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수혁은 다 마신 잔을 내려놓고는 진겸이 일하는 걸 구경했다.
손님이 들어오면 웃는 얼굴로 상냥하게 인사를 건네고, 주문을 받는다. 드립 커피는 종류가 많아 손님이 원하면 취향에 맞게 추천도 한다.
카페에서 일한 지 이제 일주일 된 걸로 알고 있는데, 꽤 잘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종종 직원들과 대화할 때도 웃는 낯을 유지했다.
‘저렇게 웃고 있으면 얼굴에 경련 안 오나?’
수혁은 제 입꼬리를 양쪽 다 올렸다가 바로 내렸다. 미소를 꾸미는 건 너무도 쉽다. 입꼬리만 올리면 그만이니까.
눈도 마찬가지다. 눈꼬리가 휘게 웃는 건 가능하다. 하지만 진심으로 웃는 얼굴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수혁이 보기엔 진겸은 카페 일을 즐기는 것 같았다.
‘보기엔 좋네.’
사람을 가리지 않고 다 웃어 주는 게 문제지만, 멀리서나마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곳에 온 이유가 점차 투명해지고 있었다.
기다리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지루하지 않았다. 계속 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진겸은 일이 끝나자마자 직원들에게 인사하고 이내 수혁에게 다가갔다.
“저 이제 끝났어요! 많이 기다리셨죠?”
“아니. 재밌었어.”
“재미요? 뭐가요?”
진겸은 일하면서 계속 수혁을 힐끗거렸는데, 그때마다 눈이 마주쳤다.
즉, 수혁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주변만 구경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구경하는 걸 좋아하시나? 아니었던 것 같은데…….’
자신이 아는 수혁의 정보가 잘못된 건가 되짚어 봤다. 그는 언제나 흥미로운 걸 좋아했다. 지루한 건 싫어했으며 자극적인 걸 찾아다니는 사람이었다.
매장 안에 그의 흥미를 끌만 한 게 있나 싶어 휙휙 둘러봤지만 딱히 그런 건 없어 보였다. 사람마다 흥미 대상이 다르니 어딘가의 수혁의 취향이 있겠거니 생각하기로 했다.
진겸이 맞은편에 앉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어요?”
“내 정보통이 하나 있지.”
엄밀히 말하면 원범의 정보통이다.
이청오의 사무실을 찾아간 건 회사 일도 있었지만 대뜸 나가라며 집에서 쫓아낸 원범 때문이기도 했다.
기껏 해외 출장을 다녀왔더니 집에서 나가란다. 이유도 말해 주지 않았다.
수혁은 어릴 적 부모님을 따라 해외로 갔다. 그 이후 한국엔 놀러만 왔었다. 그러다가 원범이 불러서 완전히 들어온 거였다.
거주지가 외국이라 한국에서 집 구하는 건 귀찮고 호텔은 싫고. 그래서 원범이 싫어해도 운전기사 노릇을 해 주는 조건으로 얹혀살고 있었다. 운전기사라고 해 봐야 사적으로 움직일 때만 했지, 출퇴근을 책임지는 기사는 따로 있다.
‘기껏 왔더니 쫓아내기나 하고.’
원범과 수혁의 인연은 고등학교 때 시작됐다. 한국인이 별로 없는 학교에 등장한 원범은 수혁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두 사람이 친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수혁은 어디를 가나 주목을 받았고 원범은 그런 관심이 귀찮았다. 그래도 수혁의 끝없는 치댐이 두 사람의 인연을 지금까지 끌고 온 거였다.
원범에겐 몇 없는 믿을 만한 친구였기에 수혁을 한국으로 불러들인 거였다.
어쨌든 그렇게 2년 지났다. 사실 1년쯤 지났을 때 슬슬 집을 구할까 싶었다가 백진우란 재밌는 존재가 나타났길래 더 붙어 있었다.
그러다가 흥미가 떨어져 이제는 굳이 원범과 한집에 살 필요가 없어진 차에 이번엔 백진겸이 나타난 거다. 그래서 좀 더 붙어 있으려 했건만, 갑작스레 쫓겨났다.
당분간은 호텔에서 지내더라도 살 집은 구해야 할 것 같아서 회사 자금줄도 확인할 겸 이청오 사무실에 들렀던 건데 거기서 다단계에 대해 알게 된 거였다.
그것도 어처구니없이 말이다.
[탁 이사. 전자 쪽도 인수했어?]
[아니요.]
[그럼 이건 뭐야?]
수혁은 사무실 책상에 고이 놓인 검은색 명함을 들었다.
[HAM전자 영업부장 탁원범]
[이번 일 때문에 임시로 만든 명함입니다.]
[귀찮은 거 싫어하는 탁 이사가 임시로 명함까지 만들 만한 일이 있었다고?]
수혁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그가 누군가가 관련되면 귀찮은 것도 마다한다는 걸 떠올리고는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백 비서한테 무슨 일 있었어?]
[백 비서가 아니라 형님분한테요.]
[……백진겸?]
여기서 걔가 왜 나와?
수혁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청오는 탁원범이 비밀 엄수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깃털 같은 입을 가진 사람이 된다.
물론 입을 놀릴 사람은 한정되어 있다. 그도 생각이 있기에 아무에게나 말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수혁과는 친분이 있어서인지 더 자세히 알려 주었다.
그렇게 이청오의 입으로 사건의 전말을 전부 전해 듣게 된 거였다.
수혁은 당시 자신이 얼마나 황당하고 어이가 없었는지 앞에서 자신을 빤히 보며 웃고 있는 진겸에게 하나하나 말해 주고 싶었다.
말도 안 되는 사기 수법에 넘어간 것도 황당했건만 30만 원어치의 치약이라니.
기억을 잃더니 사람이 바뀌어도 너무 바뀌었다.
