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진겸은 입술을 꾹 다물고 손에 힘을 줬다. 비장함까지 맴돌자 진우가 웃으며 말했다.
“무서우면 말해. 바로 멈춰 달라고 할게.”
자기 딴에는 웃으라고 한 말인데 진겸은 진심으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바이킹 기사님은 황당하다는 얼굴로 둘러싸고 있는 남자들을 훑었다.
“출발합니다.”
띠링띠링 경쾌한 음악 소리와 함께 바이킹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린이용 바이킹이라고는 하나 속도가 완전 느린 것도 아니고 각도가 낮은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끝까지 버틴 진겸은 바이킹에서 내려오다가 다리가 풀려 버렸다. 당황한 진우가 서둘러 부축했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말아 주세요.”
진우의 팔에 얼굴을 묻은 진겸이 아주 작게 속삭였다. 그의 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원범이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계속 보고 있다간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날 것 같았다. 웃는 게 이상한 건 아니지만 어색했다.
그에 반해 수혁은 어깨를 떨면서 끅끅거리는 소리를 계속 내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은 진겸이 흘겨보자 필사적으로 웃음을 참아 냈다.
“큼!”
진겸이 헛기침을 내뱉고 다리에 힘을 줬다. 큰 바이킹을 탄 것도 아니고 작은 걸 타고 이런 모습을 보였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것도 잠시였다. 금방 회복하고는 걱정하면서도 대놓고 웃었던 양 비서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양 비서는 지금 상황이 재밌기도 하고 후환이 두렵기도 했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서인지 아직도 더위가 가시질 않았다. 선 이사야 부서가 다르니 마주칠 일이 많이 없다지만 탁 이사는 아니었다.
‘이러다 잘리는 거 아니야?’
순전히 궁금증 때문에 월미도에 가자고 한 거지 특별한 계획이 있는 건 아니었다. 이곳에 도착한 지 1시간이 넘어가는데 바이킹 하나만 탄 채 그냥 정처 없이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이곳이 넓은 것도 아니고 무엇을 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마냥 걸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게다가 오늘은 구름조차 없는 뙤약볕이었다.
양 비서와 진우는 차에 겉옷을 두고 내렸고, 재킷을 입고 있던 원범과 수혁도 어느새 벗어서 팔에 걸치고 있었다. 잠깐은 괜찮은데 장시간 밖에 있으니 그들도 더운 모양이었다.
진우는 들고 있던 진겸의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형, 나 봐 봐.”
진겸이 고개를 돌리자 얼굴에 난 땀을 툭툭 찍어 훔쳐 주었다.
“모자 사자니까.”
“나만 쓰기 좀 그래…….”
땀이 많이 나는 건 아니지만 진우에게 손수건을 받아 들고는 목에 대고 꾹 눌렀다. 그래도 해가 가려져서 목덜미 열기가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좋긴 너무 좋은데 심각하게 더웠다. 이대로 계속 있다간 어지러워서 쓰러질 것 같았다.
그러던 중 진겸의 눈에 슬러시가 들어왔다.
“진우야, 우리 저거 마시자.”
형형색색의 슬러시는 한여름과 너무 잘 어울리는 음식이었다.
“다들 저거 어때요?”
진겸의 손끝이 가리키는 슬러시를 본 양 비서는 ‘옳다구나!’ 싶어 좋다고 찬성했다.
“난 됐어.”
“왜요? 저거 진짜 시원한데!”
“저런 거 안 먹어.”
수혁은 더운지 넥타이를 살짝 풀고는 목까지 잠근 단추도 두어 개 풀었다.
“이사님도 안 드세요?”
“어.”
단답형으로 말한 원범도 더운 건 마찬가지인지 미간에 주름이 가 있었다. 하지만 수혁과 다르게 그의 셔츠는 정갈했다.
진우와 양 비서가 같이 슬러시를 사러 갔다. 오늘 종일 결제되고 있는 카드는 원범의 것이었다.
슬러시가 오길 기다리던 진겸은 제 손에 들린 손수건을 보다가 슬쩍 내밀었다.
“제가 이쪽으로 닦았거든요. 반대쪽은 깨끗해요.”
원범이 받지 않고 가만히 보기만 하자 팔을 더 뻗었다. 티슈가 있다면 그걸 줬겠지만 지금 있는 건 손수건 하나였다.
흐르는 땀을 그대로 두는 것이 얼마나 찝찝한지 알기에 내민 거였다.
수혁은 그나마 손부채질이라도 하지 원범은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주르륵 땀을 흘리고 있었다.
진겸이 어서 받으라고 하자, 한쪽 눈썹을 올렸다가 내린 원범이 슬쩍 허리를 숙였다.
“닦아 줘. 거울이 없어서 어디서 나는지 안 보여.”
“다 큰 어른이 참…….”
진겸은 손수건의 깨끗한 부분을 잘 펴서 원범의 얼굴에 난 땀을 톡톡 두드려 닦아 냈다. 이리저리 확인까지 해 가며 남은 땀이 있는지도 살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수혁도 덩달아 허리를 숙였다.
“나도 닦아 줘.”
진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수혁의 땀을 닦아 주었다.
“여름에는 다들 손수건 하나쯤은 가지고 다니세요. 이렇게 땀을 많이 흘리면 필수죠!”
잔소리하듯 한 말에 수혁이 비죽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런 여름에 땀이 날 정도로 밖을 돌아다니는 일이 많지 않다. 에어컨 빵빵하게 나오는 곳에서 일하고, 그런 곳만 다니면 되는데 뭐 하러 더운 곳에 있겠는가.
오늘도 진겸만 아니었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갔을 거다. 카페라도 들어가고 싶은데 진겸이 너무 기대에 찬 얼굴로 밖을 돌아다니고 있어서 차마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기분이 좋은 거지, 더위를 느끼지 않는 건 아니었다.
