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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45)화 (45/92)

45화

진우는 눈을 살짝 찌푸리기만 할 뿐 대답하진 않았다. 딱히 대화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다시 시선을 옮겼다.

처음에 카페에서 일한다고 했을 때부터 와 보고 싶었다. 일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통 시간이 나질 않았다. 둘 다 평일에 일하다 보니 짬을 내기 힘들었는데 이렇게라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불청객들과 같이 올 게 아니라 혼자 왔다면 더 좋았겠지만.

‘잘하네.’

아무리 진겸이 기억을 잃고 성격이 유해졌다곤 하나, 서비스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계속 손님들과 마주해야 하는 직업이기 때문에 힘들어할 줄 알았다.

그래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히 잘 적응하고 있는 듯했다.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어서 제대로 살피진 못했지만 괜찮아 보였다.

“형이 걱정돼?”

“조금요.”

양 비서의 물음에 진우가 쓰게 웃었다.

“그래? 내 눈엔 잘하는 것 같은데.”

“제가 보기에도 그래요. 그래도 걱정이 되네요.”

진겸을 바라보는 짙은 밤색 눈동자에는 따스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보듯 불안해하면서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 있었다.

양 비서가 묘한 얼굴로 진우의 옆얼굴을 바라봤다.

‘이런 얼굴도 할 줄 아네.’

항상 무표정한 얼굴이 사르르 풀리는 순간은 백진겸에게 연락이 올 때뿐이라는 걸 양 비서도 알고 있었다.

결코 좋은 일로 연락하는 게 아닌데도 즉각 반응했으니까.

몇 번 메시지를 주고받으면 이내 다시 표정이 사라졌지만. 어쨌든 백진우는 오로지 백진겸에게만 반응했다. 그게 참 이상하면서도 안쓰럽게 느껴졌다.

감정이 없는 건 아닌데 스스로 행복해지려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의식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듯했다. 그걸 보면서 ‘참 힘들게 사는구나’라고 생각했었다.

진우가 비서로 들어오기 전에 한차례 가벼운 뒷조사를 했다. 그땐 깊게 파고들지 않았었다. 하지만 계속된 진우의 헌신을 보고 있자면 무언가 더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그러던 중 우연히 진우의 핸드폰 배경 화면을 본 적이 있다.

새하얀 손끝에 들린 누군가의 증명사진.

자세히 보지는 못했지만 사진의 주인공은 안 봐도 뻔했다. 그래서 굳이 묻지 않았다.

그런 진우가 요즘엔 달라졌다.

‘많이 웃지.’

전보다 편해 보였다. 핸드폰을 보고 웃는 일도 잦아졌다.

가뜩이나 팍팍한 진우의 삶에 그나마 활기가 도는 것 같아서 보기 좋았다.

양 비서는 저도 모르게 흐뭇하게 웃으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진겸이 추천해 준 건데 입맛에 잘 맞았다. 다시 잔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드는데…….

‘난리 났네.’

앞에 있는 두 남자의 시선도 진우와 같은 곳을 향하고 있었다. 아예 몸까지 틀어 앉아 있는 모양새도 똑같았다.

둘 다 기다란 다리를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까지 쭉 뻗고 있었다. 그곳을 지나가려는 사람들은 멈칫거리다가 돌아가기에 이르렀다.

양 비서는 신경 쓰지 않고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려 하는데 귓가에 박히는 짜증 섞인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야 했다.

“……뭐야, 저 새낀.”

읊조리듯 튀어나온 목소리의 주인공은 진우였다.

진우는 의자 팔걸이에 올려놓았던 손에 힘을 줬다.

무슨 일인가 싶어 진겸이 있는 쪽을 봤다. 그는 잠시 한적한 틈을 타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 옆에 동료로 보이는 남자 한 명이 서 있었는데, 진우가 그걸 보고 눈꼬리를 치켜세운 거였다.

양 비서는 참으로 중증이라 생각하며 다시 고개를 돌렸다가 저도 모르게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원범의 눈이야 원래부터가 날카로웠기에 정말 그가 기분 좋을 때 아니면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편이다.

그가 조금이라도 미간을 찌푸릴 때면 서둘러 이사실을 빠져나가고 싶어질 정도니까.

그런 원범의 눈빛에서 은은한 살기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냥 쳐다보는 게 아니라 눈에 힘이 들어갔다는 게 느껴졌다.

게다가 웬만하면 인상을 찌푸리거나 굳히는 일이 없는 수혁까지 묘하게 기분이 나빠 보였다.

양 비서가 고개를 돌려 진겸을 봤을 때, 옆으로 다가간 남자가 그의 어깨를 만졌다. 그것 때문에 지금 세 사람이 흉흉하게 변한 거였다.

‘어깨 한 번 만진 거로 사람 죽이진 맙시다들.’

속으로 남자의 명복을 빌어 주며 남은 커피를 들이마셨다.

하지만 양 비서의 바람과는 달리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다.

진겸이 산처럼 쌓인 영수증을 정리하는 사이 옆으로 다가온 하상일이 양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물었다.

“고생했어. 에이드라도 마실래?”

놀란 진겸이 흠칫 어깨를 떨더니 손을 피해 슬쩍 옆으로 비켜났다. 하상일도 그가 피한다는 걸 느끼고는 머쓱해하며 이내 손을 아래로 내렸다.

“괜찮아요. 저는 물 마실게요.”

“그래. 근데 요새 계속 긴팔만 입네. 안 더워?”

“저번에 반팔 입으니까 에어컨 바람이 바로 와서 춥더라고요.”

“하긴, 에어컨 방향이 이쪽이라서 춥긴 하겠다. 안에 카디건 있어. 너무 추우면 그거 입어.”

