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36)화 (36/92)

36화

그제야 원범이 어중이떠중이가 아님을 깨달았다. 그의 눈은 날것이었다. 정제되지 않은 맹수의 눈. 만약 선글라스를 낀 모습이 아니라, 저 눈을 먼저 봤다면 절대 속단하지 않았을 거다.

이후 너무도 뻔한 결말을 맞이했다.

원범이 나서지 않아도 이청오 혼자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임기표는 남자들이 하나둘씩 쓰러질 때 혼자서 몰래 회의실을 나가려다가 길이 막혀 서둘러 구석에 몸을 숨겼다.

“사, 살려 주세요!”

임기표는 청오가 다가오자 본능적으로 다급히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빌었다. 얼굴은 공포에 질려 창백해졌고 사지는 통제를 벗어난 듯 덜덜 떨리고 있었다.

청오는 정장 주머니에서 새빨간 명함 하나를 꺼냈다.

“내일 중으로 돈 마련 못 하면 연락해.”

명함을 받은 임기표는 빨간 바탕에 흰 글자로 쓰인 단어를 보고 몸을 더 움츠려야 했다.

<즉시 대출 가능!>

“HAM 전자에서 왔다고 하면 싸게 빌려줄 거야. 아, 혹시라도 돈 떼먹고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 사람 하나 찾는 거…… 일도 아니니까.”

회사로 돌아온 원범이 이사실로 들어가자 서류철을 든 양 비서가 따라 들어왔다. 책상 한쪽에 쌓인 서류철 위에 가지고 온 걸 놓았음에도 그는 나가지 않았다.

정장을 벗어서 옷걸이에 건 원범은 궁금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은 양 비서를 귀찮아했다.

“어떻게 하셨어요? 청오도 같이 갔다면서요!”

“소식 빠르네. 둘이 나 몰래 연락해?”

“말을 맞추려면 해야죠. 돈 받기로 하셨어요? 16억 받으면 저도 보너스 주시는 거죠?”

목적이 그거였나 보다.

“그건 청오한테 물어보고 받아. 뒤처리 잘하고.”

“예!”

“회사에 자리 하나 만들어. 가능한 빨리.”

“자리요?”

나가려던 양 비서가 다시 뒤로 돌아서 되물었다.

“어. 힘쓰지 않고 머리도…… 이왕이면 안 쓰는 단순한 자리로.”

* * *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후 진겸의 일과는 비슷했다.

이제는 얼마 남지 않은 신발과 옷도 처리하였고 그 돈은 차곡차곡 통장에 쌓여 갔다. 그리고 산책도 다녔다.

햇볕이 강해 모자를 쓰고 다녀야 했는데 캡모자가 커서 뒤에 있는 끈을 제일 안쪽으로 조였다. 모양은 별로 예쁘지 않았으나 진겸은 개의치 않았다.

동네 이곳저곳을 다니기도 하고 공원을 산책하기도 했다. 가끔은 공원 벤치에 앉아 멍하니 지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다가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간 날도 있었다.

빙의 당시 한 달 후 수술이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복숭아 알레르기로 쓰러진 후에 한 달이 더 늘어났다.

그전까지 건강한 몸을 만들어 오라고 훈일이 신신당부해서 일부러라도 걷는 중이다.

바람이 선선해서 오래 걸었더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잠시 쉬기 위해 그늘이 드리운 벤치에 앉았다.

그늘에 있어서 망정이지 타는 듯한 저 태양 아래 있었으면 엉덩이가 뜨거워서 바로 일어났을 거다.

티를 붙잡고 펄럭이자 땀이 식어 가는 게 느껴졌다.

‘집에 언제 가지?’

오늘따라 덥지 않아서 좀 멀리까지 나왔더니 집으로 갈 일이 막막해졌다.

몸만 약한 게 아니라 피부까지 약해서 잠시만 햇볕에 노출되어도 금세 붉게 변했고 그보다 좀 더 오래 있으면 따끔거렸다. 집 냉장고에 알로에 수딩젤이 그냥 있는 게 아니었다.

