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진우가 걱정스레 바라보자 진겸은 제 의지를 덧붙였다.
“일해서 벌고 싶었는데 일이 좀…… 그렇게 됐잖아? 그래도 이거면 당장 생활하는 덴 문제없지……?”
“왜 그렇게 돈을 벌려고 하는데? 여기서 사는 게 싫어서 그래?”
이사 가자는 말을 한 적은 있지만, 이렇게 돈을 입금할 정도로 진심이었다니.
진우의 낯빛이 점점 가라앉았다. 차라리 옷이나 신발을 사 달라고 했다면 그건 해 줄 수 있다. 하지만 이사는 당장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이사…….’
진우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쉬지 않고 일했다. 자신이 돈을 벌지 못하는 순간, 모든 일상이 어그러질 걸 알기 때문이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하며 번 돈으로 매달 사채 원금과 이자를 갚았다. 하지만 줄어들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절망할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삶이 바빴다.
월급에서 이것저것 내고 남은 돈은 한 달 생활비로 빠듯했다. 백진겸의 사치를 감당하기엔 월급만으로는 부족했기에 그는 점차 밖으로 돌기 시작했다. 그게 보기 싫어서, 그래서 더 열심히 일했다.
“살기 싫어도 어쩔 수 없어……. 우리가 당장 이사 갈……”
“진우야?”
갈피를 잡지 못하는 눈동자와 떨리는 목소리는 진우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진겸도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저런 표정을 짓게 하려고 한 게 아니었다. 그저 도움이 되고 싶었을 뿐이다.
왜 갑자기 이사 얘기가 나왔는지는 몰라도 지금은 그의 오해를 정정하고 진정시키는 게 먼저였다.
진겸은 핸드폰을 꽉 쥔 진우의 팔에 손을 올렸다. 뜨거운 그의 체온과 함께 미세한 떨림까지도 손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됐다. 힘줘 잡으며 자신이 앞에 있다는 것을 알렸다.
“이사 가자는 거 아니야. 그 돈으로 어떻게 이사를 가? 그냥…… 너 혼자 버니까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어.”
사실 빚 갚는 데 쓰라고 하고 싶지만, 진우는 집에 빚이 있다는 걸 알려 주지 않았다.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아서 아는 척하지 않았다.
반창고가 가득한 손이 지친 삶의 무게로 떨리는 팔을 천천히 쓸었다. 진우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듯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우리 집이 어떤지 나는 모르잖아. 내 병원비도 그렇고, 그동안 저것들 산 돈도 만만치 않을 텐데…… 나 일 안 했다며.”
“……생활비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형은 신경 쓰지 마. 그냥 컨디션 조절…….”
“어떻게 그래!”
진겸의 목소리가 올라갔다.
“너만 고생하고 있잖아. 우린 가족인데……!”
진겸은 혼자 소리치면서 괜스레 울컥해 버렸다. 눈가가 뜨거웠다. 이 상황에서 왜 눈물이 나려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진우가 너무 안쓰러웠다.
왜 혼자 감당하려고 하는 걸까?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내가 좀…… 믿음직하진 못해도 형이잖아. 당장 큰돈을 벌지는 못하겠지. 나도 내 상황을 아니까…… 그래도 수술 잘 끝나면 제대로 된 직장 구할 거야. 그땐, 그땐…… 나도 같이 빚 갚을 수 있으니까 너도 좀 편해졌으면 좋겠어.”
울음이 섞이자 말끝이 점차 흐려졌다. 그래도 진우가 받아들일 것 같지 않아서 결국 빚 이야기를 꺼냈다.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철두철미하게 가계부를 쓰는 백진우 씨 덕분에요!”
가계부는 진우의 책더미 맨 아래에 깔려 있었다. 그곳에 관심을 가지는 건 진우, 본인뿐이라 방심했다.
“빚이 정확히 얼마야? 가계부를 봐도 매달 나가는 것만 적혀 있어서 잘 모르겠어…….”
“정말 신경 안 써도 돼. 내가 알아서 할게. 응?”
“네가 자꾸 그러면 나 진짜 서운해. 그 빚…… 나 때문에 생긴 거잖아.”
정확히는 자신이 아니라 백진겸 때문이다. 사치를 부릴 때도 진우를 지갑처럼 썼고, 보험 적용이 되지 않는 치료비도 전부 진우가 부담했다.
탁원범을 만난 후부터 병원비는 일체 그에게 의존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전에 생긴 빚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단지 빚이 더 이상 늘어나지 않는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진우에게는 숨 쉴 구멍이 하나 생겨난 거였다.
진겸은 그의 짐을 하나라도 더 덜어 주고 싶었다. 그래서 더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나 너무 오냐오냐하지 마.”
“……어?”
사뭇 진지한 진겸의 표정에 진우도 얼빠진 표정을 지웠다.
“천성은 어쩔 수 없다지만 그래도 시킬 건 시켜야지. 계속 그렇게 우쭈쭈 받아 주다간 버릇없어져. 뭐, 이미 없긴 한데…….”
마지막 말은 정말 작게 속삭였다. 하지만 진우의 귓가에는 그것마저 크게 들려왔다.
진우는 따라잡을 수 없는 진겸의 감정 변화에 어떻게 반응해야 옳은 건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울컥해서 소리를 지르더니 이번엔 진지해졌다. 그러면서 아직도 눈망울엔 눈물을 달고 있다. 몇 번 깜빡이면 뚝 떨어질 듯했다.
