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진겸은 약속 시각에 맞춰 진우의 회사로 왔다. 그제 입었던 옷과 들었던 가방까지 똑같은 차림이었다.
치약은 아침에 진우가 가져갔다. 어젯밤 박스를 들어 본 진우가 근육통에 시달릴 수도 있을 거라고 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정확했다. 진우 말대로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팔이 덜덜 떨렸다.
30만 원어치의 치약 박스는 꽤 무거웠다. 어제 박스를 들고 집에 올 때도 무거워서 잠시 내려놓고 들기를 반복했었다.
“……으아.”
팔을 손으로 주무르는데 전기가 오르듯 찌릿찌릿하고 저리기까지 했다. 게다가 탁 이사와 함께 간다는 소리를 들었던 터라 조금 긴장했더니 더 아픈 느낌이었다.
지난번 레스토랑에서 복숭아 셔벗을 제게 준 건 고마웠지만, 그때 잡혔던 손목은 너무 아팠다. 다른 통증에 금세 잊히기는 했어도 아팠던 기억은 남아 있었다.
더구나 별로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진우와 엮이는 것도 별로였지만, 직장 상사와 비서이기에 이건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언제 와…….”
11시에 회사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나오질 않는다. 지하철이랑 버스에도 자리가 없어서 계속 서 있었더니 다리도 아팠다.
‘모자 가지고 나올걸.’
오늘 구름이 많다고 하길래 그냥 나왔는데,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만 보였다.
진겸은 머리 위에서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옅게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가만히 서 있었다.
조금 더 기다리고 있으니 진우가 뛰어왔다. 그는 진겸을 보자마자 흐르는 땀을 손으로 쓱 닦아 주고는 얼굴 위로 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안에 들어와서 기다리지.”
“일광욕하고 있었어.”
“더운데…….”
진겸이 헤실헤실 웃으며 진우를 보고 있는데 등 뒤로 원범이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알아보고 인사를 건네는 직원들이 몇 있었지만 원범은 전부 무시한 채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어쨌든 같이 가 준다고 하니,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깍듯이 허리를 굽혔다.
원범이 한쪽 눈을 살짝 찡그리며 진겸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훑어 내렸다.
“이제 멀쩡한가 보네.”
“네?”
무슨 소리냐는 듯이 진겸이 되물었지만 원범은 이미 고개를 돌린 후였다. 진겸이 어리둥절해져 진우를 보며 눈썹을 들썩였다. 진우는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늘로 이끌 뿐이었다.
“차 가지고 오겠습니다. 형,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응? 같이 가. 지하 주차장에 있는 거잖아.”
“엘리베이터도 타야 하고 지하라 답답해. 그냥 여기 있어. 햇볕으로 나가지 말고 그늘에만 있어. 알겠지? 금방 올게.”
진우는 두 사람만 두고 가는 게 조금 신경 쓰이긴 했다. 그래도 원범이 먼저 같이 가겠다고 한 이상 도움이 되면 됐지, 방해가 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아 서둘러 차를 가져오려 발걸음을 옮겼다.
둘만 남게 되자 진겸은 무언가 어색한 느낌에 두 손을 앞으로 곱게 모은 뒤 꼼지락거렸다.
그늘로 온 자신과는 다르게 원범은 햇볕 아래 그대로 서 있었다. 게다가 오늘 검은색 정장을 입고 있어 무언가 범접할 수 없는 포스를 내뿜었다.
진겸은 힐끗거리며 원범을 살폈다. 그는 먼 곳을 응시하듯 이쪽은 전혀 보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느라 입술을 잘근 씹던 진겸이 한 발자국씩 조심스레 원범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리를 쫙 벌려야 다가갈 수 있는 만큼의 거리에서 멈춰 섰다.
“저기…….”
“…….”
“……레스토랑에서는 감사했습니다.”
“뭐가?”
낮은 목소리에 순간 소름이 돋아 몸을 부르르 떤 진겸이 몸을 다시 바르게 하고는 시선을 조금씩 위로 올렸다.
자신을 보고 있던 건지, 원범과 눈이 딱 마주쳤다. 숨을 흡 들이키자 원범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원범은 진겸이 자신에게 겁먹는 이유를 아직 찾지 못했다. 수혁이 말하길 인상이 무서워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그런 이유만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이 없다고 해도 기존에 자신이 진겸에게 했던 행동들이 무의식으로 남아 있는 건가 싶었다. 물론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거나 폭언을 한 적은 없다. 그저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을 뿐이다.
저 작은 입으로 뭘 말하려는지, 원범은 가만히 기다렸다.
“레스토랑 때요. 제 팔 잡아서 못 긁게 한 거. 그거 감사해서요. 계속 긁었으면 피부가 벗겨져서 흉터가 남았을지도 모른다고 했거든요…….”
훈일이 해 준 말이었다. 원범이 더 심해지기 전에 손목을 잡아 긁지 못하게 해서 그나마 흉은 지지 않을 거라고. 실제로 붉은 자국이 며칠 가긴 했으나 흉터는 남지 않았다.
진겸은 진심으로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했다. 무서운 건 무서운 거고,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대답이 없는 원범을 빤히 보던 진겸의 얼굴이 그의 한마디로 인해 왈칵 구겨졌다.
“치약은 써 봤고?”
“…….”
“그렇게 좋으면 나 좀 주지 그랬어. 우리 회사 직원만 해도 수백인데. 네 실적 정도는 금방 올릴 수 있을걸?”
“……저 그거 안 하는데요!”
원범이 치약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할 줄은 몰랐다.
진겸이 콧잔등을 잔뜩 찌푸리자 원범의 한쪽 입꼬리가 아주, 아주 미세하게 올라갔다.
