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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49)화 (49/92)

49화

밖으로 나온 진우는 아까부터 풀어지지 않는 표정에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이렇게 표정 관리가 안 되는 건 너무 오랜만이다.

‘선 이사. ……젠장.’

자꾸만 이를 악물게 된다.

“후…….”

긴 한숨을 내쉬자 옆에서 나란히 걷던 진겸이 슬쩍 팔을 건드렸다.

“표정이 안 좋네. 어디 아파?”

“아니, 안 아파. 형은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봐. 멀쩡하잖아.”

진겸은 손목을 꺾어 워치 화면을 보여 주었다. 화장실 앞에서 확인했을 때와는 달리 심박수는 정상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래도 안심이 되는 건 아니었다. 아까 화들짝 놀라서 커다래진 눈으로 돌아봤던 모습이 잊히질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이 진겸을 놀라게 했다는 게 진우는 꽤 충격이었다.

“형.”

“응?”

“불편하면 같이 안 가도 돼. 억지로 갈 필요 없어. 회식이라고 해 봤자 뭐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밥 먹는 게 다일 거야.”

“……나보단 네가 불편하지 않을까? 회사 회식인데 내가 끼는 게 이상하잖아.”

동생 회사 회식에 낀다는 것 자체가 좀 이상한 모양새이긴 했다. 아무리 상대편에서 먼저 제안했어도 자신이 거절했어야 맞는 게 아니었나 싶었다.

양 비서는 진우의 형이라 그냥 던진 건데 자기가 눈치 없이 가겠다고 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금이라도 빠져야 하나?’

진우에겐 미안하지만 사람들과 어울리는 자리가 조금은 궁금했다. 회식이라는 것도 경험해 보고 싶었다. 더구나 이제 원범이 마냥 무섭기만 한 것도 아닌지라 저도 모르게 덥석 수락해 버렸다.

처음 병원에서 봤을 때는 눈 마주치는 것도 무서워서 시선을 피했는데 지금은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웃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여전히 눈매가 사나워 오래 보긴 힘들다.

“나 지금이라도 못 간다고 할까?”

진우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분명 머릿속에선 진겸과 이사들을 더는 엮이게 두면 안 된다는 판단이 섰다. 하지만 마음속에선 이대로 진겸을 보내고 싶지 않은 충동이 크게 일었다.

차라리 일이 끝나기 전에 카페를 나왔다면 모를까. 같이 나온 데다가 이미 양 비서가 회식에 같이 가자고 한 상황에서 집에 가라고 할 수가 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옆에 딱 붙어 있어야겠다.

“같이 가. 형이 피곤할까 봐 그러지. 일하고 바로 가는 건데 안 피곤하겠어? 계속 서서 일했잖아.”

진겸은 진우의 손짓에 들고 있던 가방을 순순히 넘겼다.

“난 괜찮아. 그래도 오늘은 손님 별로 없었어. 중간에 쉬기도 했고. 어제는 진짜 많았거든. 오늘도 그랬으면 피곤하긴 했을 거야.”

너무 자연스럽게 진우가 진겸의 가방을 받아 멨다. 가방 안에 든 게 별로 없어서 무겁진 않았다.

진겸은 시원한 에어컨 아래에 있다가 무더운 바람이 부는 밖으로 나오자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확실히 여름 낮 3시는 해가 너무 쨍쨍하다 못해 타올랐다.

아직 어디로 갈지 결정이 안 된 건지 양 비서는 핸드폰을 쥐고 열심히 검색했다. 수혁과 원범은 덥지도 않은지 정장을 입은 채로 그늘도 없는 곳에 서서 대화를 나눴다.

진겸은 슬쩍 눈치를 보다가 진우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까치발을 들어 귓가로 얼굴을 붙였다.

“아까 무슨 일 있었어? 분위기가 좀 그렇던데…….”

다른 사람의 표정을 보고 기분이 어떤지 알 수는 없지만, 테이블 근처로 다가갔을 때 흐르던 싸늘한 기운은 눈치가 없어도 느낄 수 있었다.

“그냥 일 얘기 했어. 요즘 회사가 많이 바빴잖아.”

“아…….”

자연스러운 대답에 진겸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요즘 야근이 잦아서 같이 저녁을 못 먹을 때가 많았다.

이제는 밥솥도 사용할 줄 알아서 스스로 밥을 차려 먹고 있다. 그래도 매번 같이 먹다가 혼자 먹으려니 좀 쓸쓸하기는 했다.

둘이 붙어 있는 동안 양 비서가 다음 목적지를 정했다. 이제 이동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문제는 또 발생했다.

차는 두 대, 사람은 다섯.

양 비서는 어떻게 나눠서 타야 괜찮은지를 진지하게 고민했다.

“두 명, 세 명 나눠서 가는 게 낫겠지?”

“그게 좋겠죠. 제가 운전하고 형이랑 탁 이사님 모시고 가겠습니다. 양 비서님이 선 이사님이랑 같이 오시죠.”

“응? 얘기가 왜 그렇게 돼? 내가 아무리 선 이사랑 오래 알았다지만 단둘이 가는 건 불편해! 선 이사가 나 괴롭혀.”

물론 마지막 말은 수혁의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였다.

“저는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인 것 같은데요. 다 같이 이거 타려면…….”

누군가는 원범의 옆에 타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그렇다는 건.

“싫어! 그것도 싫어!”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저보고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아니면 양 비서님이 운전하실래요?”

차라리 양 비서가 운전하고 그 옆에 진겸을 앉히고 자신이 원범의 옆에 앉는 게 나았다.

