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 치약을 여기서 구매했다고요?”
진겸이 왜 모르는 척을 하냐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자, 임기표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거래명세표 있어요?”
“……거래명세표요?”
“예. 여기서 구매했다면 당연히 거래명세표를 썼겠죠. 그게 진겸 씨에게도 있어야 하고 우리한테도 남아 있어야 하고요.”
진겸의 고개가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렸다. 슬쩍 눈동자를 옮겨 진우를 보고는 얼굴을 좌우로 저었다. 거래명세표는 없단 의미였다.
그런 건 주고받지 않았다. 요즘은 영수증을 받지 않고 버리는 게 일상적이라 그런 걸 써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임기표는 금세 꼬리를 마는 진겸을 보면서 말을 더 얹었다.
“저는 그저께 진겸 씨랑 대화를 했지. 치약을 판 적이 없어요. 혹시 다른 곳이랑 착각한 게 아닐까요? 하루에 면접을 여러 번 보면 종종 이렇게 착각하곤 해요.”
거짓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물 흐르듯 너무도 자연스럽고 평온한 어조였다.
정말 여러 곳에 갔다면 ‘내가 착각한 건가?’ 싶을 정도로 임기표의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거래명세표가 없기에 이곳에서 물건을 샀다는 명확한 증거가 없는 건 맞았다. 게다가 어디서든 구할 수 있는 무지 박스여서 이것 또한 증거가 되지 못했다.
진겸은 그들이 쉽게 환불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건 알았지만, 거래명세표에 발목이 잡힐 줄은 정말 몰랐다.
환불할 때 구매 영수증이 필요한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사업에 투자한 거지 물건을 구매한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냥 넘긴 거였다.
진우와 원범까지 같이 왔는데 이대로 돌아가야 하나 싶어 시무룩해진 진겸의 어깨가 아래로 처졌다.
임기표가 말하는 동안 입매를 굳게 닫고 있던 진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제 자신이 몰아붙이듯 한 말 때문에 기죽었던 진겸의 모습이 그대로 재연되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떠한 상황이든 진겸이 쭈그러드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그 와중에 임기표가 결정타를 날렸다.
“진겸 씨, 좋게 봤는데…… 이렇게 거짓말하면서 뒤통수 칠 줄은 몰랐네요. 게다가 친구분들도 데려오시고…….”
이때다 싶어 진겸의 탓으로 돌리려는 태도에 진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꽉 쥔 손등 위로 푸른 핏줄이 불거졌다. 박스에 있는 치약을 꺼내 그대로 남자의 얼굴로 던져 버리고 싶었다.
저 입에서 진겸의 이름이 나오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은데, 탓하듯 한 말이 무척이나 거슬렸다.
하지만 진우가 나서기 전에 진겸이 주먹 쥔 손으로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회의실 내부에 울리는 우렁찬 소리에 시선이 쏠렸다.
진겸은 꽤 억울한 얼굴로 소리쳤다.
“거짓말이라뇨! 그저께 상훈이 형이랑 같이 왔으니까 형 불러서 얘기하면 되잖아요! 여기 CCTV 있죠? 제가 여기 들어올 때 빈손이었다가 나갈 때 박스를 들고 나갔으니 CCTV가 증거죠!”
나름 머리를 굴려 한 말이지만 임기표는 눈썹을 살짝 들썩일 뿐이었다. 그의 표정에서 약간의 오만함까지 느껴졌다.
“상훈 씨요? 예, 전화해 보세요. CCTV는 아쉽게도 보수 중이라 없네요.”
황당한 말에 진겸이 입을 뻐끔거리자, 원범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CCTV가 없다니 잘됐네. 아, 그리고…… 난 이 회사가 궁금한데.”
원범은 그냥 말한 건데, 남자는 제 팔뚝의 솜털이 설 정도로 이유 모를 소름이 돋았다.
상훈에게 연락하려던 진겸이 놀라 돌아봤다. 환불하러 온 건데 갑자기 회사가 궁금하다니.
진우도 탁 이사가 무슨 속셈으로 저런 말을 하는 건가 싶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우리 회사가 궁금하실까요?”
“관심이 있어서?”
“…….”
임기표가 슬쩍 문밖을 살폈다.
어느새 들어온 풍채가 좋은 남자들이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나가지 않았던 직원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원범과 진우는 회의실에 창문이 없어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몰라도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부산스러운 움직임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진겸만 모르고 있었다.
밖을 보던 임기표의 고개가 다시 돌아오더니 원범을 향했다.
“진겸 씨에게 무슨 말이라도 들으셨어요?”
“마케팅 방법이 아주 흥미롭더라고. 돈깨나 끌어모았겠어.”
원범이 어깨를 으쓱거리자 임기표의 눈이 찌푸려졌다.
시간이 걸릴 거라는 걸 눈치챈 진우가 원범의 앞에 있는 의자를 뺐다. 그러고는 진겸을 거기에 앉혔다.
가까이 앉히고 싶진 않았지만, 갑작스레 일이 벌어질 걸 대비한 거였다. 여차하면 뒤쪽으로 보내면 되니까.
진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진우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려 원범을 봤다.
그는 어느새 테이블에 팔꿈치를 댄 채 주먹 쥔 손에 턱을 괴고 있었다.
검은색 정장에 검은 선글라스, 게다가 저 덩치로 다리를 꼰 채 그러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앉아야 할 것 같았다. 혼자 상상하다가 이건 아니라는 생각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겸은 두 사람이 왜 이러는 건지는 몰라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 싶어 가만히 있었다.