사람을 보면서 무언가를 연상시켜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잠깐 관심이 갔던 그 백진우조차 백진우로 보였다.
그런데 제 앞에 있는 사람은 달랐다. 나름대로 위협하겠다고 콧잔등을 찌푸린 모양인데 위협은커녕 우습기만 했다. 툭 건드리면 뒤로 벌러덩 넘어질 것 같은 작은 동물로 보였다.
자꾸 입꼬리가 올라가게 만드는 이 작은 생물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진겸은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가득 담아 다리에 힘을 줘 곧게 폈다. 치켜든 턱이 힘을 보탰다.
원범은 부러 비웃듯 고개를 삐딱하게 꺾었다. 그의 몸집이 커서 진겸이 유독 작아 보였다.
“그럼 치약은? 30만 원짜리잖아.”
“그건! ……그건.”
뭐라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치약을 30만 원어치 산 건 사실이었다. 딱히 그걸 부정할 생각은 없다. 그저 놀리는 투로 말하는 원범 때문에 아주 조금 울컥했을 뿐이다.
진겸은 입을 굳게 닫고선 그대로 몸을 홱 돌렸다. 다시 그늘로 들어가 뚱한 얼굴로 원범의 옆을 노려봤다.
갑자기 그가 낯설게 느껴졌다. 아는 사이는 아니라지만 저런 성격이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아직도 병실에서 처음 마주쳤던 눈빛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 자신이 어깨를 얼마나 움츠렸는데. 계속 그러고 있었으면 어깨 근육이 뭉쳐서 한동안 고생했을 거다.
더구나 감정이 결여됐다는 원범의 웃는 얼굴, 물론 비웃는 표정이지만, 너무 자주 보고 있다. 그게 아주 이상했다.
원범은 그늘로 이동한 진겸을 말없이 응시했다. 회사 앞에 심긴 나무 그림자 아래에 선 진겸의 위로 나뭇잎 사이를 비집고 나온 햇살이 내려앉았다.
지금까지 백진겸에게 눈길이 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요즘엔 어쩐지…….
원범은 자신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한 채 진겸의 앞으로 다가갔다.
딱 한 걸음. 그 거리감.
“이젠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건가?”
원범이 가까워지자 은은한 향이 진겸의 콧속을 간지럽혔다. 시원한 향이 났다. 깨끗하고 파란 하늘과 닮은, 청량한 향이었다. 원범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향인데 묘하게 잘 어울렸다.
무의식적으로 향을 들이마시다가 눈을 껌뻑거렸다. 너무 가까웠다.
“전보다는 낫다고 생각했는데…… 딱히 좋지도 않네.”
“……예?”
굳은살과 흉터가 있는 커다란 손이 진겸의 머리 위쪽을 향했다. 황금빛을 품은 옅은 갈색 눈동자가 따라 움직였다.
허공에 멈춘 손은 나뭇잎이 흔들릴 때마다 얼굴에 생기던 빛을 가렸다.
커다란 손을 바라보던 진겸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원범의 눈과 마주쳤다.
전과는 달랐다. 분명 눈을 빤히 바라보면 무서워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사람의 눈을 보고 있는 듯했다.
진겸이 올려다보자 원범의 고개가 천천히 옆으로 꺾였다.
“아무리 봐도 백진겸인데.”
“…….”
“특이해.”
언제 햇볕을 가려 줬냐는 듯이 손은 사라지고 없었다.
방금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파악이 안 된 진겸의 눈동자가 좌우로 심하게 흔들렸다. 원범이 다가왔고, 자신이 착각한 게 아니라면 아까 진우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거지?
고민에 빠지려던 진겸을 꺼낸 건 진우였다. 도로변에 차를 세운 채 다가왔다. 원범이 외근 나갈 때 사용하는 회사 차를 끌고 온 거였다.
원래라면 외근할 때만 써야 한다. 회사 업무는 아니지만 탁 이사와 함께 나가니, 엄연히 외근이라며 진우는 거리낌 없이 사용한 거였다.
진겸이 멀뚱히 서 있는 동안 원범은 자연스럽게 차로 가더니 뒷좌석에 올랐다.
“형, 가자.”
진우는 사고가 정지된 듯 멍해진 진겸의 손을 잡고 끌었다. 전이었다면 만지지 말라며 가차 없이 쳐냈을 손은 얌전했다.
진겸은 조수석에 앉아서 가는 동안 입을 꾹 다물었다. 진우와 단둘이었다면 이런저런 말을 했을 텐데 뒤에 원범이 있어서 무어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허벅지에 놓인 가방끈을 꼼지락거리며 만지다가 힐끗 옆을 봤다. 진우는 앞을 본 채 운전에 집중하고 있었다. 누구 동생인지 참 잘생겼다. 괜히 미소가 실실 튀어나와 웃고 있자 시선을 느낀 진우가 슬쩍 눈길을 줬다.
“왜?”
“운전하는 거 멋있어서.”
“……그래?”
예상치 못한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 진우의 입꼬리도 슬며시 올라갔다.
“수혁 형도 운전 잘하시더라고.”
“……수혁, 형?”
“응. 그때 있잖아. 백화점. 그때 형이 운전했거든.”
“알지. 근데 왜 형이야?”
핸들을 잡은 진우의 손에 뿌득, 힘이 들어갔다. 손등에 선명히 세워진 핏줄이 흉흉했다. 저도 모르게 다리에도 힘이 들어가서 순간 액셀을 세게 밟았다가 서둘러 힘을 뺐다.
“형이라고 부르라던데? 내가 회사 직원도 아닌데 왜 이사라고 부르냐고.”
“……아저씨는? 저번에 그렇게 불렀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