…….”

“그만큼 조심히 다뤄야 한다는 말이야. 함부로 누르면 망가진다고.”

훈일도 다단계 이야기를 들었기에 조금 걱정하고 있었다. 다단계에 속았다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속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쉽게 잊히지 않기 때문이다.

“진겸이랑 친해질 거면 친해지고 그냥 재미로 건드리는 거면 그만두라는 거야. 계속 알고 지낼 거면 상관없어. 어차피 네가 내 말을 들을 애도 아니고.”

수혁이 어깨를 으쓱이자 훈일이 크게 혀를 찼다. 마음에 안 든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진우를 침대에 옮겨 주고 지금까지 조용히 있던 원범이 진겸이 누워 있는 침대로 다가갔다.

훈일은 그런 원범의 뒤통수에 대고 한마디 던졌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탁 이사, 너한테도 해당하는 말이야.”

“충고는 사양할게.”

“충고가 아니라 부탁이자 경고야.”

부탁이면 부탁이고, 경고면 경고지. 둘을 섞어서 말한 훈일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시간을 확인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다.

“내가 왜 너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도통 이해가 안 되네. 그냥 각자 알아서 잘 살면 안 돼? 회사 안 바빠? 이번에 해외 지사 건 때문에 바쁘다며.”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회사에 스파이라도 심어 놨어?”

대학 병원에서 일하느라 쉬는 시간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양반이 회사 소식은 꽤 빠삭하다. 진짜 숨겨진 정보통이 있나 싶을 정도다.

“나야 뭐든 다 알지. 난 이제 갈 테니까 너네도 제발 좀 집에 가라.”

“알아서 갈게. 형이나 가. 시끄러워서 백진겸 깨겠네.”

수혁의 타박 섞인 말에 뚱한 표정을 지은 훈일이 나갔다.

병실에 오면 항상 서 있던 원범이 천천히 몸을 숙이더니 진우가 앉아 있던 의자에 궁둥이를 붙였다. 수혁이 의외라는 듯 보자 뭘 보냐는 듯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들었지? 진심 아니면 건드리지 말라신다. 나는 진심이 약간 섞였는데 넌 아니니까 이제 관심 꺼야겠다.”

“누가 아니래?”

“……설마 너도 백진겸한테 진심이라고?”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되묻자 원범의 큰 손이 침대 위로 올라오더니 진겸의 팔을 툭 건드렸다.

“말랑하네.”

“……말랑하지. 근육이 없는데 딱딱하겠냐. 아니, 말 돌리지 말고. 너 진짜 진심이야? 백 비서는 어쩌고?”

원범은 수혁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진겸의 얼굴을 하나하나 뜯어봤다. 전이랑 다를 바 없는 얼굴이다.

“기억을 잃었다는 거 진짜였어.”

“또 말 돌리네. 후…… 그걸 이제 알았어? 난 또 진작 아는 줄 알았는데.”

“긴가민가하긴 했어. 근데 치약 샀다는 말 듣고 확신했지.”

수혁은 복숭아 알레르기로 쓰러진 이후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걸 믿었지만, 원범은 아니었다. 조금 더 지켜보고 있었다.

언제 또 변할지 모르니까. 그러다가 다단계에 속아 넘어가는 꼴을 보고 나니 그제야 확신이 들었다.

‘진짜 기억 상실증에 걸렸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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