“네. 감사합니다. 추우면 입을게요.”

진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내 다시 주변 정리를 시작했다.

하상일은 가만히 서 있다가 아까 진겸과 대화를 나눴던 네 사람이 모인 테이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쪽을 보고 있던 건지 세 사람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이내 영업용 미소를 띠곤 가볍게 고개 인사를 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인사는 없었다.

뻘쭘해진 그는 바닥에 쭈그려 앉아 카운터 서랍장에서 영수증 용지를 꺼내는 진겸의 어깨를 손끝으로 툭 건드렸다.

“진겸아.”

“예?”

“아까 그분들…… 친구야?”

“아뇨. 친구라기보다는…… 아는 사람?”

“우유 크림 롤 하나 가져다드리고 인사라도 하고 와.”

점심 피크 타임이 끝나기도 했고 계속 손님이 오기는 해도 잠깐 정도는 괜찮았다. 생각지도 못한 배려에 진겸이 놀라 정말 그래도 되냐고 되물었다.

“대신 오래 있진 말고.”

“네!”

진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서둘러 영수증 포스기 뒤쪽에 놓았다.

그사이 우유 크림 롤을 꺼내 접시와 포크까지 쟁반에 챙겨 주자 진겸은 활짝 웃으며 감사 인사를 하고는 다급한 발걸음으로 네 사람에게 다가갔다.

덩치 있는 네 사람이 정장을 잘 차려입고 옹기종기 모여 커피를 마시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를 위압감이 들었다. 진겸은 애써 주눅이 드는 기분을 떨쳐 내며 걸음을 옮겼다.

진우는 다가오는 진겸을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모습에 진겸이 놀라 빠르게 물었다.

“왜? 벌써 가려고?”

“아니. 형 앉으라고.”

“괜찮아. 너 앉아. 난 금방 가야 해.”

진겸은 테이블 위에 들고 온 쟁반을 내려놓고는 진우의 팔을 당겨 다시 앉혔다. 그러고는 아까 제대로 인사를 못 했던 양 비서에게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 진우 형, 백진겸이라고 합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 드린 것 같아서요.”

“반갑습니다. 전 진우 씨 직장 동료인 양원영입니다.”

“우리 진우 잘 부탁드려요.”

“워낙 알아서 잘하는 친구라 제가 뭘 도울 게 없네요.”

뭔가 교과서적인 대답이 오갔다. 하지만 진겸의 얼굴엔 만족감이 그득 차올랐다. 항상 원범과 수혁만 보다가 직장 동료를 보니 반가웠다.

알아서 잘하고 있다는 말에 뿌듯해진 진겸의 어깨가 올라갔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진우의 정장을 의미 없이 톡톡 털었다.

“두 분은 커피 안 드셨네요. 별로였어요?”

원범의 잔은 거의 그대로였고 수혁의 앞에 놓인 잔도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원범은 처음 자리에 앉았던 그 자세 그대로였다. 습관처럼 꼰 다리와 팔걸이에 걸친 팔. 한쪽으로 계속 다리를 꼬고 있으면 저리던데 멀쩡한 모양이다.

진겸은 진우와 양 비서의 잔도 확인했다. 비어 있었다. 나름 고심해서 추천한 원두였는데 두 이사님에겐 별로였던 모양이다.

진겸의 눈썹 끝이 내려가는 걸 본 수혁이 서둘러 잔을 쥐었다.

“맛있어. 음미하면서 천천히 마시는 중이야. 근데…… 아까 네 옆에 있던 남자.”

수혁이 입을 열자 진우의 눈빛이 변했다. 자신도 물어보려고 했던 거였다.

“누구야? 사장? 직원?”

“아니요. 매니저예요. 그래서 이것도 주신 거예요. 이거 잘나가요. 이것만 포장하러 오는 손님도 있을 정도예요.”

진겸은 자신도 지난번에 먹어 봤다면서 정말 맛있다고 두 번이나 강조했다. 원하는 대답은 아니었지만 그 이상의 대답이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이제 가 봐야겠어요. 진우야, 맛있게 먹고 이따가 집에서 봐.”

“응. 다치지 말고.”

“알겠어. 커피 맛있게 드세요.”

인사하고 오라고 했으니 너무 오래 있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서둘러 카운터로 복귀했다.

진겸이 돌아간 뒤 테이블엔 정적이 내려앉았다. 진우도 언제 웃었냐는 듯이 표정을 굳혔다.

테이블 위에는 진겸이 두고 간 우유 크림 롤이 처음 그대로의 모양을 유지한 채 방치되었다. 그 누구도 먼저 손을 뻗지 않았다.

하지만 포크를 든 이가 있었으니 바로 양 비서였다.

“다들 안 드세요?”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그는 매끄러운 빵 위로 무자비하게 포크를 꽂아 넣었다. 눌리는 힘에 양옆으로 삐져나오는 크림의 양이 상당했다.

접시가 순식간에 지저분해졌다. 원래 깔끔하게 먹는 게 힘든 크림 롤이라지만 거침없는 손길에 더욱 엉망으로 변해 갔다. 하지만 맛은 훌륭했다.

“맛있네. 진짜 안 드세요? 백 비서, 안 먹어?”

“……많이 드세요. 입 좀 닦으시고요.”

“다 먹고 한 번에 닦으면 돼. 그럼 이거 저 혼자 다 먹습니다?”

반응 없는 두 명의 이사를 힐끔거린 양 비서는 접시째 들고 먹기 시작했다. 입에 맞는 모양이었다.

진우는 이걸 준 사람이 아까 진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사람이라는 사실에 손이 가질 않았다.

아예 안 먹고 그냥 버리고 싶었지만 그건 예의가 아니었기에 양 비서가 먹게 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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