제일 베스트는 원범을 수혁의 차에 태우는 거지만 당사자들이 그걸 허락할 리 없었다.

카페에서 마무리하고 나와도 되었을 텐데 다들 뙤약볕 아래 서 있어서 그런지 슬슬 불쾌지수도 올라오고 있었다.

잠시 원범과 회사 얘기를 하던 수혁이 기다리다 지쳐 끼어들었다.

“뭐 때문에 계속 속닥거리는데? 뭐가 문제야.”

“장소는 정했는데 어떻게 갈지 얘기 중이었어요.”

차 두 대로 가야 하니 어떻게 할지 의견을 물었다.

“그게 문제야? 이렇게 하면 되지.”

양 비서는 오랜만에 운전대를 잡았다. 넓은 차에는 혼자였다.

“그래…… 차라리 이게 편하지. 저기에 끼어 있었으면 숨 막혔을 거야. ……후.”

양 비서가 모는 검은 세단이 먼저 출발하고 남은 네 사람도 수혁의 차로 향했다.

수혁은 보조석 문을 열더니 진겸의 뒷자락을 잡았다.

“어어?”

당황한 진겸을 질질 끌고 가던 수혁은 그를 보조석에 욱여넣었다.

“둘은 알아서 타.”

문을 쾅 닫은 수혁이 운전석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진우는 튀어나오는 한숨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원범이 탈 수 있도록 뒷좌석 문을 열었다.

“타세요.”

원범이 타고, 반대쪽으로 넘어온 진우까지 탔다.

“어디로 가? 주소 불러 봐.”

수혁은 진우가 불러 주는 주소를 찍다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던 세 사람은 그제야 목적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1시간 30분? 가까운 곳 놔두고 왜 이렇게 멀리 가는데?”

회식은 원래 회사 근처에서 한 다음에 빠르게 해산하는 게 제일 좋은 법이다.

하지만 목적지는 멀었다. 막히는 구간도 있는지 빨간 선도 보였다.

“애도 아니고 무슨 월미도야.”

누가 회식 장소를 이딴 곳으로 잡냐는 듯한 투였다.

“아, 양원영. 이게 진짜.”

수혁은 작은 목소리로 짜증을 내고는 양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와. 월미도 재밌겠다! 요즘 회식은 그런 데도 가요?”

뚝. 옆에서 들리는 활기찬 목소리에 빠르게 종료 버튼을 눌렀다. 양 비서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지만 이번에도 빠르게 거절 버튼을 눌렀다.

“……어. 제가 너무 신났나요?”

세 사람 다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자 진겸이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었다. 그러자 진우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아니야. 나도 재밌을 것 같아.”

“…….”

여전히 진겸이 눈치를 보는 것 같아 수혁도 거들었다.

“요즘 회식은 그런 데 가. 1시간 30분이면 드라이브도 하고 좋지.”

수혁의 재빠른 태세 전환에 뒤에 있던 원범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그제야 진겸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수혁은 출발하기 전에 고개를 옆으로 돌려 진겸을 살폈다.

“차 많이 안 타 본 거 티 내네.”

진겸은 제 앞으로 스쳐 지나가는 팔에 순간 숨 쉬는 것을 잊었다. 수혁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 시야에 다 담기지 않았다.

뒤에 있던 진우의 몸과 손이 움찔 떨렸다. 수혁이 금방 떨어지지 않았다면 당장 그의 어깨를 잡아챘을 거다.

수혁은 뒤쪽은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했다.

“차에 타면 무조건 안전띠부터 매. 사고 나면 위험해.”

진겸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꽉 쥐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 겨우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항상 안전띠 매라고 말만 들었지, 누가 이렇게 직접 매 준 적은 처음이었다.

애초에 보조석에 타 본 게 수혁의 차와 지난번 진우가 운전했던 차가 전부였다.

순간 가까워진 탓에 당황스러웠다. 향수를 뿌린 건지 그 짧은 순간에 맡은 향이 아직도 콧속을 맴돌았다.

그러다 문득 진우가 떠올랐다. 그에게는 항상 자신과 같은 바디워시와 샴푸 향이 났다. 같은 집에서 같은 제품을 쓰니 당연한 거겠지.

게다가 백진겸은 제 피부를 어찌나 끔찍이 생각하는지, 화장품 종류가 너무 많아서 뭘 써야 할지 몰라 일일이 검색까지 해야 했었다.

지금은 귀찮아서 진우와 같이 올 인원 하나만 쓰고 있다. 같은 제품을 쓰지만 체향이 섞이면서 서로 다른 향이 났다.

진겸은 코를 킁킁거리며 차 안을 맴도는 향이 어떤 향인지 혼자서 알아맞히고 있었다.

월미도로 가는 차 안은 전과는 다르게 대화가 오갔다. 뒷좌석에 앉은 두 사람은 가끔 말할 뿐이었고, 대부분 진겸과 수혁의 목소리였다.

“와…… 그러면 여권을 팬티에 넣어야 해요?”

“당연하지. 그냥 가방에 넣으면 소매치기당하기 일쑤야. 여권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지 알지? 영영 한국으로 못 돌아와.”

“무서운 나라네……. 우리나라가 참 살기 좋아요. 그쵸?”

대부분 진겸을 놀리기 위해 하는 말이었다. 수혁은 농담과 진담을 섞어서 말했는데 진겸은 그걸 다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

가끔 너무 심하다 싶을 땐 진우가 아니라고 콕 집어 말해 주기도 했다. 진겸의 반응이 재밌어서 그냥 둔 것이 더 많았지만.

시답잖은, 하지만 서로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질 않은 드라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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