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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42)화 (42/92)

42화

수혁은 피곤해 보이는 진겸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건강해 보이진 않았지만, 요새 잘 먹는 건지 전보다는 혈색이 나아진 듯했다.

그렇다고 만나자마자 각자의 길을 가자고 할 줄이야. 연락이 안 돼서 왔다는 말을 까맣게 잊은 모양이다.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여기서 버스 타면 금방이에요.”

“가면서 얘기 좀 하자. 우리 오랜만에 봤는데 너무 매정한 거 아니야?”

그 말에 마지못해 수혁의 차 조수석에 또다시 몸을 집어넣었다.

이번엔 내비게이션 목적지가 정확했다.

“나도 양치질 잘하는데.”

“네?”

“하루 세 번. 꼬박꼬박하거든.”

뜬금없이 양치질이라니. 진겸은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살짝 눈치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잘……하셨어요?”

“뭐?”

별안간 수혁의 웃음보가 터졌다.

보는 사람도 따라 웃게 할 정도로 시원한 웃음이었다. 그도 이렇게 웃을 수 있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항상 미소만 짓던 사람이 소리 내어 웃자 뭔가 묘했다. 새로운 모습을 엿본 기분이다.

하지만 칭찬한 건 그를 웃게 하려던 게 아니었다. 이게 아닌가? 아무렴 어때.

계속되는 수혁의 웃음에 진겸도 덩달아 따라 웃었다. 소리를 내지는 않아도 광대가 올라갈 정도로 활짝 웃기는 했다.

그러다가 웃음기 가득한 수혁의 한마디에 표정을 굳히고 콧잔등을 잔뜩 찌푸렸다.

“치약. 나도 사 줄 수 있었다고.”

“안 팔아요!”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놀리는 투도, 내용도 똑같다.

이제 잊고 살려고 했더니 다시금 일깨워 주는 바람에 또 생각나 버렸다. 혼자 씩씩거리며 분을 삭이는데도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러다가 궁금한 게 하나 생겼다.

“……혹시 탁 이사님 다단계 시작했어요?”

조금 전만 해도 씩씩거리며 얼굴을 구기고 있던 진겸이 소리를 낮춰 굉장히 조심스레 물었다.

그 질문에 웃음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그게 왜 궁금한데?”

수혁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청오의 사무실에 가지 않았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 채 그게 무슨 소리냐고 되물었을 거다.

세 사람 중 그 누구도 자신에게 이 일에 대해 알려 줄 의무는 없다. 하지만 괜히 자기만 빠진 것 같아 아쉬웠다.

이런 재미난 일을 또 어디서 겪어 보겠어. 다단계라니.

수혁이 아쉬움에 짧게 혀를 차자 진겸은 그걸 다른 의미로 받아들였다.

“했어요? 결국 한 거예요?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기어코 다단계에 빠진 모양이다. 당시 5천만 원을 그 자리에서 입금했던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진겸은 혼자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쳐 가며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데……’를 중얼거렸다.

잠시 빨간불에 멈춰 서자 수혁이 검지를 구부려 진겸의 볼을 툭 건드렸다.

“나랑 있는데 탁 이사 생각 좀 그만하지?”

“그래도 다단계는 아니죠! 친구잖아요. 말렸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설마…… 형도 같이 한 건 아니죠?”

“……날 뭐로 보는 거야.”

“저도 탁 이사님은 안 빠질 줄 알았다고요!”

수혁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진겸의 뇌는 주름이 얼마 없는 게 아닐까…….

어떤 사고방식을 가져야 자신과 원범이 다단계에 빠질 거라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하긴…… 기억이 없으니 우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겠네.’

어쩌면 지금 진겸의 반응이 당연한 걸 수도 있다.

수혁은 청오를 통해 세 사람이 같이 갔을 때의 일도 간략하게 알고 있다.

‘바로 입금했으니. 그래 보였겠지.’

그렇다고 그 자리에 없었던 자신까지 싸잡아 말하는 건 별로였다.

눈을 곱게 휘어 웃은 수혁이 구부린 검지를 옆으로 옮기더니 엄지와 함께 부드러운 피부를 잡았다.

진겸이 빠르게 눈을 깜빡거리자 그대로 옆으로 당겼다. 볼이 주욱 늘어나면서 입술까지 같이 딸려 왔다.

“……으아?”

“어려서 그런가…….”

눈에 보이는 볼살은 없는데 말랑말랑하다. 피부도 부드러워 당기는 촉감이 좋았다. 신호가 바뀌자 수혁은 미련 없이 볼을 놓고 다시 핸들을 잡았다.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볼이 꼬집힌 진겸은 얼얼한 볼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살짝 잡은 것도 아니고 은근히 힘을 줘 아직도 감각이 남아 있었다.