“……움직이기 귀찮다.”

오래 걸어서 그런지 졸리기까지 했다.

입이 찢어지도록 크게 하품한 진겸은 반쯤 졸다가 억지로 눈을 떴다. 갑자기 자신만 이렇게 한가하게 쉬고 있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알바라…….”

이번에는 제발 괜찮은 일자리를 찾길 바라며 스크롤을 내리고 또 내렸다.

집에서 멀지 않고 시간대도 괜찮은 곳에 지원하고는 다시 집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도 샀다.

요리를 진우가 해서 장을 보는 것도 그의 몫이긴 했다. 그래도 너무 먹고 싶은 게 있을 땐 이렇게 진겸이 사 들고 가기도 했다.

자극적인 걸 먹으면 안 된다는 걸 알기에 최대한 억눌렀지만, 정말 먹고 싶어서 결국 사 버렸다.

그래서 결정된 오늘의 메뉴는 떡볶이였다. 떡보다 어묵이 더 많으니 어묵볶이라고 하는 편이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자극적인 건 절대 안 된다는 진우를 어떻게 설득할까 고민하면서 재료가 든 마트 봉투를 들고 힘이 제대로 안 들어가는 다리를 질질 끌며 언덕을 올랐다.

‘어묵이 뭐로 만들더라? 떡은 쌀이고 어묵은…… 생선!’

좋은 생각이 났다.

‘어묵 재료가 생선이니까. 어묵볶이를 먹는다는 건 생선을 먹는 거지.’

즉, 자신이 만드는 떡볶이는 굉장히 건강한 음식이라는 거다.

이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진우가 수긍할지는 몰라도, 진겸은 혼자서 흡족해하며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기까지 했다.

“……힘들다.”

차라리 평지였다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집으로 가는 길이 오르막이라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갔다.

“꼭 이사 가자고 해야지.”

빚을 다 갚아야 갈 수 있을 테니, 수술 후에는 제대로 된 직장을 찾아서 돈을 벌겠다고 다짐했다.

퇴근한 진우는 활짝 열려 있는 현관에 놀라 서둘러 집 안으로 들어왔다.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매캐한 연기가 그를 반겼다. 코를 찡하게 울리는 매운 탄내에 진우는 저도 모르게 콧잔등과 미간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냄새……. 형?”

평소였다면 철제 계단을 밟는 소리에 진우가 왔다는 걸 진작 알아챘을 진겸이 설거지에 집중하느라 그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어, 왔어?”

“응. 이 연기는 뭐고…… 지금 뭐 해?”

“뭐 하긴, 설거지하지. 배고프지? 우리 오늘은 시켜 먹을까?”

“당분간 집밥 먹기로 했잖아.”

역시나 단호하게 말하는 진우였다.

안으로 들어온 진우의 시선이 집 안 곳곳을 향했다. 제일 먼저 진겸이 닦고 있는 냄비를 보고 그 옆에 놓인 쓰레기통을 봤다.

검은 비닐봉지가 씌워진 쓰레기통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시커먼 덩어리가 버려져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깔려 끝부분만 살짝 보이는 건 반창고 껍질이었다.

여전히 설거지에 집중하는 진겸을 지나쳐 쓰레기통 앞에 쭈그려 앉았다. 손가락으로 시커먼 덩어리를 옆으로 치우자 껍질 뭉텅이가 나왔다.

진우는 제 손가락에 묻은 검은 것에는 관심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일어나 진겸의 팔을 잡았다.

“다쳤어?”

“어? 어……. 많이는 아니고 조금.”

“어딜 다쳤는데?”

진우의 눈동자가 빠르게 진겸을 훑었다. 드러난 곳에는 반창고가 없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껍질 양이 꽤 많았다. 그래서 조금 다쳤다는 말이 거짓이라는 건 금방 들통났다.

