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출근 첫날은 메뉴를 외우고 포스를 맡아 익숙해지는 것으로 보냈다. 주변에 회사가 많아서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의 행렬이 끝없이 이어졌다.
진동벨은 금방 동이 났다. 드립 전문점이라 대부분 드립 커피를 시켜서 시간이 조금 걸렸다.
진겸은 처음임에도 손님들을 곧잘 응대했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을 땐 주문 전 미리 양해를 구했고, 진동벨이 부족할 땐 영수증에 번호를 체크하여 배부했다.
음료 종류가 많아 포스기에서 찾느라 시간이 걸렸을 뿐 주문 실수는 없었다. 게다가 몇 사람 빼고는 전부 카드로 결제해서 결제 실수도 없었다.
한차례 폭풍이 몰아치고 나자 진겸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듯했다.
“힘들지? 커피 마실래?”
멍해진 진겸에게 말을 건 사람은 1시부터 마감까지 일하는 점장, 하상일이었다.
그는 나이를 묻지도 않았으면서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제가 커피는 못 마셔서 그냥 물 마실게요.”
“카페 알바가 커피를 못 마시면 어떡해.”
“아…….”
면접 볼 때 사장한테도 카페인에 취약해 커피를 못 마신다고 했을 때 괜찮다고 해서 안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첫날 이런 소리를 듣게 되다니.
당황한 진겸이 입을 뻐끔거리자 하상일이 웃으며 등을 툭툭 쳤다. 아프진 않았지만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농담이야. 커피 못 마실 수도 있지. 다른 음료도 많으니까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나나 직원들한테 말해. 만들어 줄게.”
“네…… 감사합니다.”
“카페 알바 경험은 있어?”
“아니요.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 그럼 잘 알려 줘야겠네.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봐.”
진겸은 그가 굉장히 친절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은 그렇게 무난히 지나갔다.
다음 날, 진겸은 음료 만드는 법을 배울 거라는 기대에 차 출근했지만 그가 서 있는 곳은 카운터 앞이었다.
출근하자마자 퇴근할 때까지 그 포지션은 바뀌지 않았다.
‘내일은 알려 주나?’
하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진겸의 자리는 카운터였다.
몇 가지 헷갈리는 메뉴가 있긴 해도 이제는 능숙하게 카운터를 봤다. 간혹 드립 커피에 대해 손님이 물으면 직원들이 다가와 설명해 줬다.
“진겸 씨, 손님 없으면 이거 외워요. 이게 우리 원두 리스트고 옆에 보면 어떤 맛과 향이 나는지 적혀 있어요.”
“네. 근데 저 음료는 안 배워요?”
진겸의 물음에 직원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르바이트 공고를 내고 나서 많은 이력서가 들어왔다. 개중에는 자격증이 있거나 카페 아르바이트 경력이 꽤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다 제치고 아르바이트 경험이 전혀 없는 진겸을 뽑은 이유는 단 하나였다.
얼굴.
그렇다고 사실을 말하기엔 상대방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어서 하상일이 나섰다.
“한 달만 일하기로 해서 그래. 전부 가르쳤는데 그만두면 우리도 힘 빠지잖아. 그래도 카운터가 제일 중요한 업무야. 주문이 밀리면 속도도 조절해서 받아야 하고 카페의 전체적인 흐름을 봐야 하는 곳이거든.”
하상일의 말이 맞긴 하다. 카운터에서 무턱대고 주문을 전부 받았다간 음료 나오는 데 오래 걸린다고 불만을 토로할 손님이 그만큼 많아지게 된다.
그래서 주문이 밀리면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음료가 나가는 걸 본 다음에 주문받기도 한다.
진겸은 하상일의 말을 단박에 이해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금방 관둘 사람에게 가르치는 건 비효율적인 것 같았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은 숨길 수 없었다. 서운함이 표정으로 드러나자 뒤에 있던 직원들이 간단한 거라도 알려 준다며 진겸을 달래 주었다.
원래 맛집이었던 카페가 무슨 소문이라도 난 건지 점심시간 말고도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평소라면 점심이 지나 2시쯤이 되면 조금 숨 돌릴 틈이 있었는데 오늘은 계속해서 몰려드는 손님에 정신이 없었다.
계속 카운터를 본 덕분인지 진겸은 이제 포스 용지도 능숙하게 갈았다.
직원들은 바쁜 와중에도 드문드문 대화를 나눴다.
“진겸 씨 있는 거 소문 난 거 맞지?”
“그러니까 이렇게 몰리는 거겠지. 지난번에 걔 있을 때도 그랬잖아. 이번에 배우로 데뷔한다던 애.”
“아. 되게 짧게 일했던 애?”
“어. 그때도 난리였잖아. 사장님도 분명 노리고 뽑은 거야.”
직원은 힐끗거리며 손님들을 살폈다. 주변에 회사가 많아 학생들은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화장은 했어도 학생 티가 나는 손님들이 꽤 있었다. 게다가 최근 들어 여성 손님의 수도 늘었다.
진겸은 뒤에서 무어라 말하는지도 모른 채 주문받고 결제하고 진동벨 주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다가 한 손님의 요구에 진동벨을 주려던 손을 멈칫했다.
“예?”
“전화번호요. 저 마음에 안 드세요? 여기 매일 왔는데.”
“죄송해요. 저 애인 있어요.”
“아까 없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러게요. 생각해 보니까 저한테 애인이 있더라고요.”
진겸이 웃으며 말하자 손님이 인상을 쓰면서 진동벨을 낚아채듯 가지고 갔다.
