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원범은 HMTM마케팅을 어떤 식으로 처리했는지 전화로 보고받았다.
다단계 회사와 법적으로는 별개인 회사여서 내버려 둘까 하다가 본보기로 그냥 쓸어버렸다.
“잘 마무리했으면 됐어. 같이 일했다던 놈도 정리하고.”
― 예. 깔끔하게 해결했습니다.
이청오와 통화를 하는 동안 바빠서 잠시 잊고 있었던 진겸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의자 팔걸이를 검지로 톡톡 쳤다.
마지막 모습이 너무 황당해서 계속 뇌리에 남았다.
냉수 먹고 싶다고 했더니 마트에서 생수를 사다 줬었다.
예전의 백진겸이라면 이때다 싶어 집으로 자신을 끌어들이려 했을 게 뻔했다. 생수를 사다 주는 일차원적인 행동 같은 건 절대 하지 않았겠지.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사람이 이렇게까지 변할 수가 있나 싶다.
보통 본성은 그대로이기 마련인데 그런 게 전혀 없었다. 다단계에 속은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앞으로 또 어떤 엉뚱한 모습을 보여 줄지 작은 기대감까지 생겼다.
잠시 다른 생각을 하던 원범을 현실로 끄집어낸 건 이청오였다.
― 말씀드릴 게 하나 더 있습니다. 어제 선 이사가 왔다 갔습니다.
“알아. 자금 건 때문이잖아.”
― 그것도 있었는데 백진겸 씨 일하는 곳을 물어봐서 알려 줬습니다. 어제 찾아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선 이사가?”
― 예.
원범은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추고 의자에 몸을 묻었다.
최근 바빴던 일이 끝나서 잠시 한숨 돌리려던 참이다. 무표정하던 얼굴에 미세한 변화가 생겼다.
“백진겸 일하는 곳, 나한테도 보내.”
점심이 되자 양 비서가 먼저 먹는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서가 둘이다 보니 원범과 다 같이 먹을 때가 아니면 웬만해선 한 명은 사무실을 지킨다. 오늘은 진우 차례였다.
양 비서가 막 나가려는데 이사실 문이 열렸다.
“오늘 회식하지.”
“……예?”
사전 공지 없는 너무 갑작스러운 회식이었다.
“일주일 동안 고생했잖아. 일 끝났으니까 회식해야지. 나와.”
두 사람에게 선택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점심 약속이 없어서 다행이었지. 만약에 있었으면 당일 취소로 욕먹을 뻔했다.
세 사람이 향한 곳은 지하 주차장이다. 가까운 곳이면 걸어갈 텐데 원범이 고른 곳은 차를 타고 가야 했다.
대체로 직장인들의 회식이라면 저녁에 하지만, 그들은 항상 점심에 했다.
퇴근하고서도 양 비서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원범의 강한 의지에서 비롯된 거였다.
양 비서는 오래간만에 하는 회식이라서 들떠 있었다. 최근 계속 바쁘긴 했다. 회사일 뿐만 아니라 원범의 개인적인 일도 처리해야 했기에 더 정신이 없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양 비서의 머릿속엔 온갖 회식 메뉴가 둥둥 떠다녔다. 원범이 고생했다고 말했으니 비싸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갈 거란 기대감에 차올랐다.
원범이 통화하는 틈을 타 진우에게 물었다.
“이사님이 어디로 가라고 하셨어?”
“정이각이요.”
“또?”
“항상 거기서 드시잖아요.”
“회식이라고 해서 다른 거 먹는 줄 알았는데!”
양 비서가 김샜다는 듯 입술을 푸르르 털었다.
정이각은 회사에서 그나마 가까운 한정식집이다. 지난 회식 때도 그곳에 갔다. 음식이 정갈하고 맛있긴 해도 너무 자주 가면 질리는 법이다.
다른 부서는 고급 고깃집이나 레스토랑 혹은 바에 간다는데, 우리는 왜 항상 한정식이냐며 양 비서가 투덜거렸다.
“내가 계속 초밥 먹고 싶다고 그랬잖아. 어떻게 한 번을 안 들어주지? 초밥이 비싼 것도 아니고!”
“회 별로 안 좋아하시잖아요?”
“회랑 초밥이랑은 다르지.”
그냥 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 아닌가? 도대체 그 밖에 무슨 차이가 있다는 건지.
진우는 더 물어보려다 말았다. 탁 이사와 함께 일하면서 알게 된 거지만, 그의 주변에는 제정신인 사람이 없었다.
그나마 양 비서는 정상 범주에서 살짝만 빗겨 난 사람이었다.
원범까지 오자 세 사람은 정이각으로 향했다.
양 비서는 밥을 먹는 동안 원범의 눈치를 보면서도 툴툴거렸다. 다음에는 꼭 다른 걸 먹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원래부터 말수가 적은 원범은 내내 조용했고, 진우만이 가끔 대답할 뿐이었다. 그렇게 식사가 마무리되었다.
“회사로 바로 가실 거죠?”
“아니. 들를 데가 있어.”
오늘 외근 일정은 없었다. 있었다면 두 비서가 모를 리 없었을 터였다.
진우와 양 비서는 눈짓으로 아는 거 있냐며 물었지만 둘 다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제가 다녀올게요. 양 비서님 먼저 들어가세요.”
“역시! 우리 백 비서. 듬직하다!”
양 비서는 정말 기뻐하며 말했다. 하지만 회사로 가려던 발걸음을 다시 돌려야 했다.
“회식이란 말 잊었어? 다 같이 움직여.”
“예…….”
