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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46)화 (46/92)

46화

시간이 꽤 흘렀다. 슬슬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

급한 건 끝냈지만 다 같이 자리를 비우면 무슨 일이 발생했을 때 바로 대응하기가 어렵다.

마음 같아서는 진겸이 끝날 때까지 있다가 같이 퇴근하고 싶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 사항일 뿐이다.

이제 가야 할 것 같다고 말하려는데 수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백 비서.”

“예. 이사님.”

“백진겸 일 안 시킨다고 하지 않았어?”

뜬금없는 말에 진우의 한쪽 눈이 아주 살짝 찌푸려졌다. 찰나였으나 이미 수혁이 본 뒤였다.

수혁은 항상 짓는 서글서글한 표정으로 진우를 응시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형이 원해서요. 제가 형한테 약한 거 아시잖습니까.”

“알긴 아는데…… 며칠 전에 그런 일을 겪게 해 놓고 이렇게 바로 일을 하게 둔다고?”

말속에 있는 날카로운 가시가 방심하고 있던 진우에게 훅 들어왔다.

원범이 나섰으니 수혁이 모를 리 없다고는 생각했다.

진우는 신경 쓰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그가 저런 말을 할 정도로 진겸과 가까운 사이도 아니다.

선을 넘는다는 생각이 팍 들었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게’ 했다는 말이 가슴에 콱 박혔다.

그가 하라고 한 것도 아니고 진겸 스스로 결정한 일이다. 그런데도 진우는 마음이 쓰였다.

다단계에 속아 물건을 산 것은 그냥 사회 경험 한번 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돈도 돌려받았으니 ‘예전에 이런 일도 겪어 봤지’ 하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사람에게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배신감을 느끼게 됐다는 거다.

진겸은 어쩌다 다단계 회사까지 가게 되었는지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진우가 집요하게 캐내려 했지만 계속 말을 돌리기에 잊고 싶은 것 같아 더는 묻지 않았다.

그 후로 더 이야기하지 않았다.

진우의 표정이 어두워지자 그새 롤을 다 먹고 냅킨으로 입 주변을 닦던 양 비서가 슬쩍 눈을 굴리며 나설지 말지 각을 쟀다.

진우는 엄지와 검지를 문지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집에 가만히 있는 것보단 나와서 뭐라도 하는 게 좋으니까요.”

내키지는 않아도 원하기에 그냥 두고 있다는 뉘앙스가 물씬 풍겼다. 특히 오늘 진겸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나니 생기가 넘치는 것 같아 보기 좋았다.

힘들지 않았으면 했는데 이 카페는 오피스 상권이라 바빠도 너무 바빴다.

지금도 진겸은 바쁘게 움직였다. 카운터에만 있는 게 아니라 행주를 들고 홀을 오가며 테이블도 닦고 셀프바도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수혁은 그 말에는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는 건 좋은데 낯선 사람 조심해야 한다고는 안 가르쳤어?”

“형이 앤 줄 아십니까?”

“저거 봐. 저게 아는 사람이 할 행동이야? 아까처럼 어깨를 만지면 뿌리쳐야 한다고 알려 줬어야지. 어제도 은근슬쩍 붙더만.”

“……예?”

어제 진겸에게서 그런 말은 듣지 못했다. 그렇다는 건 본인이 생각하기에 기분 나쁠 정도로 붙었다는 건 아니란 거였다.

진겸에게 관심을 보이는 수혁의 눈에는 과하게 보일 순 있을 터였다.

그렇다는 건…… 제 눈에도 과하게 느껴질 행동이었을 게 분명했다.

“얼마나 가까이 붙었는데요?”

진우는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수혁이 괜히 말을 꺼냈을 리 없다는 게 그의 결론이었다.

“팔끼리 붙을 정도였어. 저 넓은 바에서 굳이 그렇게 붙을 이유가 있을까? 알바 첫날이면 모를까 이미 일주일이 넘은 애 옆에?”

“……형이 불쾌해하지는 않았고요?”

“쟤가 그랬으면 내가 이런 말을 하겠어? 사람이면 다 좋아서 경계심 따윈 개껌이랑 같이 씹어 먹었는지 시골 똥개가 따로 없더라.”

비유가 너무 찰떡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진겸이 그렇게 반응한 건 아니었다. 스킨십에 큰 의미를 두고서 사람을 경계하거나 다급히 떨어지지는 않아도 선을 넘어오지 않게 어느 정도 거리는 두었다.

당사자가 없다고 당시의 상황이 날조되고 있었다.

진우는 어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 저녁에 진겸의 입으로 직접 듣는 게 나을 것 같아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은 다를 수 있죠. 시간이 늦었으니 이제 회사로 들어가시는 게 어떨까요?”

마지막 말은 수혁이 아닌 원범에게 한 말이었다.

카페에 들어와서 주문할 때 진겸과 몇 마디 나눈 것 말고는 원범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커피도 초반에 몇 모금 마신 게 다였다.

“백 비서.”

그런 원범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진우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듣고 있다는 것을 표현했다.

“성희롱이라는 건 당사자가 성희롱이라고 느끼면 성립이 돼.”

“……예, 알고 있습니다.”

“상대방이 한 번 거절했는데도 계속해서 만지는 것 또한 직장 내 성희롱으로 신고가 가능하지.”