저도 모르게 뻗어 나간 손이 진겸의 눈 아래에 닿았다. 엄지로 쓱 훑자 눌린 눈 아래 때문에 고였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울지 마. ……내가 잘못했어. 응?”
“넌 잘못한 거 없어! 이건 내가 속상해서 우는 거야!”
울 때 누가 달래 주면 더 눈물이 나는 법이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기에 튀어나오려는 울음을 꾹 눌렀다.
“이 나이 되도록 알바를 한 번도 안 해서 이력서에 쓸 게 없다는 게 말이 돼?”
“그거야 아프니까…….”
“아파도 일상생활은 가능하다고 했어!”
진겸이 씩씩거리며 말하자 진우가 그를 달래려고 일부러 목소리를 부드럽게 냈다.
심박수가 올라가는 가장 쉬운 방법은 놀라거나 흥분하는 거다. 하지만 진겸의 심박수는 일정하게 유지해야 했다. 낮아지는 것도 높아지는 것도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아픈 게 제일 큰 거야. 지금 기억이 안 나서 그렇지. 정말 무리하면 안 돼. 얼마 전에도 그랬잖아. 그때 아팠던 거 기억하잖아. 언제 또 그럴지 모르는 거야.”
“그땐 복숭아 먹어서 그런 거잖아. 알레르기 때문에…….”
“맞아. 근데 형……. 나는 형이 내 옆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번에 형 쓰러진 거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그건 진겸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당시 진우가 더 환자처럼 보일 정도로 창백했다. 분명 병상에 누워 있던 건 자신이었는데 말이다.
“그냥 집에 있으면 안 될까?”
진우는 타이르듯 말했지만, 진심을 가득 담았다. 그동안 백진겸이 일을 하지 않은 건 몸이 아픈 것도 있지만 진우가 일을 하라고 하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진겸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래도 과보호는 안 된다고 소리치고 싶은데, 진우의 진심이 확 와닿아서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냥 형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아도 돼. 풍족하게는 못 해 줘도 벌고 있으니까…… 빚 갚으면 더 해 줄 수도 있어.”
“……넌 왜 자꾸 해 주려고만 해?”
진겸이 제일 궁금해하던 게 이거였다. 아무리 가족이라지만 진우는 너무 헌신적이었다.
현실에서도 이렇게 가족에게 제 인생을 다 바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것도 형제에게.
《그레이》는 소설이기에 가능했던 설정이었을 거다. 물론 그곳에 빙의한 상태지만 어쨌든 지금 자신에겐 이곳이 현실이었다.
“해 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왜?”
“그게 좋아. 형한테 해 주는 게 좋아.”
진우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정말 좋다고. 그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라고.
진겸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진우는 그의 이해를 바라지 않았다. 여태 바란 적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하나 남은 내 가족이니까. 왜? 이상해?”
“……아니. 그럼 나도 하게 해 줘. 나도 너한테 해 줄래. 나한테도 넌 하나 남은 가족이잖아.”
하나 남은 가족.
진우는 그 말에 울렁이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에 힘을 줬다.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눈을 감았지만 눈꺼풀이 잘게 떨려 앞에 선 진겸에게 다 보일 게 뻔했다.
이대로도 충분했다. 더 바라지 않는다. 그가 무슨 짓을 해도 밉지 않았고, 상처를 줘도 괜찮았다. 견딜 수 있었다. 그저 제 눈앞에만 있어 준다면 뭐든 상관없었다.
진겸이 어떤 의미로 저 말을 했는지는 몰라도 진우에겐 큰 의미였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였으니까.
“……형.”
떨리는 진우의 목소리에 마음이 흔들렸다.
이렇게까지 원하는데 그냥 집에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그랬다간 몸은 편할지언정 마음이 불편해서 없던 병이 생길지도 모른다. 충분히 쉬어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으로도 건강해야 하는 법이다.
진겸은 최대한 타협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절대! 네가 걱정할 만큼 무리 안 할게. 앞으로 무슨 일 있을 때마다 네가 귀찮다고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옆에서 다 말할게.”
그래도 진우의 얼굴은 풀릴 줄 몰랐다.
“나도 이번 일로 느낀 게 많았어. 그래도 나 아프진 않았잖아. 오히려 체력도 붙었어.”
“…….”
“내가 번 돈으로 삼겹살 사 주는 것도 너무 기뻤고……. 일해서 번 건 아니어도 너한테 용돈도 줄 수 있어서 기뻤어.”
진겸이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진우가 정말 반대한다면 그의 마음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밀어붙일 생각은 없다. 다만 지금까지 말한 것과 달리 몰래 일할 계획이었다.
“……알겠어. 대신 정말 다 말하기야. 이번처럼 혼자 뭐 하려고 하지 마.”
눈치를 살피면서도 뜻을 굽히지 않는 진겸의 눈동자를 보고 있자니 진우는 더는 안 된다는 말을 할 수 없었다.
진겸이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을 때 경험도 중요하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꾸준히 나가면서 재미있어하는 것 같아 그냥 둔 거였다. 만약 힘들어하거나 체력에 문제가 생겼으면 바로 그만두게 했을 거다.
3시간 일하고 번 45,000원.
그 소중한 돈을 본인에게 쓰지 않고 모았다는 것이 가장 기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