“좋네. 땀 닦아 주는 애인도 있고.”
“아, 그 말 좀 하지 마요! 안 그래도 카페 직원들이 오해한단 말이에요.”
수혁이 히죽 웃으며 말하자 미간을 찌푸린 진겸이 손수건을 다시 가방에 넣으며 툴툴거렸다.
숙였던 허리를 편 원범의 눈썹이 미세하게 들썩였다.
“애인이라니?”
둘이 사귄다는 말은 못 들었는데.
만약 그런 사이가 됐다면 진우가 절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별다른 말은 없었다. 이청오 역시 어제 수혁이 카페에 갔다고만 했지, 두 사람이 사귄다는 보고는 하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리니 원범의 인상이 꽤 험악해졌다. 더워서 짜증이 올라오고 있는 와중에 애인이라는 말에 더 열기가 올라왔다. 그걸 본 진겸이 고개를 좌우로 세차게 흔들었다.
“어제 카페에 오셨는데 제 애인이라고 장난치셔서 직원들이 오해했거든요. 오늘도 오니까 다들 진짠 줄 알더라고요.”
“선 이사가 네 애인이라는 개소리를 했다고?”
“개, 개소리…….”
진겸은 작게 웅얼거리다가 서둘러 원범의 말에 답했다.
“네. 아니라고는 했는데…… 딱히 믿진 않는 것 같았어요.”
어제 분명히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아까도 애인이냐고 묻는 걸 보면 이미 소문이 난 모양이다.
앞뒤 맥락은 다 자른 채 ‘새로운 아르바이트생 애인은 잘생긴 남자’라고 굳혀진 느낌이었다.
진겸의 설명에 원범의 날카로운 시선이 수혁을 향했다. 이건 또 무슨 장난질이냐고 묻는 듯했다.
수혁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근데 백진겸 씨.”
“네?”
“이렇게 땀 닦아 주는 건 어디서 배웠어? 다른 사람한테도 해 주는 거 아니지?”
“당연히 안 하죠.”
자기를 뭐로 보냐는 듯한 얼굴에 수혁이 헛웃음을 지었다.
도대체 경계심은 어디에 묻어 둔 걸까? 진짜 개껌이랑 씹어 먹었나?
처음 병실에서 봤을 땐 원범을 잔뜩 경계하면서 주변에 오지도 않고 시선도 마주치지 않으려 하더니, 이제는 땀도 닦아 준다.
물론 그때는 처음 본 사람이라 낯설어서 피했다지만, 너무 쉽게 경계를 푼 게 아닌가 싶었다.
이건 원범만이 아니다.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상황이었다.
한 번 본 사람이 친구가 없다고 옷 사러 백화점 같이 가자는 걸 따라오고, 고기를 사 준다고 하니 냉큼 따라오고.
수혁이 생각하기에도 진겸의 행동은 참 이해하기 어려웠다.
‘어디서부터 가르쳐야 할지.’
사람은 살면서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고 그런 것도 전부 사라진 걸까.
경계심이 없는 편이 접근하긴 확실히 수월하다. 하지만 진겸은 정도가 심했다.
여기서,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사실 하나가 있다.
진겸에게 수혁과 원범은 마냥 남이 아니라는 거다. 어쨌든 《그레이》 속 주인공들이었고, 소설로 읽었을 때보다 직접 겪어 보니 괜찮은 부분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내적 친밀도가 비교적 쉽게 올라가는 중이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면 친구가 없다는 말에 안타까워하긴 해도 같이 쇼핑하진 않았을 거다. 고기를 사 준다는 말에도 쉬이 따라갈 리가 없었다.
그렇게 각자 다른 생각을 하며 월미도에서의 오후가 점차 지나고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었을 때쯤, 월미도까지 왔으니 조개구이를 먹어야 한다는 강력한 양 비서의 주장에 의해 저녁 메뉴가 결정되었다.
가장 가까이 있는 가게로 들어갔다. 룸으로 가려다가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냥 홀에 자리를 잡았다. 이왕이면 바다를 보며 먹고 싶다는 양 비서의 말에 창가 쪽에 앉았다.
거기까지는 순탄했다. 음식도 빨리 나왔고 많은 대화가 오가는 건 아니어도 분위기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 평온했던 시간은 순식간에 깨져 버렸다.
진겸은 너무 덧바른 선크림 때문에 눈이 따가워서 화장실에서 눈가만 닦아 내고 나온 참이었다.
일행이 있는 곳으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자기 팔을 잡는 손에 화들짝 놀랐다.
“어라라. 지금 뭐 하는 거야?”
“예?”
“왜 남의 가방을 발로 차?”
진겸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아래를 봤다. 발에 무언가 걸리는 느낌은 없었다. 가방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드니 가방은 남자의 손에 들려 있었다. 실제로 찼는지, 안 찼는지는 몰라도 우선 사과부터 했다.
“죄송해요. 제가 실수로 그랬나 봐요.”
“에이, 죄송하다고 사과하고 끝이야?”
“어…….”
“아니이! 그쪽이 지금 내 가방을 찼다니까?”
뭘 더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위협적으로 보이려는 건지 가슴을 앞으로 내밀며 몸집을 키우기까지 했다.
“세탁비를 주는 성의라도 보여야지!”
“세탁비 얼마가 필요한데?”
자리에서 달려온 진우는 진겸의 팔을 붙든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손등에 핏줄이 설 정도로 힘을 주자 남자가 악을 쓰며 진겸의 팔을 놓았다. 진우는 더러운 것을 만졌다는 듯 남자의 손목에서 손을 뗐다.
진우는 놀랐을 진겸의 어깨를 감싸 안아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