“손가락. 진짜 많이 안 다쳤어.”

“손가락은 왜? 설거지 그만하고 고무장갑 벗어 봐.”

아예 싱크대 수도꼭지를 잠근 진우는 말하다 말고 자기가 직접 고무장갑을 벗겼다.

“……이게 조금이야?”

진겸의 양손은 반창고투성이였다. 특히 왼손 검지와 엄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머쓱해진 진겸은 잡힌 손을 꼼지락거렸다. 움직일 때마다 쓰라리긴 했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다.

진우는 자꾸 오므리려는 손가락을 제 손바닥에 올려 쫙 펴게 했다. 피가 났는지 붉은 자국이 남아 있는 반창고도 있었다.

기억을 잃기 전에는 집안일엔 관심조차 두지 않던 진겸이었다. 먹은 것도 그냥 싱크 볼에 담아 두는 게 다였다. 태어나서 해 본 칼질이라고는 학생 때 커터칼 쥔 것밖에 없었을 터였다.

무슨 일이든 하려는 의욕을 가진 건 긍정적인 현상이다. 하지만 몸을 다치게 하면서까지 일을 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저녁 돕는 것도 못 하게 한 건데…….

속상했다. 이 작은 손에 흉터라도 남으면 어쩌려고 그랬는지.

굳은 얼굴로 손을 응시하던 진우의 눈동자가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아프진 않아?”

“응. 안 아파. 하나도 안 아파!”

진겸은 서둘러 대답했다. 또다시 진우의 역린을 건드리고 싶지 않았다.

“…….”

“진짜야. 나 정말 안 아파. 어? 진우야. 나 진짜 안 아프다니까?”

“……알겠어.”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말하는 진겸 때문에 진우의 고개가 뒤쪽으로 빠졌다. 조금 풀어진 표정을 본 진겸이 눈을 곱게 접으며 웃었다.

진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반창고 위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앞으로 요리하지 마. 먹고 싶은 거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다 할게. 근데 저거…….”

진우의 시선이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뭐 만들려고 한 거야?”

“…….”

“매운 냄새도 나던데.”

“……떡볶이.”

땅굴을 파고 들어갈 정도로 목소리가 작아졌다. 점차 고개도 반대편으로 움직였다. 쓰레기통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의지가 가득 담긴 행동이었다.

“아…….”

떡볶이의 흔적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의 시커먼 형체에 진우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떡볶이가 쉬운 음식은 아닌 게 맞다. 만들 때 잘 저어 주지 않으면 떡이 냄비에 붙어 버리는 불상사가 자주 일어나곤 한다.

더구나 내용물이 저렇게 시커메졌을 정도면 냄비는 이미 회생 불가일지도 모른다. 특히나 진겸의 손으로는 복구가 불가능했을 게 뻔했다.

진우가 싱크대 앞에 섰다. 주방 세제를 얼마나 많이 쓴 건지 아직도 거품이 가득했다. 그 사이로 검은 물도 보였다. 거품과 섞인 검은 물이 냄비의 죽음을 알리고 있었다.

머쓱하게 웃은 진겸이 서둘러 그 앞을 막아서려 했으나 이미 진우가 본 후였다.

“떡볶이 재료 남은 거 있어?”

“조금……?”

“형은 요리하느라 고생했으니까 잠깐 쉬어. 냄새 다 빠지려면 시간 꽤 걸릴 것 같은데…… 더운 거 아니면 밖에서 좀 있을래?”

평소라면 방에 들어가서 쉬라고 했을 텐데 매캐한 연기와 냄새가 가득한 집에 계속 있으라고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벌여 놓은 상황이 어떤지 알기에 진겸은 별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를 보던 진겸이 밖으로 나가자 진우는 본격적으로 청소를 시작했다.

환기 먼저 시키려 집에 있는 창문을 확인하는데 이미 진겸이 화장실에 있는 작은 창문도 열어 놓았다. 나름대로 열심히 뒷정리했다는 증거였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