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응. 당연하지. 나도 아픈 거 싫어.”
진우의 허락이 내심 기쁜지 진겸은 활짝 웃었다. 뭔가 큰 산 하나를 넘은 기분이었다.
잠시 진우의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던 진겸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 하나만 물어봐도 돼?”
“응.”
“대답해 줄 거야?”
“내가 대답 못 할 거 물어보려고?”
진겸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진우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 만한 물음은 맞았다. 아까도 이 질문을 피했으니까. 그래도 확인해야 할 것 같아 주먹을 꽉 쥐고서 비장한 얼굴로 물었다.
“……우리 빚이 얼마나 돼?”
진우는 이제 숨길 수 없다는 걸 알고는 어쩔 수 없이 집 상황에 대해 알려 주었다. 진겸은 생각했던 것보다 큰 액수에 입을 뻐끔거리다가 말했다.
“……빚이 그렇게나 많아?”
“응. 그러니까 형은…….”
“또, 또! 둘이 벌면 더 빨리 갚겠지. 조금만 더 기다려 줘. 내가 꼭! 다 갚아 줄게!”
사채가 2억. 대부업체답게 이자는 연 20%다. 1년 이자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그나마 진우가 꾸준히 갚아 나갔기에 2억인 거였다.
“부모님은?”
과거는 알아도 현재는 모르고 있다. 혹시라도 변한 게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그리고 진우의 입으로 직접 듣고 싶기도 했다. 그래야 자신이 나중에 실수하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진우는 말하기 싫다는 기색을 폴폴 풍기면서도 전부 말해 주었다.
도망간 엄마와 빚만 남긴 채 사라진 아빠. 그리고 그 빚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진우.
‘……역시 그 사람, 아빠였구나.’
지금은 차단했지만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를 가장 많이 남긴 번호가 하나 있었다.
메시지에 아빠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돈을 빌려 달라고 하거나, 진우에겐 비밀이라고 하던 대목을 보면 그 번호의 주인이 아빠라는 건 눈치채고 있었다.
백진겸은 진우에겐 차가웠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그러지 않았다. 자기의 낮은 자존감을 진우에게만 내보이기 싫은 것처럼 악을 써 댔다.
‘그 사람한텐 약했어.’
메시지를 봐도 그랬다.
아빠라는 사람에게는 돈 보냈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냐, 살갑게 안부를 묻기도 했다. 지금 이렇게 사는 게 아빠가 쓴 사채 때문인데도 말이다.
처음엔 은행에서 대출받았다. 목적은 백진겸의 병원비. 하지만 제때 갚지 못하자 신용은 떨어지기 시작했고, 시간이 지나자 결국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그 후엔 생활비와 병원비를 위해 사채를 끌어다 쓴 거였다. 하지만 은행 빚도 못 갚았는데 사채라고 갚을 수 있었겠는가. 역시나 이자가 붙은 빚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부모의 신용에 문제가 있었던 거지, 자식들은 괜찮았다. 하지만 일을 하지 못하는, 아니 하지 않는 백진겸을 대신해 진우가 빚을 전부 감당해야 했다.
처음에는 사채 먼저 갚을 요량으로 대출을 신청하려 했으나 사회초년생에겐 대출도 녹록지 않았다.
사채를 갚기엔 턱없이 적은 금액이었다. 그것마저 갚지 못하면 두 사람 모두 신용불량자가 될 게 뻔했기에 대출은 받지 않았다.
진우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게 백진겸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진겸은 오늘 있었던 일을 일기에 자세히 적을 생각이었다. 지금은 자신이 듣고 있지만 언젠간 진짜 백진겸에게 닿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래도 병원비 걱정은 안 해도 돼서 다행이다. 탁 이사님, 생각보다 좋은 분이셨네.”
《그레이》를 보면서 진우에게 집착하고 통제하는 탁원범을 욕했었는데…….
객관적으로 병원비라는 큰 짐을 하나 덜어 준 건 사실이었다. 물론 순수한 호의는 아니었겠지만, 그게 큰 도움이 된 건 부정할 수 없다.
지금까지 이 모든 상황을 꿋꿋하게 견디고 버텨 준 진우가 마냥 대견했다.
진겸은 무릎으로 서더니 그대로 가느다란 두 팔을 벌려 진우의 머리를 가슴 쪽으로 당겨 안았다. 작은 손이 조심스레 머리를 쓰다듬었다.
“장하다. 우리 진우, 진짜 장하다.”
머리를 쓰다듬던 손이 아래로 내려가 널따란 등에 닿았다. 아기를 재우듯 일정하게 토닥였다.
“혼자 감당하게 해서 미안해. 백진겸 진짜 철없었다. 그치? 나빴네, 아주.”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꽤 많은 의미를 가진다. 특히나 진우에겐 더 그랬다.
하지만 형제의 울타리는 이미 썩은 지 오래였다. 겨우 형태만 갖추고 있었다. 백진우는 열심히 수리하려 애썼지만, 백진겸은 방치했다.
언제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울타리를 말이다.
진우는 평균 심박수보다 조금 낮은, 그러나 일정한 속도로 울리는 진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점차 안정을 찾았다.
울고, 흥분한 건 진겸이었는데 왜 자신이 이러고 있는지, 진우는 순간 의아함을 품었다가 픽 웃음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팔을 뻗어 진겸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얇은 허리가 팔에 감겼다.
