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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33)화 (33/92)

33화

지금까지 본인의 의지로 다른 사람을 집에 들인 적은 없었다. 무작정 밀고 들어오는 사채업자들에게 맞아 가면서도 집만은 사수했다.

백진겸은 뭐 하러 그러냐며 그냥 들어오게 하면 되지 않느냐고 했지만, 진우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옥탑방은 진겸과 자신의 흔적만 있는 보금자리였으면 했다.

하지만 백진겸 혼자 있을 때 사채업자를 막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지지 않고 그들에게 바락바락 대들었다. 이딴 집이 뭐가 중요하냐고 투덜대면서도 진우가 원하질 않아서 그것만큼은 어떻게든 지켜 냈다.

이런 걸 보면 백진겸도 정말 진우를 싫어했던 건 아닌 듯했다.

몇 번 그런 일이 반복됐을 때쯤, 백진겸이 가슴을 부여잡고 주저앉은 날이었다. 호흡이 어려워 괴로워하자 사채업자들은 그를 놔두고 그대로 도망갔다.

그들도 백진겸의 병을 알고 있던 터라 그가 잘못되면 백진우가 돌아 버릴 거라는 것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돈을 받지 못하는 건 본인들이다. 더구나 꼬박꼬박 원금과 이자를 내는 진우를 더는 압박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날 이후로 사채업자들은 집에 찾아오지 않았다.

진우는 이 사건을 아직도 모른다. 그저 사채업자들이 더는 집으로 오지 않는다고만 알고 있었다.

어쨌든 진우는 누가 되었든 보금자리에 찾아오려는 다른 사람들의 발길을 반기지 않았다.

진우는 눈을 굴리고 있는 진겸을 보며 싱긋 웃었다.

“형, 더우니까 수박만 사서 바로 들어가. 괜히 이것저것 사서 무겁게 올라가지 말고. 응?”

“…….”

진우와 원범을 번갈아 보던 진겸이 몸을 돌려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트에서 사다 드릴까요? 생수는 냉장고에 있어서 시원하게 드실 수 있어요!”

나름 해결책이라고 내민 거지만 원범이 원하던 대답은 아니었다.

진우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지 않았다. 이걸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눈치가 없다고 해야 할지.

참 다른 의미로 자신을 놀라게 한다.

“아니면 밑에 카페 있는데 거기서 커피 사다 드릴까요? 원래 직장인들은 점심 먹은 다음에 커피를 마셔야 제대로 된 점심을 보낸 거라고 했거든요!”

“어디서?”

“너튜브에서요!”

원범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었다.

도대체 너튜브에서 어떤 걸 본 건지.

아까도 환불하러 갈 땐 선글라스를 껴야 한다고 하질 않나. 이번엔 커피를 마셔야 제대로 된 직장인의 점심이란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모든 직장인에게 통용되는 것도 아니었다. 특히 원범에게는 더욱더.

원범은 원래부터 커피를 즐기지 않았다. 종종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마시긴 해도 평소엔 입에 대지도 않는 편이다.

그에 비해 진우는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았다.

집에서는 마시지 않아도 회사에서는 출근하자마자 마시고, 중간에 마시고, 식후에 마시고, 그 후에 또 마신다. 하루에 몇 잔을 먹는지도 모를 정도다.

커피 종류도 가리지 않았다. 가끔 양 비서가 카페에서 사다 주면 그것도 마시고 캡슐 커피, 커피 믹스 등 눈에 보이는 족족 마셨다.

그에 비해 백진겸은 카페인에 과민 반응을 보일 수 있어서 마시지 않았다.

진우는 마침 커피가 당기긴 했지만 참고 있었다. 그런데 진겸이 말을 꺼내니 마시고 싶긴 했다.

진겸은 사 오라고 하면 당장이라도 갈 기세였다.

“난 커피 말고 냉수가 먹고 싶은 거야.”

“아…….”

곰곰이 생각하던 진겸은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더니 차에서 내려 마트로 달려갔다.

그 모습에 진우가 다급히 내려서 뛰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마트 안으로 들어간 후였다.

마트에서 나온 진겸의 손에는 생수가 들려 있었다.

시원한 생수. 즉, 냉수였다.

진겸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뒷좌석 창문을 똑똑 두드렸다. 스르륵 창문이 다 내려가기를 기다렸다가 원범에게 생수를 내밀었다.

“목마르신 거였으면 말씀하시지!”

혼자 착각한 진겸은 굉장히 뿌듯해 보였다.

졸지에 생수를 쥐게 된 원범은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에 실소를 머금었다. 참으로 제 예상을 벗어나는 행동이었다.

진우는 씰룩이는 입꼬리를 그대로 둔 채 진겸의 옆으로 다가갔다.

“가서 푹 쉬어. 오늘 장시간 차 탄 것도 그렇고…… 자꾸 밖에서 먹게 되네. 오늘 저녁은 집에서 먹자.”

“알겠어. 지금 회사 가면 야근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러진 않을 거야. 급한 건 거의 끝냈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고. 응?”

“그럴게. 얼른 가.”

진우는 손을 뻗어 진겸의 뺨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커다란 손이 볼에 닿자 진겸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고양이들이 비비적거리듯 진겸이 부드러운 뺨을 부비자 진우의 손과 입술이 움찔 떨렸다. 전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이다.

