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다단계 관련 영상에서 봤던 그들이 가장 흔하게 쓰는 수법이 떠올랐다.
“……지인 섭외.”
제일 편하고 쉬운 방법이다.
낯선 사람이 아니라서, 자신이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라서 경계심이 적기 때문이다.
진겸은 침대 아래 앉아 등을 기댄 채 천장을 바라봤다. 대낮이라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에 눈이 부신 것도 잠깐이었다.
축 늘어트렸던 오른팔을 들어 올렸다. 내리쬐는 햇빛으로 인해 피부가 더 창백해 보였다.
구부리고 있던 손가락을 쫙 폈다. 섬섬옥수라는 사자성어가 너무 잘 어울리는 손이었다.
“진우.”
조용한 집에 진겸의 목소리가 낮게 울려 퍼졌다. 이름을 말한 뒤 엄지를 살포시 접었다.
“선수혁, 탁원범, 의사 선생님, 상훈 형…….”
그리고 한 명씩 불러 가며 손가락을 접었다.
접힌 손가락은 고작 다섯 개.
주먹이 된 손을 보다가 마지막에 접었던 새끼손가락을 다시 폈다.
상훈은 ‘백진겸’의 인연이 아닌, 오로지 자신과 얽힌 사람이었다. 아르바이트하면서 만난 인연이 얼마나 갈진 몰라도 그것만으로도 괜찮았다.
이제 접힌 손가락은 네 개뿐이다.
“진짜 아는 사람이 없네.”
당연한 일임에도 어쩐지 씁쓸했다.
멍하게 손을 보던 진겸이 별안간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내려갔던 양쪽 입꼬리도 금세 위로 올라왔다.
이제는 다신 볼 일 없는 사람이다. 길에서 만나도 그냥 스쳐 지나가는 행인인 거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렇다고 상대방을 이용하려는 사람과 굳이 인연을 이어 갈 필요는 없다.
“……뭐, 앞으로 양 손가락도 다 접고 발가락도 다 접을 만큼 만나면 되지!”
세상은 넓고 앞으로 만날 사람은 많다. 이번 일을 계기로 상대방을 무조건 믿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진겸은 양손 모두 주먹을 꽉 쥐고서 허공에 휘둘렀다. 어제 너튜브에서 배웠던 호신술 영상을 보고 따라 하는 거였다.
앉아서 하다 보니 몸이 들썩이고 자연스럽게 다리도 움직였다. 버둥거리는 것처럼 보여도 스스로에게는 기운을 북돋아 주는 행위였다.
“으합!”
힘찬 기합과 함께 이번에 느꼈던 모든 안 좋은 감정을 훌훌 털어 냈다.
* * *
진우는 회사로 가는 길에 아까부터 궁금했던 걸 물었다.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뭘?”
“계약 건이요. 왜 그렇게 하셨는지 궁금해서요.”
원범은 검지로 제 다리를 툭툭 쳤다.
“궁금해?”
“……예.”
“그럼 오늘부터 야근해야 할 거야.”
“예?”
왜 그랬는지를 물었을 뿐인데. 갑자기 야근이란다.
진우가 어이없다는 듯 눈을 깜빡거렸다.
원범이 시간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돌려 운전하고 있는 진우를 봤다.
“들어가면 양 비서 도와서 물건 어디서 받는지 확인하고 선수 쳐.”
“……물건을요?”
“어. 아까 계약 조항에 넣었잖아. 물건 납품 못 하면 위약금 물기로. 그걸 잘 이용해 보자고.”
핸들을 쥔 진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등에 시퍼런 핏줄이 드러났다가 허탈한 숨과 함께 사라졌다.
듣도 보도 못한 HAM전자 영업부장이라는 명함을 내밀 때부터 뭔가 일을 벌일 거란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을 노렸을 줄이야.
“처음부터 이러실 생각이셨어요?”
“어.”
원범의 방법이 나쁜 건 아니다.