그 말에 진우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어느새 셀프바를 정리하고 바 안으로 들어간 진겸의 옆에 또 하상일이 있었다. 멀리서 봐도 가까운 거리였다.

진우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도대체 저렇게 가까이 붙어서 알려 주어야 하는 일이 뭐길래.

하지만 세 사람이 유독 그런 시각으로 보는 거였지, 양 비서의 눈엔 직원들끼리 담소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양 비서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의자에 몸을 묻었다. 여기서 자신이 나서 봤자 괜히 저까지 세 사람에게 공공의 적으로 찍힐 게 뻔했다.

실제로 바 안에서는 진겸에게 에이드 만드는 법을 알려 주느라 옹기종기 모여 있던 거였다. 어차피 설거지는 식기세척기가 하기에 잠시 쌓아 두어도 괜찮았다.

사장은 진겸의 면접이 끝나고 하상일에게 새로운 아르바이트생을 뽑았다고 말하면서 카운터랑 홀 청소만 시키라고 했었다. 바 안에서 일하느라 얼굴이 제대로 안 보이는 건 뽑은 의미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하상일도 처음엔 그럴 생각이었다. 카페의 업무 강도가 높은 편인 탓인지, 오래 다니겠다던 아르바이트생 대부분이 막상 일 시작해서는 금방 그만두기 일쑤였다.

거기에 질려서 이번엔 딱 자르려 했는데, 자꾸만 슬쩍슬쩍 보며 음료 만드는 것에 관심을 두고 배우려는 의지가 가득한 진겸을 외면할 수 없었다.

즉, 하상일은 나름대로 진겸을 챙기고 있는 거였다.

그러던 와중에 하상일 손에 청이 묻었고, 닦으러 싱크대로 가려다 진겸과 부딪쳤다.

세게 부딪친 건 아니지만 에이드에 생긴 층을 보겠다고 무릎을 살짝 접고 있던 진겸이 중심을 잃고 그대로 기우뚱 옆으로 넘어지려 했다.

하상일이 서둘러 팔을 잡아 주어서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엉덩방아를 크게 찧을 뻔했다.

“어후. 놀랐네. 괜찮아?”

청이 묻은 손으로 팔을 잡았던 터라 흰 셔츠에 그대로 자국이 남아 버렸다.

“이리 와.”

하상일은 자기 때문에 묻은 거고 팔뚝이라 혼자 씻으려면 잘 안 보일까 봐 물을 묻혀 주려고 진겸을 데리고 싱크대 근처로 이동했다.

“조금만 숙여 봐.”

“제가 할게요.”

“잘 안 보이잖아. 노란 거라서 빨리 지우면 티 덜 날 거야.”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던 진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양 비서가 놀라 진우의 팔을 잡았다.

“뭐 어쩌려고? 그냥 닦아 주는 거잖아……!”

괜한 소란 피우지 말라며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진우가 일어날 때 밀려난 의자의 끌림 소리에 이미 시선이 집중되고 있었다.

“앉아, 앉아!”

팔을 당겨서 겨우 진우를 앉혔다. 그랬더니 이번엔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혁의 옷자락을 잡기엔 거리가 있어서 팔을 허공에 휘적거리기만 했다.

“이사님! 이사님도 제발 앉으세요……!”

그나마 넷 중에서 진겸에 대해서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양 비서뿐이었다.

진우는 진겸의 일이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움직였다. 양 비서도 그걸 알기에 잡은 팔을 놓지 않았다.

그때, 하상일이 진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싱크대가 반대편에 있다 보니 넷에겐 뒷모습밖에 보이질 않았다.

기어코 손이 진겸의 뺨에 닿았다.

양 비서는 ‘이젠 나도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손에 힘을 풀었다. 역시나 진우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바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수혁은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 지켜보기만 했다. 한결같이 똑같은 자세를 유지하던 원범의 다리도 어느샌가 풀려 있었다.

그걸 본 양 비서의 입에서는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바 앞으로 다가간 진우가 싱크대와 제일 가까운 반납대에 서서 손으로 매끈한 바 상단을 내리쳤다.

나무여도 큰 소리가 났을 텐데 심지어 바는 스테인리스로 제작이 되어 있어서 그 울림이 더 컸다. 층고가 높은 카페 전체로 큰 소리가 퍼져 나갔다.

아직도 팔에 묻은 청 자국을 지우기 위해 붙어 있었던 진겸과 하상일은 화들짝 놀라 어디서 난 소린지 진원지를 파악하기 위해 몸을 돌렸다.

“진우야……?”

“형, 괜찮아?”

진우는 자신이 내려쳤음에도 이렇게까지 크게 소리가 날 줄 몰랐기에 덩달아 놀랐다.

무엇보다 진겸이 너무 크게 놀란 것 같아 걱정이 앞섰다. 놀라게 할 의도는 아니었고 그저 뒤에 자신이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한 행동이었다.

소리가 크게 울리고 나서야 지금 한 행동이 진겸에게 좋지 않았으리란 걸 깨달았다.

진우는 당장이라도 바를 넘어가 진겸을 살피고 싶었다.

“어? 어…….”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지 진겸은 대답을 얼버무렸다.

“손님.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하상일이 나서서 말하자 진겸이 그의 팔을 잡았다.

“죄송해요. 제 동생이 저한테 뭐 할 말이 있었나 봐요. 저…… 잠시만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진겸은 서둘러 바에서 나와 직원들에게 사과하는 진우를 지나쳐 화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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