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임기표는 공장 책임자의 수많은 전화와 메시지를 무시했다. 절대 안 된다는 말이 적힌 메시지들도 점차 뜸해지더니 몇 시간 뒤엔 오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 라인을 돌리는 줄 알았다.
‘그래, 안 되는 게 어디 있어! 하면 다 되지.’
하지만 다음 날 진행 상황을 물어보려 공장 책임자에게 메시지를 보내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지금 생산하느라 바쁘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여기고는, 인센티브를 받으면 뭘 할지 행복한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납품일 전날이 되었다. 이쯤이면 공장에서 슬슬 연락이 와야 하는데 깜깜무소식이다. 언제쯤 마무리가 되나 싶어 확인차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들려온 대답은 그가 원한 게 아니었다.
“예? 생산 제품이 바뀌었다뇨?”
― 그저께 공장이 매각됐어요. 기존에 있던 제품들 반 이상이 생산 중단됐고요.
“아니, 그걸 이제 말하면 어쩝니까! 사장이 갑자기 왜 바뀌어요!”
―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처음에 내 전화 개무시한 게 누군데 그래? 그리고 얻다 대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 나보다 어린 자식이!
뚝 끓어진 전화에 임기표는 황당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너무도 뜬금없는 일이 벌어진 거였다.
이번 일은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닫자마자 사장에게 보고했다.
사장도 처음 듣는 소리인지 황당해하는 어조로 물었다.
― 공장이 매각됐다니?
“저도 잘…… 생산이 얼마나 됐는지 확인하려고 전화했는데 사장이 바뀌었다면서 더는 생산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 미친 거 아니야? 당장 내일이 납품일인데!
“저도 미치겠습니다! 거기 공장, 사장님 지인분 회사 아니었습니까? 갑자기 매각이라뇨!”
― 이틀 전에 외국 간다더니…… 이렇게 뒤통수를 치고 가? 이 자식!
사장의 분노가 전화기를 뚫고 이쪽까지 느껴졌다.
사장은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다. 지금에야 그나마 간판을 내걸 수 있는 사업을 겸하고 있지만 그가 원래 하는 일은 대부업체였다. 그것도 은근히 규모가 큰 곳이었다.
임기표는 귓가를 찢는 유리 깨지는 소리에 어깨를 움츠렸다. 사장이 분을 못 이겨 던진 게 깨진 모양이다.
― 네가 위약금도 33배로 측정했다며! 임기표, 너! 이 일로 위약금 물게 되면 그거 전부 네가 해결해야 할 거야! 알겠어? 당장 해결해!
“사, 사장님!”
가차 없이 끊어진 전화에 임기표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애초에 그 공장의 책임자가 사장의 지인이었기에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주고, 함량 속이기도 할 수 있었다.
더구나 현재 다단계 사업주는 자신이다. 이대로 정말 납품일을 맞추지 못해 33배를 물어 주는 일이 발생한다면 구속이 되기 전에 사장 손에 죽을 가능성이 컸다.
임기표는 서둘러 다른 공장 라인을 돌릴 수 있는지 사무실 직원들과 함께 찾아봤지만, 생산해 줄 공장은 존재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수습하려 했으나 납품일은 속절없이 다가와 버렸다.
밤새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한 임기표는 시뻘건 눈으로 아침을 맞이해야 했다.
“하…….”
웬만한 직장인들이 출근했을 시간인 오전 9시. 임기표는 기다렸다는 듯이 검은색 명함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현재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할 생각이었다. 아무리 계약서에 명시가 되어 있다고는 하나, 물건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3분의 1은 준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협상의 여지는 있다는 희망을 안고 상대방이 받길 기다렸다.
하지만 명함에 적힌 번호의 주인은 원범이 아닌 그의 수족, 이청오였다.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던 청오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지금 부장님이 자리에 없어 자신이 대신 받았다는 말과 함께 방문 의사를 밝혔다.
“예, 예…… 아, 직접 오신다고요?”
― 전화로 끝낼 사안은 아니지 않습니까. 점심쯤 부장님과 함께 사무실로 가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 부장님께 죄송하다고 꼭 전해 주시고 나머지도 금방 생산할 수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도 꼭 해 주세요.”
― 전해 드리겠습니다. 이따 뵙죠.
통화를 마친 임기표는 의자에 축 늘어졌다.
“어쩐지 불길하더라니…….”
그래도 방금 통화한 사람과 생각보다 대화가 잘 풀린 듯해 긴장이 살짝 풀어졌다.
약속대로 점심쯤 그때와 같은 선글라스를 착용한 원범이 사무실을 찾았고, 그 뒤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이청오도 함께였다.
청오는 대놓고 사무실을 쓱 훑었다. 직원들을 전부 내보낸 건지 임기표 혼자였다.
“어서 오세요, 부장님. 뒤에 있는 분은……”
“아까 통화했던 사람입니다.”
“아, 그러시구나. 이쪽으로 오세요.”
회의실로 안내했다. 전과는 다르게 다과도 준비해 두었다.
임기표는 두 사람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서 있었다. 하지만 앉은 사람은 원범 혼자였다.
“편하신 자리에 앉으세요.”
“이게 편합니다.”
청오는 원범의 뒤쪽에 자리를 잡을 뿐 앉지는 않았다.