게다가 원범은 위약금 조항을 명시할 때 꽤 높은 배액을 불렀다.
[내 나이가 올해로 33이니. 33배로 할까?]
[33배요? 너무 높습니다. 3배면 충분하죠.]
[납품일 못 맞출 것 같으면 지금 관두고.]
꼭 못 맞출 것 같다는 뉘앙스였다. 처음부터 자꾸만 무시하는 태도가 기저에 깔려 있어서 임기표는 원범이 거슬렸는데 계약 사항을 주고받는 상황에서도 그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무시당하는 건 상당히 기분이 나쁘다. 액수가 큰 데다가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물량을 원한 사람이 없어서 망설이고 있던 임기표의 마음이 한순간에 굳어졌다.
납품일을 제대로 맞춰서 저 콧대를 누르고 싶었다. 딱히 태도가 바뀔 것 같진 않지만, 꽤 많은 마진을 남긴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어깨가 펴질 거라는 건 분명했다.
[……아닙니다. 33배로 하죠.]
임기표는 계약서를 쓰는 동안에도 사라지지 않은 찝찝함을 애써 외면했다. 정말 해도 괜찮은 계약이 맞는 건지 헷갈렸다. 게다가 납품 기한은 사흘 후. 꽤 빠듯한 일정이기는 했다.
[계약서는 작성했습니다. 확인해 보시죠.]
프린트한 계약서를 내밀자 원범은 내용을 쓱 훑어보더니 그대로 사인했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그냥 위에서 아래로 눈동자만 쭉 내린 정도였다. 게다가 계약서에 적힌 계좌 번호로 바로 입금까지 끝냈다.
거기서 임기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영업부장 정도면 재량껏 계약을 체결할 순 있을 거다. 그래도 큰 건은 상부의 결재가 필요할 텐데 그 자리에서 입금까지 일사천리였다.
더구나 통장 입금자명이 회사가 아닌 개인, 즉 임기표 본인의 통장인데도 개의치 않고 입금한 것이 그의 경계심을 누그러트리는 데 한몫했다.
그 행동이 영업부장이라면서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으로 보이게 한 거였다.
게다가 처음에는 인센티브를 주지 않기에 5천만 원에 대한 건 고스란히 임기표에게 오는 거였다.
무엇보다 앞으로 잘 구슬리면 거래는 계속될 수도 있을 터. 그렇게 얼렁뚱땅 거액의 계약이 체결된 거다.
정말 답 없는 멍청한 짓을 한 거였다.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정신을 차려 보니, 이미 계약서에 사인도 하고 전액 입금을 받은 뒤였다.
진우는 아까의 상황을 떠올렸다가 머릿속으로 계산해 봤다.
5천만 원. 위약금 33배. 총 16억 5천만 원.
과연 그 회사가 그만한 자금이 있을까 싶었다. 그리고 원범이 계획한 것과 반대의 상황도 떠올렸다.
“기한 내에 납품하면 어쩌시려고요?”
“못 하게 하라는 말 잊었어?”
“아까 자체 생산 제품만 고른 이유가 이거였군요. 공장이 외국에 있으면 애초에 기간을 맞출 수 없을 테니…… 한국에 있을 거고. 생산 라인을 아예 막거나 물건을 빼돌리거나?”
“잘 이해했네. 그럼 앞으로 해야 일도 알겠지?”
보통 규모가 크고 실매출이 꽤 된다면 모를까, 유명한 상품들을 싸게 납품받아서 판매하면 되는데 굳이 자체 생산을 할 필욘 없다. 그게 오히려 더 손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우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만약 재고가 정말 있으면요?”
한쪽 입꼬리를 올린 원범이 차갑게 대답했다.
“사전에 알아보지도 않고 던질 만큼 멍청한 놈으로 보였어, 내가?”
애초에 다른 제품으로 대체할 수 없는 자체 생산 품목을 고른 거였다.