진겸이 무릎으로 서 있어서인지 가는 발목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었다.
이 가늘고 약한 몸으로 자신을 위로하겠다고 힘줘 품에 안고 있는 상황이 현실 같지 않았다.
누군가 자신에게 못된 장난을 치는 건 아닐까. 줬다가 뺏는 게 제일 나쁜 거라는데, 혹시 이 행복이 깨어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진겸이 기억을 잃은 지 이제 3주가 지났다. 짧다면 짧은 그 시간 동안 울고, 웃었으며 위로도 받았다.
만약…… 이대로 기억이 돌아온다면 그땐 어떻게 해야 하지?
달라진 진겸을 보면서 매번 하는 생각이었다.
진우는 진겸이 기억을 되찾아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의 기억이 돌아오지 않길 바라는 제 모습을 발견하곤 했다.
진겸이 알면 기겁할 테지만 자꾸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제 욕심의 크기가 스멀스멀 커지고 있었다.
“형.”
“응?”
진우가 팔에 힘을 줘 서서히 얼굴을 떼어 냈다. 진겸은 그가 원하는 대로 팔에 힘을 풀고 놔주었다.
“혹시…… 조금이라도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
“아니. 내가 기억 못 해서 많이 답답하지?”
“그런 게 아니고…….”
진우가 잠시 호흡을 골랐다. 지금 이 말을 하는 게 맞긴 한 건지, 진겸이 기분 나빠하면 어쩌나 걱정하면서도 머리보다 입이 빨랐다.
“기억…… 꼭 찾고 싶어?”
올려다보는 진우의 짙은 밤색 눈동자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언제나 상대방을 올려다보는 건 진겸이었다. 그의 키가 작기도 했고 최근에 만난 사람들 대부분이 키가 큰 탓이기도 했다.
그중 제일 많이 보는 사람이 진우였는데 서 있으나, 앉아 있으나 항상 올려다봐야 했다. 그나마 잘 때는 진우가 바닥에서 자서 그때만 내려다봤다.
진겸은 길지 않은 진우의 머리카락을 장난스레 쓸어 넘겼다. 더운 집 안의 열기로 살짝 땀이 난 건지 손에서 축축함이 느껴졌다.
음식 냄새를 빼기 위해 에어컨을 끈 채 문을 열어 두어서인지 집 안 온도는 밤이라도 열대야로 후덥지근했다.
열린 문과 창문을 통해 여름벌레의 시끄러운 울음소리가 집 안으로 흘러들어 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소리, 웃음소리, 자동차 소리까지 복합적으로 들렸다.
그 소음 속에서 진겸은 단호히 대답했다.
“아니.”
진겸은 진우가 아쉬워할지라도 기억을 찾고 싶다는 대답은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기억해 낼 수 없으니까. 괜히 그에게 이루지 못할 희망을 심어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진겸의 걱정과는 달리 진우는 속으로 안도하고 있었다.
만약 진겸이 기억을 찾고 싶다고 했다면 자신은 진심으로 그를 도울 수 있을까?
아마 노력은 했을 거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계속 찾지 못하길 바랐겠지. 자신이 생각해도 이중적이라는 건 알지만 그만큼 하루하루가 너무 좋아서 놓치고 싶지 않았다.
진우는 이번에도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럼 찾지 말자, 우리.”
“응. 그러자.”
진우는 자신이 이기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억을 찾지 않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말했고, 진겸은 미안하지만 자신은 찾을 기억이 없다는 의미로 답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춘 채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이내 떨어져야 했다. 에어컨을 켜지 않은 채로 열대야를 버텨 내기엔 진겸이 더위에 너무 약했다. 게다가 계속 무릎으로 서 있어서 다리가 아픈 것도 한몫했다.
결국 바닥에 진겸이 주저앉음으로써 두 사람의 애틋한 시간은 끝이 났다.
* * *
진겸은 새로운 아르바이트를 구했다. 이번엔 개인 카페였다.
진우도 카페는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합격할 거라는 응원의 말까지 해 줬고, 당연하게도 면접은 합격이었다.
진겸이 지원한 분야는 풀타임이 아닌 점심 피크 타임인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근무하는 아르바이트였다. 여름 방학을 맞은 학생들을 대상으로 구하는 거라 알바 기간도 딱 한 달이었다.
게다가 드립 커피를 전문으로 하는 곳이었다. 드립 커피가 뭔지 몰랐던 진겸은 출근하기 전날 사전 조사까지 마쳤다.
면접 볼 때 드립은 직원들이 내릴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음료 제조 영상만 줄곧 봤다. 물론 너튜브로.
포스 사용법도 알아 놨다. 매장마다 포스기가 다르긴 해도 기본 조작법만 알아 두면 어떤 포스기를 다루게 되더라도 훨씬 수월하게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랜차이즈의 경우 유니폼이 있는데 개인 카페라 유니폼은 따로 없고 단정하게 입고 오면 된다고 해서 흰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꺼내 깔끔하게 다림질도 해 놨다.
다림질도 처음에는 잘 못했는데 옷을 팔면서 몇 번 해 보니 지금은 제법 손에 익었다.
그렇게 새로운 일자리를 위해 진겸은 나름대로 만반의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