그런데 그 바뀐 모습이 흥미롭고 귀엽게 느껴지는 걸 보니 자신도 덩달아 바뀐 것 같았다.
지금도 웃는 저 얼굴의 볼살을 당겨 쭉 늘려 보고 싶었다.
그래도 계속 웃을까?
하지만 웃는 모습이 너무 해맑아서. 저 표정을 오래 보고 싶어서 그냥 두었다.
“아…… 정보통. 근데 왜 오셨어요?”
“말했잖아. 네가 내 연락을 안 받아서 왔다고. 내 번호 차단한 거 아니야?”
“설마요. 저 아저씨 번호 모르는데요?”
“……계속 아저씨라고 부를 거야?”
테이블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수혁이 눈을 가늘게 떴다. 분명 다음에 만날 땐 형이라고 부르라 했건만 꼬박꼬박 아저씨다. 차라리 이사님이라고 불렀으면 모를까 왜 아저씨일까.
“……형.”
“그래.”
이번에 수혁이 꾸밈없는 미소를 지었다. 고작 저 형 소리를 듣자고 지적을 몇 번이나 한 건지.
수혁은 제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계속 형 소리를 들으리라 속으로 작은 다짐을 했다.
“핸드폰 줘 봐.”
“……저번처럼 가져가시려고요?”
“아니야. 진짜 나 차단한 건지 확인하려고 하는 거야.”
“아닌데…… 저 진짜 안 했어요!”
진겸은 극구 부인했다.
자신이 차단한 번호가 많긴 해도 어디까지나 누군지 확인하고 한 거였다. 물론 메시지 없이 계속 전화만 한 번호도 차단하긴 했었다.
혹시 그사이에 수혁의 번호가 끼어들어 간 건가 싶어 조마조마한 얼굴로 그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저번엔 그냥 핸드폰을 뺏기만 했고 들여다보진 않았다. 잠금이 풀린 핸드폰 배경 화면은 기본 모드였고 화면에 보이는 앱도 주로 쓰는 것만 놓은 건지 별로 없었다.
수혁은 차단 목록을 살폈다.
“뭐 이리 많이 차단했어?”
제 핸드폰에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양이다. 수혁은 엄지로 쭉쭉 내리다가 익숙한 번호를 발견했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있네. 내 번호.”
“진짜요?”
진겸이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앞으로 내밀었다. 자기 핸드폰이니 가져가서 보면 될 것을 굳이 머리를 맞대고 확인했다.
갑작스러운 진겸의 행동에 놀란 건 수혁이었다. 저도 모르게 들고 있던 핸드폰을 놓쳐 버렸다. 떨어진 핸드폰은 큰 소리를 냈다.
“악!”
진겸이 얼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가 너무 크게 소리친 것 같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역시나 시선이 쏠렸다.
“죄송합니다…….”
손님이어도 미안하다고 할 판국에 일하는 곳이라 더 머리를 숙이게 됐다. 특히 자신을 보고 있는 직원들을 향해 말이다.
핸드폰이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진겸이 가방을 고쳐 멨다.
“우선 여기서 나가요.”
수혁은 말없이 진겸이 가는 대로 따라 걸었다. 딱히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니었다. 카페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후에야 멈추어 섰다.
“제가 차단하다가 형 것도 했나 봐요……. 근데 메시지 온 거 확인하고 차단하는데…… 진짜 온 게 하나도 없었거든요?”
진겸은 정말 억울한지 온 전화나 메시지가 있는지 확인했다. 역시나 없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이라도 하듯 핸드폰 화면을 수혁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눈썹이 축 내려가고 올려 뜬 커다란 눈망울은 진실만을 말하고 있음을 알렸다.
고개를 삐딱하게 튼 수혁의 한쪽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대충 어떤 상황인지 파악이 됐다.
‘백 비서, 깜찍한 짓을 했네.’
자신이 연락하기 전에 이미 번호를 차단한 모양이었다.
‘……설마?’
수혁은 혼자만 차단당하면 억울하다는 생각에 진겸의 손에 든 핸드폰을 뺏었다.
“이야…….”
역시나 원범의 번호도 수신 차단 목록에 들어가 있었다.
너무 많은 번호를 차단해 놔서 살포시 끼워 넣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한 모양이다. 철저한 진우의 철벽에 수혁의 미소가 짙어졌다.
원래 자꾸 못 하게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욕망이다. 특히나 선수혁은 더욱더 그랬다.
수혁은 차단된 제 번호는 지우고 원범의 것은 그대로 두었다. 어차피 그가 직접 연락할 일은 없겠지만 만약 하더라도 진겸이 받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재밌을 것 같아서였다.
“내 거 차단 풀었어.”
“죄송해요. ……왜 차단됐지?”
진겸은 도통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이었다. 수혁은 ‘네 동생이 짓이야’라고 말하려다 말았다.
무슨 반응이 돌아올지 궁금하긴 했지만 굳이 일을 벌일 생각은 없었다.
“이제 어디 가?”
“집에 가야죠.”
“나는?”
“저한테 다른 볼일 있으셨어요?”
지나가다가 들른 게 아니라 다른 일이 있어서 온 건가?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곳에 있다가 후덥지근한 아스팔트 위에 있으려니 더 더위가 느껴졌다.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무엇보다 4시간 동안 열심히 일해서 힘들었다. 물론 힘을 쓰거나 몸을 많이 움직이는 건 아니었지만, 계속 한자리에 있는 것도 힘든 법이다.
더구나 손님이 많아져서 숨 돌릴 시간도 없이 웃으며 응대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피곤했다.
수혁이 찾아온 게 귀찮거나 보기 싫은 게 아니었다. 그저 지금은 두 다리 뻗고 누워서 쉬고 싶은 마음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