임기표가 스스로 미끼를 물어 줬으니 원범은 잡아당기기만 하면 되는 거였다.
“양 비서가 괜히 야근한 게 아니야.”
원범의 말을 되새긴 진우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어제 자신은 정시 퇴근했지만, 두 사람은 야근을 했다. 탁 이사야 워낙 업무량이 많다 보니 야근이 잦은 편이다. 하지만 야근을 싫어하는 양 비서까지 남아 있겠다고 하길래 의아하기는 했다.
‘어쩐지. 평소엔 안 하던 지각을 하시더라니. 이것 때문이었네.’
일이 밀렸다면 자신과 함께하면 되는 것을 혼자 하겠다고 한 것도 평소답지 않았다. 웬만하면 남아서 같이 하겠다고 했겠지만, 어제는 진겸이 걱정되어 애써 외면하고 퇴근했다.
“아까 그 명함도 양 비서가 만든 거군요. 조사도 양 비서가 했고요.”
“알았으면 가서 도와.”
“……예, 알겠습니다.”
진겸이 얽힌 일이니 원래라면 자신이 해야 했을 일인데 양 비서가 하게 되어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게다가 회사와 관련된 일도 아닌데 동원된 것이 더 마음에 걸렸다.
‘들어가는 길에 커피라도 사 들고 가야겠네.’
겸사겸사 제 것도.
* * *
임기표는 세 사람이 회사에서 떠난 후 이내 물량 확보에 나섰다.
계약을 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단가가 있다 보니 창고에 쌓아 두지 않는 제품이기 때문이었다.
공장과 창고를 관리하는 직원을 통해 알아보니 납품해야 할 제품의 3분의 1밖에 재고가 없었다. 그것도 묵힌 제품이었다.
상황을 파악한 후 바로 사장에게 연락했다.
“어떻게 할까요?”
―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공장 라인 당길 수 있는 거 다 당겨. 오늘 저녁부터 가동하면 물량 맞출 수 있을 거야.
“재료가 남아 있을까요?”
― 없으면 없는 대로 만들라고 해. 그깟 함량 좀 줄였다고 소비자가 알 것 같아? 몰라. 절대 몰라! 이참에 아예 반으로 줄이고 향만 내라고 해. 진하게.
“그래도 기업 사은품으로 나가는 건데 괜찮을까요?”
― 위약금 네가 물 거야? 계약을 그따위로 했으면 잔말 말고 돌려!
“예…….”
사장은 이러고 있을 시간에 공장에 연락하라며 전화를 끊었다.
임기표는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물량을 제때 납품하기 위해서는 이 방법밖에는 없다는 결론을 내고는 이내 공장에 연락했다.
공장에서는 화장품 용기와 홍삼 포장지가 그만큼 없는 데다가 요즘 사람이 부족해 물량 맞추는 게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임기표는 막무가내였다.
“화장품 용기는 리뉴얼됐다고 할 테니까 다른 거 쓰시고 홍삼 포장지도 그렇게 하세요. 요즘은 리뉴얼되는 거 많아서 이상한 거 못 느낄 겁니다!”
― 그 리뉴얼도 시간이 있어야 만들죠. 라벨도 제작해야 하고 포장 박스도 필요한데, 사흘 만에 이 물량을 어떻게 만듭니까!
“무조건 만드세요. 무조건! 만약 이번 거래가 무산되면 공장 측 책임도 있는 겁니다!”
― 예? 이봐! 임 이사!
전화를 끊은 임기표는 의자에 앉아 책상 위로 발을 올렸다. 이렇게까지 말을 했으니 공장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생산할 거라 생각해서였다.
현장을 모르고, 공장 돌아가는 시스템을 모르는 사람들은 제품이 뚝딱 만들어지는 줄 알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제품 하나가 완성되기까지 여러 라인에서 체계적으로 부품이 마련되어야 한다. 만약 한 파트에서 불량이 발견되면 전 제품을 회수해야 할지도 모르기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