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진동벨을 받고 서 있는데, 때마침 카운터가 보이는 곳에 자리가 나서 앉았다.
양 비서는 열심히 일하는 진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기억 상실증이라는 게…… 저렇게까지 사람을 확 바꿔 놓기도 하는 거야?”
“글쎄요. 저도 처음이라서요.”
“하긴…… 나도 드라마나 영화에서만 봤지. 실제론 처음 봐.”
기억을 잃은 척하는 사람은 봤어도 실제로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은 처음이었다.
양 비서는 굉장히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진겸을 관찰했다. 기억을 잃기 전에 본 미간을 찌푸리던 모습과 달리 웃고 있으니 더 순하고 어려 보였다.
“저 얼굴 그냥 썩히기 아깝지 않아? 아까 어떤 사람이 연예인 하라고 하던데 그쪽으로 나갈 생각은 없대?”
진우가 보기에도 진겸의 외모가 잘난 건 맞다. 하지만 저 몸으로 연예계 생활은 무리였다. 빡빡한 스케줄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글쎄요. 형은 생각 없는 것 같더라고요.”
어떤 일이든 본인 의지가 제일 중요한 법이다. 두 형제는 상당히 많은 러브콜을 받았다. 하지만 둘 중 그 누구도 연예계에 발을 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진우는 자신이 연예인이 된다면, 그럼 어쩌면 더 빨리 빚을 갚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연예인이 되는 순간부터는 진겸과 내내 함께 있을 수 없으니까. 처음부터 선택지에 두지 않았다.
차라리 둘이 같이 데뷔할 수만 있다면 좋겠지만 백진겸의 몸이 버티질 못한다는 걸 알기에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정말 연예인이 되고 싶다고 했다면 진우는 걱정하면서도 매니저를 자처했을지도 모른다.
“왜? 기획사에서 무지 쫓아다니지 않았어? 솔직히 백 비서, 너도 똑같아. 그 얼굴로 비서 하기엔 너무 아깝지. 지금이라도 배우로 데뷔하는 게 어때? 비서 월급보다 훨씬 많이 벌걸?”
“저는 지금이 좋아요.”
“월급쟁이가 좋긴 무슨. 아, 이사님. 방금 한 말은 잊어 주세요. 순도 백 프로 진심은 아니고 아주 조금 섞였어요.”
양 비서는 순간 느낀 오싹한 시선에 익살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진우와 마주 보고 앉느라 자신과는 대각선상에 있는 원범의 시선이 너무 따가웠다.
“그냥 물어본 것뿐이라고요…….”
“그 입, 뜯기고 싶지 않으면 간수 잘하라고 했을 텐데.”
“헙.”
양 비서가 두 손으로 입을 막으며 과장되게 놀란 소리를 냈다. 그제야 원범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양 비서는 진우에게 가까이 붙어 귓가에 속삭였다.
“아까 한 말 진심이야.”
진우가 돌아보자 양 비서가 코를 찡긋거리고는 바르게 앉았다.
확실히 양 비서도 특이했다. 입에 필터가 탑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이다.
원범의 매서운 눈초리에도 할 말은 대부분 하는 편이다. 그러면서도 선을 지켰다.
그게 진우의 눈에는 신기했다.
원범이 외국에 있을 때부터 같이 지냈다던 양 비서는 수혁과도 아는 사이였다. 셋이 같은 학교에 다녔다고 들었다.
어떻게 친해졌는지 저번에 얼핏 듣긴 했는데 술자리에서 나온 얘기라 머릿속에 남지는 않았다.
진우는 중요하지 않은 건 제쳐 두고 고개를 돌렸다.
진겸이 일하는 모습을 빤히 보고 있자니 괜스레 손끝이 간지러웠다.
‘잘 웃네.’
기억을 잃은 진겸은 감정 표현이 다채로웠다. 울다가 웃다가 또 시무룩해졌다가도 금방 힘을 냈다. 찌푸리는 일은 적었고 항상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지금도 손님들을 향해 웃고 있다.
‘……너무 웃는 거 아니야?’
그토록 보고 싶었던 얼굴을 아무에게나 보여 주고 있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웃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진우는 주먹을 쥔 채 엄지로 검지를 문질렀다. 긴장한 것도 아닌데 무의식적으로 그러고 있었다.
‘방금 손 닿았던 것 같은데?’
카드와 진동벨을 주는 과정에서 손님과 살짝 손이 닿았는데 진우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고 시야에 담았다.
카운터 바로 앞쪽에 앉은 것도 아니고 거리가 좀 있는데도 그게 보였다.
진우는 혹시 모를 이상한 날파리가 꼬이지 않는지 매의 눈으로 계속 지켜봤다.
진겸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고개를 돌리다가 눈이 마주치면 방긋 웃어 주곤 했다. 이곳에 진우가 왔다는 사실에 더 잘하는 모습을 보여 주려 애썼다.
그렇게 다시 일에 집중하는데…….
“안녕. 오늘도 왔어.”
“………진짜 안 바쁘세요?”
어제도 왔던 수혁이 오늘도 왔다. 아까 세 사람이 들어왔을 때도 이목이 쏠렸는데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진겸은 이걸 좋아해야 하나 어쩌나, 얕은 고민에 빠졌다.
“응. 말했잖아. 바쁜 거 끝났다고.”