임기표는 이 작자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가늠해 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보아 순순히 넘어가지 않을 사람들로 보였다. 괜히 안으로 들인 건가 싶어 문밖을 힐끗 보다가 문을 닫았다.
닫힌 문은 회의실과 밖을 단절시켰다.
임기표는 문과 제일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오시더니…… 회사가 궁금하시다고요? 취업이라도 하고 싶은 거예요?”
“취업이 아니라 투자.”
투자라는 말에 임기표의 표정에 드디어 미묘한 변화가 생겼다.
원범은 주머니에 있던 명함을 꺼내 테이블 위로 휙 던졌다. 빙그르르 돌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검은색 명함은 임기표가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멈췄다.
명함이 날아가던 걸 보던 진겸이 놀란 얼굴로 몸을 돌렸다. 그러곤 작게 속삭였다.
“투자라뇨?”
“왜?”
“아니…… 우리 환불하러 온 거 아니에요?”
“넌 환불 받아. 난 들어 보고 투자 가치가 있으면 하게.”
“……예?”
살짝 벌어진 진겸의 새빨간 입술이 미처 다물어지지 못하고 달싹거렸다. 황당하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곳에서 하는 게 어떤 건지 원범이 모를 리 없을 텐데 투자하겠다고 말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탁원범은 사업 수완이 굉장히 좋은 사람이다. 몇 년 전 다양한 분야의 사업에 뛰어든 대부업체 회사가 눈부신 성장을 한 것 또한 탁 이사의 공이 컸다.
그가 이사 자리에 앉자마자 대부업체부터 깔끔하게 해결하고 그 외에 여러 사업을 공격적으로 펼쳤다. 지금은 모든 분야에 손을 뻗고 있을 만큼 성장한 기업이었다.
몇 년째 이사 자리에 앉아 있지만, 이미 차기 회장으로 거론되고 있었다.
원범은 팔을 뻗어 진겸이 앉은 의자의 팔걸이를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순식간에 뒤로 당겨진 진겸의 몸이 흠칫 떨렸다. 의자가 빙글 돌더니 원범과 마주 보게 됐다. 손에 쥐고 있던 캔버스 가방이 구겨졌다.
진겸이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자 원범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확실히 백진우랑은 달랐다. 반응이 너무 확실해서 이상하게도 자꾸만 건드리게 된다.
진우가 뒤에서 다시 당기려 의자 등받이를 잡자 원범이 손에 힘을 줬다.
아주 잠깐이지만 원범과 진우의 눈이 얽혔다. 서로 선글라스를 쓰고 있었지만 시선이 마주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원범은 시선을 진우에게 둔 채 몸을 숙여 진겸의 귓가에 속삭였다.
“잘 봐 둬.”
“……뭘요?”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진우는 그 말이 자신을 향한 건지, 진겸에게 하는 말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확실한 걸 좋아하는 그의 태도가 너무 두루뭉술했다.
원범은 할 말을 끝내고 허리를 폈다.
여전히 자신을 빤히 보는 진겸의 볼을 구부린 검지로 툭 건드렸다. 말랑하고 부드러운 살결에 잠시 멈칫거리다 손을 거뒀다. 그러고는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보내야겠어.’
한국에 들어와 호텔에서 지내던 수혁이 지겹다며 집으로 쳐들어왔었다. 그를 옆에 두었더니 제 행동이 수혁을 닮아 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손을 뻗는 건 확실히 자신이 할 법한 행동이 아니었다.
“함부로 만지지 마시죠.”
원범의 손이 떨어지자 진우가 으르렁거리며 진겸의 의자를 당겨 제 쪽에 붙였다. 그리고 원범이 보지 못하도록 아예 의자를 돌렸다.
진겸은 제 귓가에 들렸던 목소리와 볼을 스쳤던 낯선 감각에 눈만 굴렸다. 진우가 그랬다면 환하게 웃어 줬을 텐데, 상대가 원범이라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안 그래도 원범은 여기 오기 전부터 이상한 행동을 계속 보였다.
‘……아픈가?’
제정신인 그가 자신에게 다가올 리 없다는 게 진겸의 결론이었다.
“……아파.”
하도 문질러져서 볼이 따가웠다. 진우가 원범의 손이 닿았던 볼을 정장 소매로 벅벅 닦아 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참아.”
진겸의 선글라스가 들썩이고 볼이 붉어질 때까지 진우의 행동은 멈추지 않았다.
임기표는 세 사람의 행태에 눈을 찌푸리다가 제 앞에 놓인 명함을 집어 들었다.
“HAM전자 영업부장?”
당당하게 명함을 주길래 높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영업부장이란다. 기가 차 헛웃음을 내뱉자 원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치약 말고도 상품이 많다고 들었거든. 고객들한테 줘야 할 사은품도 많은데…… 여기 물건으로 주면 나한테도 수익이 온다는 거잖아. 여긴 물건 많이 팔아서 좋고, 나는 따로 뒷돈 챙겨서 좋고.”
수상쩍기는 했으나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사실 네트워크 마케팅 아니, 다단계는 물건을 팔아 수익을 남기는 것보다는 사람을 끌어들여 돈을 쓰게 만드는 인간 시장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걸로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요즘엔 워낙 많은 사람이 다단계의 수익 구조에 대해 알고 있어서 쉽게 넘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물건을 판매하는 것 또한 부가적인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였다.
최근 부진했던 제 실적을 떠올린 임기표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찝찝해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꺼림칙해도 당장 거래하겠다는 게 아니라서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건 나쁘지 않을 듯했다.
그는 회의실을 나가면서 문 닫는 건 잊지 않았다. 문단속을 철저히 하라고 교육이라도 받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