진우는 도대체 자신이 이 시간에 왜 이 목적지로 운전해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 원범이 어떻게 여기를 아는 건지. 정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처음 내비게이션에 상호를 입력할 때 왠지 익숙하다고는 생각했다. 그러다가 주소를 보고 나서 이곳이 어디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진우는 짧게 혀를 찼다.
점심시간이라 카페도 바쁜 시간일 게 뻔했다. 적당히 해 줬으면 좋겠는데 두 이사의 관심은 좀처럼 사그라질 줄을 몰랐다.
순순히 따르자니 원범과 진겸의 접점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출발 전에 에둘러 가지 말자는 뜻을 전하기는 했다.
“점심시간이라 차도 막힐 거고 다른 가까운 카페도 많으니, 그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하지만 원범은 단호했다.
“거기 드립 커피가 맛있대.”
“언제부터 커피를 드셨다고요.”
“오늘부터.”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제 손으로 원범을 데리고 진겸에게 가는 중이다.
그 시각, 진겸은 정말 정신없이 일하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소문이 더 나기라도 한 모양인지, 어제보다 손님이 더 많다고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었다.
직장인들이 아니라 손님 나이대가 조금 어려지자 스무디나 에이드류가 많이 나가서 덩달아 직원들도 재료를 그때그때 채워 가며 바삐 움직여야 했다.
손님이 오면 인사를 해야 하는데 주문을 받느라 그럴 정신도 없었다.
주문만 하면 빨리 끝날 텐데 이것저것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보니 줄이 밀리기도 했다.
메뉴에 관해 물어보는 건 괜찮다. 그건 어디까지나 손님으로서 충분히 물어볼 수 있는 거니까.
다만, 개인적인 질문은 참 곤란했다.
“연예인 아니에요?”
“아니에요.”
“왜요? 연예인 할 생각 없어요?”
“네. 없어요. 주문 끝나셨으면 다음 분 주문 받아도 될까요?”
진겸은 최대한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웃어서 입꼬리가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손님은 툴툴거리면서 진동벨을 받고 갔고 진겸은 주문지를 뒤쪽으로 넘기고서 다시 앞을 봤다.
“어?”
진겸은 제 앞에 선 남자를 보고는 화들짝 놀라 숨을 흡 들이켰다. 놀란 것도 잠시였다.
“진우야!”
이를 전부 내보이며 눈꼬리를 곱게 휘고는 함박웃음을 지었다.
“뭐야? 여긴 어떻게 왔어?”
“회식 중이야. 사람 되게 많네. 커피 맛있나 봐.”
“응. 드립 커피 맛있어. 그거 먹어. 바로 가야 해?”
진우가 힐끗 원범을 봤다.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원범이 회사로 가자고 하면 테이크아웃하는 거고, 아니면 마시고 가고. 그런데 테이블이 꽉 차서 앉을 곳도 없어 보였다.
진겸의 시선이 진우에게만 고정되어 있자 원범이 슬쩍 목소리를 냈다.
“난 안 보이나 봐.”
진우를 보며 지은 함박웃음을 담은 진겸의 얼굴이 그대로 원범을 향했다. 주변 사람들보다 더 위로 올라간 원범이 안 보일 리 없었다.
“아니에요. 이사님, 안녕하세요!”
진겸이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지 않았는데도 눈을 바라볼 수 있었다.
전에 회사 앞에서 인사했을 때와는 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조금 무서웠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어.”
원범은 항상 자신만 보면 진우의 뒤로 숨거나, 시선을 피하던 진겸이 눈을 똑바로 뜨고 자신을 바라보자 묘한 느낌을 받았다.
다단계 이후로 조금은 자신이 편해진 모양이다.
“잘 오셨어요. 우리 커피 맛있어요!”
진겸은 영업이라도 하듯 주력 메뉴가 뭔지 줄줄이 읊었다. 사실 주문만 받으면 끝나는 건데 조금이라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그런 거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들이 몰린 탓에 실수할까 봐 긴장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던 중 익숙한 얼굴들을 보자 마음이 탁 놓였다. 일터에서 보니 더 반가웠다.
“일 재밌나 보네.”
“네! 재밌어요.”
고개를 끄덕이는 모양새가 진심인 듯 보였다.
애당초 원범이 이곳에 온 목적은 커피가 아니었다. 그냥 진겸의 새로운 일자리가 궁금했을 뿐이다.
양 비서에게 말해 자리 하나를 마련해 놨는데 아직 진겸에게 오라는 말은 못 했다.
진겸이 두 사람 뒤를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 뒤에 손님이 밀려서 얘기는 길게 못 할 것 같아요. 뭐 드릴까요? 진우야, 뭐 먹을래?”
여기까지 온 진우를 이대로 보내야 한다는 게 아쉽지만, 지금은 엄연히 근무 시간이었다.
진겸은 드립 커피를 추천해 주면서 가만히 서 있던 양 비서와도 인사했다.
양 비서는 예전에 회사로 찾아온 백진겸을 본 적이 있었다. 다만 진겸이 기억을 잃고 나서는 처음이다.
‘기억 상실증이라더니. 정말 다르네.’
예전에 회사로 온 그는 꽤 신경질적이었다. 물론 진우에게만 그랬다.
자신이 보고 있자 더는 짜증을 내지 않았지만, 진우가 안절부절못하는 게 눈에 빤히 보였다.
남의 가족사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서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누가 봐도 우애 좋은 형제는 아니었다.
그때를 떠올린 양 비서는 너무도 확 바뀐 진겸의 모습에 마주 웃어 주는 것으로 인사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