그 모습에 임기표가 살짝 눈을 굴렸다. 웬만하면 앉으라고 할 법도 한데 원범의 입은 굳게 다물려 있었다.
눈치를 살피던 임기표는 슬쩍 웃으며 원범의 반대편으로 가서 앉았다.
임기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날씨라든가 경제 동향에 대한, 궁금하지도 않은 말들을 이어 나갔다. 상대방이 반응하지 않는데도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원범이 천천히 다리를 꼬았다. 옷감이 스치는 소리밖에 나지 않았는데도 왠지 모를 긴장감이 흘렀다.
“물건 준비가 안 됐다고.”
“아…… 그 부분은 정말 죄송합니다. 갑자기 공장이 매각되는 바람에……”
임기표는 눈썹을 축 늘어트리고 굉장히 면목 없다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원범의 눈에는 꾸며 낸 표정이라는 게 너무 잘 보였다.
“그딴 변명이나 듣자고 여기까지 온 게 아닌데.”
그 말에 임기표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시일을 조금만 더 주시면 금방 준비할 수 있습니다. 전화로 말씀드렸다시피 약속드린 수량의 3분의 1은 재고가 있습니다!”
“내가 원한 건 3분의 1이 아닌 전량 납품입니다.”
지금까지 반말만 하던 원범이 처음으로 존댓말을 썼다. 그는 허공에 들린 발끝을 까딱거렸다. 그 행동만으로도 언짢아하고 있는 게 티가 났다.
옆에 서서 임기표를 응시하고 있던 청오는 벽 너머로 들리는 구둣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인원이 꽤 많은 듯했다.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는 건 예상했지만 너무 딱 맞아떨어지니 재미가 없었다.
원범은 허벅지에 올려놓았던 손을 테이블로 옮기더니 천천히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임기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아까부터 원범이 움직일 때마다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이상하게 자꾸만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의 뒤에도 사람이 있는데 눈동자는 원범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이상했다. 결코 좋은 현상이 아니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져 갔다.
연신 눈을 깜빡이던 임기표가 테이블에 올린 손을 조심스레 아래로 내렸다. 주머니에 넣어 놨던 핸드폰이 잘 있는지 확인했다.
그 모습을 전부 보고 있던 원범이 한쪽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
“계약을 이행하지 못했으니 계약서에 적힌 대로 5천만 원에 대한 위약금 33배. 총 16억 5천만 원. 배상하시죠.”
“예? 아니……. 이렇게 급하게 결정하지 마시고 당장 가져가실 수 있는 물건은 있으니 시일을 조금만 더 주신다면 전량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임기표는 침착하려 했으나 액수를 들으니 눈동자가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진겸에게 태연스레 사기 칠 때랑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다.
하지만 원범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자, 임기표가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그는 가슴이 부풀어 오를 정도로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우리가 기한을 아예 못 지킨 건 아니잖아요? 수량이 조금 부족할 뿐이죠. 당장 그 많은 제품을 쓸 것도 아니잖아요. 서로 좋은 쪽으로 대화를 하자고 오신 거 아닌가요?”
“서로 좋은 쪽으로 대화라…….”
원범이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한 대 맞으면 이빨이 나갈 것 같은 크고 단단한 손이었다. 흉터가 가득해 펜을 잡는 손처럼 보이진 않았다.
“나는 그때 물어봤습니다. 공장에 연락 안 해도 되느냐고. 하지만 맞출 수 있다고 호언장담한 건…… 그쪽 아니었나?”
임기표의 미간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원범의 입꼬리는 만족스럽다는 듯 올라갔다.
“난 16억 5천, 받아야겠습니다.”
협상은 없었다.
임기표는 구겼던 미간을 펴고는 목소리에 힘을 줬다.
“대화로 마무리하고 싶은데 협조해 주시죠.”
어쩐지 이를 악문 듯한 투였다.
하지만 끝까지 원범은 협상 따윈 없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임기표는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발송했다.
그 순간 회의실 문이 벌컥 열리면서 좁은 문으로 건장한 남자들 몇이 들이닥쳤다.
두 사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떠한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난 원범이 살짝 흘러내린 선글라스를 검지로 올렸다.
“요즘 시대에 너무 구식을 택하시네.”
“옛것이 좋은 법이죠.”
“나도 옛것이 좋긴 한데, 이젠 시대에 맞춰서 살아야지. 옛것만 고집하면 뒤처지거든.”
임기표는 예상했던 반응과 달라서 조금 당황스러웠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남자들이 우르르 들어오면 놀라기 마련인데 두 사람은 너무 침착했다.
그래도 마지막 선택권을 주겠다는 의미로 다시 한번 물었다.
“기어코 계약서대로 하시겠다?”
“그러라고 있는 게 계약섭니다. 임기표 씨.”
“계속 그렇게 고집부리다간 안 좋은 꼴 당할 텐데도요?”
남자들을 향해 서 있는 원범의 옆얼굴을 빤히 응시하던 임기표는 흠칫 놀랐다. 그러고는 다급하게 의자를 뒤로 물리며 뒷걸음질 쳤다.
원범이 계속 선글라스를 쓰고 있어서 그의 눈을 지금 처음 본 거였다.
‘잘못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