수혁은 앉을 자리가 있나 쭉 둘러보다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쟤들이 왜 여기에 있어?’
그 생각은 세 사람도 똑같이 하고 있었다.
양 비서는 커피를 입에 머금었다가 서둘러 목구멍으로 넘겼다. 맛과 향을 음미할 새도 없었다.
“선 이사…… 맞지?”
“……예. 그러네요.”
“여기 우리 회사에 커피 맛집이라고 소문났어?”
커피를 좋아하면 일부러 찾아와서 마실 수 있다지만, 회사에서 차를 타고 와야 할 정도로 거리가 꽤 있었다. 그런데 점심시간이 지나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커피를 마신다는 건 양 비서가 생각해도 좀 이해가 되질 않는 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선 이사야 워낙 이상한 사람이니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의외였던 건 자신의 상사, 탁 이사였다. 여기 오자고 했을 때도 어딜 가는 건지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회사로 가면 일해야 하니까 최대한 밖에 있다가 들어가고 싶어서 입 다물고 있었다. 그러다가 진우처럼 목적지를 보고 나서야 어딜 가는지 알았다.
사실 탁 이사의 지시로 진겸의 일거수일투족은 전부 이청오 손에 들어가고 있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누굴 만나는지, 또 이상한 일을 하고 있진 않은지.
양 비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진우가 알면 난리가 날 일이라 그에게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요즘 한창 바빴던 터라 회식하자는 말이 내심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그게 회식을 빙자한 ‘백진겸 보기’일 줄이야.
사람 많은 곳 싫어하는 양반이 카페에 가자고 하질 않나. 요즘 따라 낯선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선 이사까지 등장한 거였다.
양 비서가 지금 벌어진 상황에 황당해하는 동안, 진우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작정하고 왔네.’
왁스로 올린 머리와 깔끔한 정장까지.
수혁은 어제보다 더 꾸민 모습으로 왔다.
“혹시 여기서 선 이사 만나기로 하셨어요?”
“아니.”
진우의 물음에 원범이 단호히 대답했다. 볼일이 있으면 회사에서 해결하지 굳이 밖에서 따로 볼 필요는 없었다.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수혁의 등장은 원범에게도 의외였다. 어제 왔다고 들었는데 오늘도 왔다는 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수혁이 가진 호기심의 크기가 크다는 거니까.
“형이 인기 많아서 좋겠어.”
“거기에 한몫하고 계신 거 아시죠?”
진우의 가시 돋친 말에 원범은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양 비서가 슬쩍 눈치를 보기는 했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진우가 자신에게는 안 그래도 남에게는 좀 까칠한 면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그런지 별 느낌은 없었다.
지금은 선 이사까지 이곳에 온 이유가 더 궁금했다.
‘전부 한 사람을 보러 왔다라…….’
도대체 변해 버린 진겸의 매력이 무엇이길래 이 세 남자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걸까?
진우야 원래부터 백진겸을 위해 사는 사람이었다지만 탁 이사와 선 이사는 아니었다.
오랜 시간 옆에서 지켜본 양 비서의 촉이 이리저리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쪽을 보고 있는 선 이사와 진겸이 그의 호기심을 극도로 자극하고 있었다.
수혁은 황당하다는 기색을 감추지 않으면서도 카드를 내밀어 주문하는 것은 잊지 않았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줘.”
“오늘은 드립 커피 어떠세요? 다들 드립 드셨는데.”
“오래 걸리잖아.”
“어차피 금방 가실 거 아니시잖아요.”
내 말이 틀리냐는 듯이 올려다보는 진겸의 촉촉한 눈동자에 수혁의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그럼 알바생이 추천하는 걸로 먹을게.”
“네!”
진겸은 원범에게 추천했던 것과 같은 걸로 골랐다.
“여기 카드 받으세요.”
“오늘은 왜 안 사 줘?”
“어제 사 드렸잖아요. 전 알바생이라고요. 뒤에 손님 계시니까 이제 비켜 주세요.”
주문이 끝났으니 가라는 매정한 말이었다. 그에 수혁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생겼다.
전에는 말도 골라서 하는 것 같더니 이젠 대놓고 비키란다. 고작 저 한마디에 자신과 진겸의 거리가 좁혀진 듯해 기분이 좋아졌다.
‘귀엽긴.’
뭐, 나쁘지 않은 발전이다.
수혁은 카드를 다시 집어넣으며 걸음을 옮겼다. 앉을 자리라곤 세 사람이 있는 테이블뿐이었다.
다행히 4인 테이블이라 의자 하나가 남았다. 그것도 덩치가 큰 원범의 옆이다.
수혁은 마치 일행인 것처럼 다가가 능청스레 말을 걸었다.
“이야. 회사에서도 보는 얼굴들 밖에서도 보니까 반갑네.”
이미 멀리서 서로를 봤을 때 진우와 양 비서와는 묵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래도 직급이 높은 수혁이 다가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아, 앉아. 뭐 여기까지 와서 그런 격식을 차리고 그래. 부담스럽게.”
수혁은 자연스럽게 원범의 옆에 앉았다.
네 사람이 한 테이블에 모이자 매장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다. 따가울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다들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오늘 무슨 날이야?”
“회식이었습니다.”
“회식을 카페에서 하다니 신선하네. 우리 팀 회식 때도 여기 와야겠다.”
순수한 의미가 아니라는 게 느껴지는 뉘앙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