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31)화 (31/92)

31화

음식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진겸에겐 너무도 길었다. 수혁이랑 있을 때는 서로 대화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서먹했다.

딱히 불편한 건 아니지만 이런 자리를 또 갖자고 하면 한 번쯤은 고민할 것 같은 어색함이다.

그런 와중에 원범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갔다. 그제야 진겸이 굳은 어깨를 풀고는 숨을 푹 내쉬었다.

“많이 불편해?”

“응? 아니…… 불편하다기보단 어색해서 그래. 같이 밥 먹을 줄은 몰랐거든.”

“나도 몰랐어. 형 혼자 보내기 미안했는데 오히려 잘됐지. 여기 음식 맛있어. 간도 적당하고 건강식이야.”

외식은 자제하라던 훈일의 말을 착실히 지키고 있었다. 지난번 수혁과 한우를 먹은 것 말고는 밖에서 사 먹지 않았다. 삼시 세 끼 전부를 집에서 해결하고 있다.

진우가 아무리 정성을 들여도 집에서 요리하는 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렇게라도 자극적이지 않으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진겸은 고개를 옆으로 툭 떨어트렸다. 진우의 각진 어깨에 옆머리가 꾹 눌렸다.

편하게 기대라고 어깨를 내리자 진겸은 애교를 부리듯 얼굴을 비볐다. 그러고는 기지개 켜듯 팔과 다리를 쭉 폈다.

다단계 회사에 가느라 저도 모르게 긴장했었나 보다. 이렇게 앉아 있으니 긴장이 풀려 몸에 힘이 쭉 빠졌다.

“근데 이거…… 내가 사는 게 맞겠지?”

내부에 메뉴판이 없는 데다가 들어오면서 진우가 정식 셋을 바로 주문해 가격을 확인할 시간이 없었다.

일반 식당이면 몰라도 딱 봐도 비싸 보이는 한정식집이라 걱정이 됐다.

진겸은 ‘얼마나 나오려나……’라고 중얼거리며 눈을 감았다.

진우는 픽 웃으며 내어 준 팔은 그대로 둔 채 다른 손으로 진겸의 팔을 안마하듯 주물렀다.

아까 차에서 만지는 걸 봐서 계속 신경이 쓰였었다.

“형이 왜 사?”

“회사 일도 바쁠 텐데, 같이 가 준 게 고마워서.”

원범이 전적으로 해결한 건 아니지만 그의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었다.

거래명세표가 없었기 때문에 그쪽에서 잡아떼면 치약을 고스란히 들고 나왔어야 했을 수도 있는 거였다.

진우를 믿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악을 쓰면서까지 환불받을 생각은 없었다.

인터넷으로 다단계를 검색하면서 일이 잘못되면 폭력도 서슴지 않는다는 글을 봐서 몸을 사릴 생각이었다.

요즘에는 그런 일이 적다지만 알려지지 않은 곳에서도 많은 사건 사고가 있기 마련이다.

“사실 내 거 환불 안 해 주려다가 이사님이 무서워서 해 준 게 아닐까?”

“무서워서?”

“응. 자기보다 키도 크지, 덩치도 크지, 검은 정장에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으니까 위협적이었던 거지.”

“그럴지도 모르겠다.”

진겸의 설명에 진우의 미소가 짙어졌다. 무섭게 하려는 목적이었다면 선글라스를 벗었을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대화는 문 앞에 선 원범에게도 들렸다. 게다가 그 뒤에는 음식 카트를 끌고 온 직원들도 있었다.

직원들은 최대한 못 들은 척하며 원범이 문을 열길 기다렸다.

더는 말소리가 나지 않자 그제야 문을 열었다.

진겸은 기대고 있던 몸을 바르게 세웠다.

원범만 들어오는 줄 알았는데, 그 뒤로 직원 둘이 들어와 테이블에 정갈한 모양의 접시를 올리기 시작했다.

테이블에 다른 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한 상 가득 채워지자 진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젓가락 몇 번 옮기면 금방 사라질 것 같은 적은 양이지만 종류가 많아서 부족하진 않을 듯했다.

개량 한복을 입은 직원이 소스가 뿌려진 연근을 내려놓으며 세 사람을 슬쩍 훑었다. 그러다가 진겸과 눈이 마주치자 싱긋 웃으며 말했다.

“이건 흑임자 소스예요. 원래는 다른 소스인데 복숭아 청이 들어간 거라 바꿨습니다. 다른 음식에는 복숭아가 들어가는 게 없어서 드셔도 괜찮습니다.”

“예?”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분이 계시다고 해서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렸어요.”

“아…… 감사합니다.”

진겸이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직원들이 전부 나가고 문이 닫히자 내부는 조용해졌다.

진겸은 복숭아 알레르기에 대해 직원에게 말한 사람이 진우인가 싶어 그를 보자 자기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진우는 직원이 들어오면 복숭아가 들어간 음식이 있는지 물어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미 말한 사람이 있었다니.

‘설마…….’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원범을 향했다. 아직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서 그가 어딜 보고 있는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진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알레르기…… 이사님이 말씀해 주신 거예요?”

“어. 없다니까 마음껏 먹어.”

“……감사합니다.”

역시 복숭아 알레르기에 대해 말을 한 사람은 원범이었다.

밖으로 나간 원범은 알레르기로 진겸이 레스토랑에서 쓰러진 지 얼마 안 됐기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나가는 직원에게 말한 거였다. 직원과 스치지 않았다면 그냥 넘어갔을 거다.

그저, 우연히 필요한 게 있냐는 직원의 말에 저도 모르게 나온 거였다.

다른 사람에게 알레르기가 있든 말든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건만.

‘거슬린단 말이지.’

백진우의 형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그 존재 자체가 거슬리는 건지는 몰라도 자꾸만 머리 한구석에서 알짱거린다.

정말 거슬리면 치워 버리면 될 텐데, 그건 또 아니었다.

진겸이 기억 상실증 진단을 받았던 그날.

병원에 다녀온 후부터 진겸에 대해 이런저런 말을 하던 수혁 때문에 더 그랬다.

백진우와 쌍둥이이면서도 닮은 구석은 하나도 없는 백진겸. 그런데 이번에 공통점 하나를 발견했다.

진우에게 관심을 가진 건 그가 제 감정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자신에게도 감정이 있다는 것을 알려 준 사람이었기에 자꾸만 관심이 갔다.

이번엔 진겸이 그랬다.

전에는 온갖 짓을 해도 귀찮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번엔 아니었다. 계속해서 호기심이 샘솟았다.

형제 둘이 무슨 작당을 한 건지는 몰라도 자신을 흔들기 시작한 모양이다.

우습게도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당분간은 이대로 지켜봐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단지, 하나는 해결하고 넘어가야 했다.

이렇게까지 동요하게 된 원인 중 하나를 계속 옆에 두었다간 나중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을 벌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일에 그가 영향을 준 건 크지 않지만, 앞으로도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애초에 싹을 잘라 내야 편한 법이다.

가만히 음식을 보던 원범이 핸드폰을 꺼내더니 이내 커다란 손가락으로 키패드를 꾹꾹 눌렀다.

필요한 이야기는 대부분 통화로 하기에 메시지를 작성하는 손가락은 너무도 느렸다. 게다가 손끝이 두꺼워서 한 번에 두 개가 눌리기도 했다.

힘겹게 쓴 메시지의 수신인은 수혁이었다.

오후 2:11

당장 집에서 나가

선수혁

갑자기?

오후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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