진겸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 주어야 한다는 걸 아는데, 같이 있는 며칠 동안 그 마음이 자꾸만 흐릿해져 가고 있었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몸이 약하다는 건 계속 얘기해서 이제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 듯했고, 수술 후에는 새로운 몸에 적응해야 하기에 기억이 꼭 필요한 건 아니었다.

진우는 자꾸만 자신에게 못된 마음을 심어 주는 진겸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겨우 입을 열었다.

“……응. 다녀올게.”

“이사님,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안녕히 가세요!”

아직 창문을 올리지 않은 원범은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진겸이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까지도.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창문을 올렸다. 진한 선팅이 되어 있어서 금세 가려졌다.

원범은 생수를 쥔 손에 힘을 줬다가 풀었다.

“이사님이라…….”

아까 수혁은 형이라고 하더니 자신에겐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사님이라는 호칭을 붙인다.

원범은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진우의 말대로 회사 직원도 아닌데 이사라고 부르는 건 아니지 않나?

딱히 형이라고 불리고 싶은 건 아니었다. 이미 오랫동안 ‘이사님’이나 ‘탁 이사’로 불렸기에 낯선 호칭은 아니다.

그런데 왜 저 입에서 나온 이사님은 낯선 걸까.

‘백 비서도 형이라는 소리를 잘하던데.’

원범은 자신을 형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는지 잠시 생각해 봤지만 없었다.

외동아들인 데다 친척이라고 있는 것들은 그냥 같은 유전자만 나눴을 뿐, 남보다 못한 사이였다.

학생 때도 형보다는 선배라는 소리를 들었다. 고등학교 땐 외국으로 넘어간 후라 애초에 한국말로 대화를 나눌 사람이 적었다.

‘형이라…….’

자신이 생각해도 어이없지만 진겸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 같은 촉촉한 눈동자로 자신을 올려다보면서 형이라고 부르며 환하게 웃는다면 그건 그거대로 색다른 맛일 듯했다.

원범이 차 안에서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할 동안 진우는 밖에서 진겸에게 걱정스러운 말들을 늘어놓았다.

“지금 보니까 여기 수박들이 다 크네. 형이 고르고 싶은 거면 골라 놓기만 해. 내가 올라가면서 가지고 갈게.”

“그 얘기 아까 끝난 거 아니었어?”

“내일도 아플까 봐 그러지.”

“괜찮다니까. 어차피 하는 일도 없잖아. 힘쓸 일 없어. 이제 잔소리 금지! 기다리시겠다. 얼른 가!”

진우의 등을 떠밀었다. 이곳은 마트 앞이고 차를 오래 세워 두면 안 되는 곳이다.

주정차 단속 카메라가 있는 건 아니지만 잠시 세워 두고 마트에 들러 얼른 볼일을 보고 비켜 주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갈게, 갈게. 형도 조심히 올라가.”

“알았대도!”

진우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떼어 내 운전석에 올랐다.

검은 세단이 골목을 빠져나갈 때까지 지켜본 진겸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다가 마트로 향했다. 수박을 사기 위함이었다.

마트 직원의 도움으로 수박을 고른 뒤 품에 안고 언덕을 올랐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계단을 오르자 역시나 탁 트인 공간이 반겼다. 여름이라 해가 길어서 아직도 대낮 같았다.

“……잘 해결된 건가?”

자신이 원범을 걱정할 처지는 아닌 걸 알면서도 괜히 마음에 턱 걸렸다.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던 말이 진심이었다는 걸 알기에 이내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집으로 들어온 진겸은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계속할지 말지 꽤 진지하게 고민했다.

다단계에 속아 넘어간 건 어디까지나 자신의 불찰이다. 일확천금을 노릴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꿈에 잠시 이성을 잃었던 거다.

그러나 그곳에 가게 된 건 상훈에 의해서였다. 그와도 대화를 나눠 봐야 한다고 생각은 한다.

대화로 잘 풀린다면 전단지 아르바이트를 계속하겠지만 만약 아니면…….

“어쩌지.”

방에 주저앉은 채 고민하고 있는데 벨 소리가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하고는 그대로 핸드폰을 뒤집어 소리를 없앴다.

전화를 받으면 자신도 모르게 모진 말을 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내용을 확인한 진겸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고는 비장한 얼굴로 키패드에 엄지를 올렸다.

상훈형

얘기 들었어! 대박이었다며? 근데 치약은 왜 환불한 거야?

오후 5:58

오후 5:59

형! 거기 다단계인 거 알고 있어?

상훈형

다단계라니? 네트워크 마케팅이야ㅋㅋ 다단계랑은 달라

오후 5:59

그게 다단계야!

오후 6:00

답답해하는 이모티콘

상훈형

아니라니까ㅋㅋ 톡으로 이러지 말고 만나서 얘기하자 내일 알바 나오지?

오후 6:01

오후 6:01

아니 안 가! 앞으로도 안 갈 거야 형이 다단계인 거 알고 있으면 됐어

상훈형

왜 안 와?

오후 6:02

상훈형

진겸아

오후 6:12

상훈형

오후 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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