손님이 애인 있냐고, 전화번호 뭐냐고 묻는 일은 첫날에도 있었다.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했을 때 하도 당해서 이제는 능숙하게 대처하기에 이르렀다.
그걸 지켜보던 하상일이 옆으로 다가왔다.
“진짜 있는 거야?”
“뭐가요?”
“애인.”
뜬금없는 물음에 진겸의 고개가 돌아갔다. 사실 애인 있다는 말은 진우가 알려 줘서 하는 거였다.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할 땐 그냥 거절하면 끝이었는데, 카페는 단골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해서 딱 자르기보다 유연하게 넘겨야 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애인 있어요’ 작전이었다.
진겸이 사실대로 말하려고 하는데 카운터 앞에서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그 애인 여기 있네.”
놀란 진겸이 고개를 휙 돌렸다.
“아저씨?”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왜 또 아저씨가 된 거야?”
“여긴 어떻게……?”
수혁은 놀라서 큰 눈을 크게 떠 멍한 표정이 된 진겸을 보며 카운터 가까이에 몸을 붙였다.
그의 얼굴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하지만 스치듯 하상일을 보는 눈빛은 매서웠다.
“애인이 내 연락을 무시하길래 왔지.”
“……연락이요?”
“어. 전화도 메시지도 다 씹었잖아. 나 상처받았다고.”
진겸은 전혀 모르는 일이었다.
수혁에게서 연락이 온 적도 없었고 그의 번호도 알지 못했다.
“진겸아, 일해야지.”
그런 진겸을 정신 차리게 한 건 하상일이었다. 지금은 엄연히 근무 시간이다.
“아, 죄송해요. 아저씨, 저 곧 끝나거든요? 혹시 바로 가셔야 해요?”
“아니, 너 끝나는 거 기다렸다가 같이 갈 거야. 따뜻한 아메리카노 줘.”
“네! 이건 제가 결제할게요.”
지난번에 한우를 얻어먹고서 보답으로 사는 것 치고는 굉장히 조촐했지만 당장 해 줄 수 있는 거라도 하려는 진겸의 작은 성의였다.
수혁은 진동벨을 받고 바 앞에 서서 내부를 둘러보았다. 규모가 그렇게 크지 않은데 진겸을 포함해 넷이 일하는 걸 보니 확실히 바쁜 매장인 듯했다.
아메리카노는 금방 나왔다. 픽업 대엔 하상일이 있었다.
“진짜 진겸이 애인이에요?”
“그럼 가짜 애인도 있나?”
“애인한테 놀라서 아저씨라고 하진 않으니까요.”
“호오. 좋은 지적이야.”
수혁은 웃으며 눈을 찡끗거렸다. 윙크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느낌이긴 했다.
그는 쟁반은 둔 채 머그잔만 들고 빈자리에 앉았다.
하상일은 제 궁금증은 제대로 풀어 주지 않고 그냥 넘어가는 수혁의 작태에 인상을 썼다. 하지만 따라가서 다시 묻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아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서 진겸에게 다가갔다.
“저 사람 진짜 애인이야?”
그의 시선이 수혁에게 있는 걸 확인한 진겸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장난친 거예요.”
“그렇지? 난 또…….”
그제야 궁금한 게 해결된 상일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가 바닥을 보이는 원두를 채우러 갔다.
진겸은 카운터 앞에 서서 수혁이 있는 곳을 쳐다봤다가 눈이 마주치자 손을 살짝 흔들었다.
원범을 보면 무조건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데, 이상하게도 수혁만 보면 저도 모르게 손 인사를 하게 된다.
‘처음에 인사를 그렇게 해서 그런가?’
아니면 원범보다는 수혁이 조금 더 편하게 느껴져서 그럴지도.
수혁은 자신을 향해 방긋 웃는 진겸에게 미소로 답했다.
‘맛있네.’
드립 전문점이라고 하길래 드립 커피를 마셔 볼까 하다가 일을 덜어 주자 싶은 마음에 간단하게 아메리카노로 시킨 거였다. 그런데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수혁의 취향은 베리류의 산미가 가득한 커피지만 어쩐지 오늘은 고소한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가 앉은 자리는 중간쯤이었다. 카운터가 잘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남은 자리 중엔 제일 나았다.
수혁은 끈질기게 시선의 끝에 진겸을 두었다. 빨빨거리며 분주하게 주문을 받는 모습을 보자니 절로 미소가 번졌다.
‘열심히 하네.’
일하는 걸 보려고 일부러 진겸이 퇴근하기 1시간 전에 도착한 거였다.
‘나만 빼고 그 재미난 일을 벌였단 말이지.’
오늘 찾아온 건 진겸이 연락을 받지 않아서이기도 하고, 치약 사건이 궁금하기도 해서였다.
전혀 모르고 있다가 이청오 사무실에 가서 알게 되었다. 오늘 거기에 가지 않았다면 자신만 아무것도 모른 채 넘어갈 뻔했다.
자신이 진겸에게 준 선물을 진우가 회사로 가지고 온 날, 바로 집으로 가려 했었다. 하지만 갑작스레 꼬여 버린 프로젝트 때문에 한동안 강제로 해외 출장을 다녀와야 했다.
원래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할 생각은 없었다. 대충 자리만 차지할 생각이었다.
원범의 회사로 들어간 이유는 어디까지나 그를 돕기 위함이었다. 회사를 노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자기 사람을 늘리려는 그를 위해 적성에도 맞지 않는 영업 지원팀에 이사로 재직 중이다.
원범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자신은 지금도 놀고먹는 백수로 있었을 거다.
물론 그냥 백수가 아닌 돈 많은 백수였을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