수혁은 집에 데려다주기만 한 건 아니었다. 오늘 온 목적 중 하나인 수많은 쇼핑백을 트렁크에서 꺼냈다. 그때 강제로 돌려받은 후로 건드린 적 없었다.

“이거…….”

“선물로 준 건데 백 비서를 통해 돌려받았을 내 마음은 생각도 안 해?”

“그래도 너무 비싸서 받기 부담스러워요.”

“그땐 잘 받았잖아.”

“가져가라고 했는데 그냥 가 버리셨잖아요!”

오늘따라 왜 자꾸 변명을 하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이번 건은 정말 억울했다. 그때 문도 잠그고 창문도 눈만 보이게 정말 조금 열어서 돌려줄 수가 없었다.

“주는 건 그냥 ‘잘 쓸게요’ 하고 받으면 돼.”

“그러기엔 너무 비싸다고요…….”

“내 눈에 차는 게 이런 것뿐인데 어쩌겠어. 네가 눈을 좀 높여 봐.”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진겸이 어이없어하며 올려다보자 수혁이 픽 웃었다.

“왜, 올려다 줄까?”

“안 받을 거예요.”

“왜? 백 비서가 받지 말래?”

“제가 부담스러워서요. 저는 해 드릴 수 있는 게 없잖아요.”

받은 만큼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진겸은 고가의 물건을 받고 싶지 않았다.

물론 타인이 나를 생각해서 주는 선물은 언제든지 기쁘게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적정선을 지킨 선물일 때의 일이다. 지금 수혁의 손에 있는 쇼핑백들은 너무 부담스러운 것들뿐이었다.

“……네가 그렇게 부담스러우면 이것만이라도 받아.”

수혁은 다른 쇼핑백들은 다시 트렁크에 넣고는 하나를 내밀었다. 쇼핑백에 적힌 브랜드명은 진겸이 나중에 진우 정장을 사 주겠다고 외운 곳이었다.

그렇다는 건 쇼핑백 안에 든 건 베이지색 정장일 터였다.

“이건 나한테 안 맞잖아. 이미 시간이 지나서 바꿀 수도 없어.”

“……이것도 비싸잖아요.”

“너한테 비싼 거지 나한텐 안 비싸. 다시 가지고 온 내 정성을 봐서라도 그냥 입으면 안 돼? 다른 건 가져가라고 안 할게.”

“진짜요?”

사실 정장을 받는 것도 꽤 부담스럽긴 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돌려준 걸 또 가져온 걸 보면 진우가 좋아할 것 같지 않았다.

진겸이 우물쭈물하자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나 이제 바쁜 거 끝나서 시간 남아도는데. 카페 매일 가도 되나?”

“안 바빠요? 요즘 진우는 바빠서 맨날 야근하는데…….”

“거기랑 나는 하는 일이 달라. 나도 바빴어. 그래서 내가 그 재밌는 구경…….”

수혁은 서둘러 말을 끊었다. 더 했다간 진겸의 얼굴이 구겨질 게 뻔했다.

“아무튼. 다음에 나 만날 때 입고 와. 아니다. 내가 데리러 올 테니까. 그때 입고 나와.”

“언제요?”

“뭐…… 언제든? 나 보고 싶으면 연락하고.”

“…….”

“매정한 거 보소. 말이라도 그냥 알겠다고 해 줄 순 없는 거야?”

수혁이 또다시 진겸의 볼을 잡아당겼다.

웃기게도 다른 사람의 볼을 이런 식으로 꼬집어 본 건 아주 어릴 적에도 하지 않았던 행동이다.

더 포동포동하게 살이 올랐던 볼을 봐도 잡아 볼 생각은 들지 않았건만. 왜 이렇게 진겸의 볼에는 자꾸만 손이 가는 건지.

“어서 올라가. 너 다리 후들거린다. 계단 못 올라가겠으면 업어다 줄까?”

“……됐거든요!”

진겸은 제 볼에 있는 커다란 손을 밀어냈다. 확 쳐내고 싶었는데 그러기엔 수혁이 연장자라 꾹 참았다.

그래도 올라가기 전에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건 잊지 않았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 연락하실진 몰라도 그때까지 옷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게요!”

자기 할 말만 하고 올라가는 진겸의 발걸음 소리가 평소와 달랐다. 힘이 잔뜩 들어갔다. 그래도 이웃을 생각해서인지 돌계단만 그렇게 올라가고 옥탑방으로 가는 철제 계단은 조심스레 밟았다.

그 모습이 웃기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수혁의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은은한 미소를 띠었다.

집으로 올라온 진겸은 망설임 없이 바로 진우에게 정장 사진과 함께 사실을 고했다.

사진

오후 4:53

내가 달라고 한 거 아니야 형이 와서 주고 갔어!

☆진우☆

형?

선 이사?

오후 4:53

손으로 오케이를 그리는 이모티콘

오후 4:54

오늘 카페에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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