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원범은 서류철에 있는 연차 신청서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진우는 호출해 놓고 계속 서 있게 한 그에게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 본인이 생각해도 이렇게 연달아 연차를 낸다는 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아서였다. 그래서 반차를 신청했다.
안 된다고 하면 지난 연차 때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잠깐 나온 시간만큼이라도 빼 달라고 할 작정이었다.
내일 중요한 회의가 없으니 양 비서만 있어도 충분할 거다. 점심시간이랑 붙이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을 거란 계산을 끝낸 후였다.
진우는 최대한 원범과 눈이 마주치지 않게 테이블에 시선을 두었다.
“개인 사정.”
“…….”
“무슨 개인 사정?”
“개인 사정이기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사유란에 진겸이 다단계에 속아 돈을 내고 치약을 사 왔다고, 그래서 쳐들어간다고 적을 순 없었다. 다시 생각해도 황당했다.
게다가 어제 잔소리 좀 했더니 의기소침해진 진겸이 신경 쓰여서 빨리 해결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진겸을 속인 상훈이라는 사람과 다단계 회사를 그냥 두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집에서 편히 있어 줬으면 하는데 그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잠시 접었다.
서류철이 닫히고 테이블 위로 올라갔다. 사인은 없었다.
“나는 그 개인 사정이 궁금한데. 이렇게 바로 연차를 쓰면 내가 사인해 줄 줄 알았어?”
“…….”
“네가 쓰는 이유는 하나겠지. 백진겸. 이번엔 또 어디가 아픈 건데?”
“아픈 거 아닙니다. 진짜 개인 사정입니다.”
“그러면 나도 내 개인 사정으로 사인 안 할래.”
순전히 억지였다.
미간을 구긴 진우가 짧은 숨을 내쉬었다. 원범의 고집을 알기에 거짓말을 해서라도 핑계를 만들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어느 회사나 사유를 적기는 해야 한다. 하지만 개인 사정이라고 적어 놓으면 꼬치꼬치 묻는 일은 드물다.
간혹 묻는 곳이 있는데, 그건 그 회사가 나쁜 거다. 탁 이사처럼.
진우는 천성이 거짓말을 잘하지 못했다. 그간 진우를 지켜본 원범도 그걸 파악하고 있었다.
“……아픈 건 아니지만 관련된 일은 맞습니다.”
“뭔데.”
“말씀드리면 반차 말고 연차로 해 주실 겁니까?”
“들어 보고.”
“사실…….”
이야기를 듣는 원범의 입꼬리가 움찔 떨렸다.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던 손가락을 멈추고는 주먹을 쥐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있다가 뜨고는 앞에 서 있는 진우를 응시했다.
거짓말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게다가 자기가 말하면서도 황당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목소리에도 약간의 흥분이 섞여 있었다.
원범은 테이블에 있던 손을 제 입가로 가져갔다. 커다란 손이 얼굴 반을 가렸다. 손바닥 뒤로 입술이 유려하게 올라가 있었다.
“……고작 30만 원 받으러 간다는 거야?”
“고작 30만 원이라뇨! 치약을 가져왔다고요! 그 박스를 내가……!”
웬만하면 흥분하는 일이 없는 진우의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백진겸 앞에서나 다정하고 착하지, 실제 성격은 불같았다. 빚 독촉하는 사채업자들을 하도 많이 상대했더니 어린 나이에도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치약?”
“아…….”
그냥 다단계 사기에 당해 돈을 뺏겼다고만 말했었다. 진우는 곤란하다는 얼굴로 그 30만 원으로 치약을 사 왔다고 이실직고했다.
그에 입을 가리고 있던 원범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깨도 잘게 떨리는 듯했다.
“……내일 연차 허락해 주시는 겁니까?”
원범이 손을 내리더니 서류철을 진우에게 건넸다.
“외근으로 해. 나도 같이 가지.”
진우가 멈칫거렸다.
“……예?”
“나도, 같이 간다고.”
원범의 말에 진우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꺾였다. 본인이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모르는 듯했다.
진우는 꺾었던 고개를 바르게 하고는 얕은 숨을 내쉬었다. 서류철을 받아 옆구리에 끼웠다.
지금 탁 이사가 한 말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선 이사였다면 ‘재미있어 보여서’라고 했을 거다. 하지만 탁 이사는 재미를 위해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형……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지금도 별로 좋아하진 않아.”
“……싫은 게 아니고요?”
“어.”
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탁원범은 백진겸을 언급하는 것 자체를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은 전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싫다’가 아니라 ‘좋아하지 않아’.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하겠지만 진우의 경고 센서는 빠르게 반응했다.
그가 자신에게 보였던 모습과 지금 진겸에게 보이는 모습이 비슷했다. 그게 의미하는 건 단 하나였다.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흥미는 느끼고 있다.
‘여기도인가?’
선 이사도 거슬리는 판국에 탁 이사까지 끼어들자, 진우는 오랜만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진겸의 일만으로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자꾸만 귀찮은 일이 생겨나는 것 같아 참으로 거슬렸다.
하지만 지금은 다단계 회사가 먼저다. 게다가 보통 다단계 회사는 대부업체와 연결된 경우가 많다.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대출을 알선하고, 이자를 받는 것으로 이익을 얻는다.
잠시 생각하던 진우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탁 이사와 함께 가는 것이 결코 나쁜 건 아니다. 만약에 거기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나게 된다면…….
‘방패가 있으면 좋지.’
성인 남자 여럿이 덤비지 않는 이상, 본인 또한 지지 않을 자신은 있다. 하지만 탁 이사와 함께 가면 뒷수습이 굉장히 편할 거라는 건 기정사실이었다.
“알겠습니다. 내일 오전 11시에 갈 생각인데, 괜찮으십니까?”
“어. 거기가 어딘지는 알고 있고?”
“예. 어제 명함 받았습니다.”
“줘 봐.”
“……예?”
“달라고 그 명함.”
왜 달라고 하는 건지는 몰라도 진우는 가방에 챙겨 놓았던 명함을 꺼내 와 원범에게 건넸다.
원범은 명함을 한 번 보고는 이내 돌려주었다.
“급한 결제 건은 오늘 끝내고 퇴근할 테니, 백 비서는 제시간에 퇴근해. 가서 치약…….”
원범이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30만 원 주고 산 치약이 무사히 있나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 * *
진겸은 침대에 최대한 붙어 있다가 8시 알람 소리에 미적미적 일어났다.
거실로 나와 진우가 출근할 때 차려 준 밥을 먹고 깨끗하게 설거지를 마친 후 청소를 시작했다. 빗자루질도 하고, 걸레질도 끝마쳤다. 집에 작다 보니 청소는 금방 끝났다.
거실 바닥에 앉은 진겸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다단계라는 사실을 알고 상훈에게 화도 났지만 그에게 바로 연락해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다단계는 물건을 팔기보다는 사람을 끌어들여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라고 했다. 상훈에게 무슨 사정이 있는 건지는 몰라도 어쩌면 그도 속아서 그곳에 있는 걸지도 모르는 거였다.
오늘도 전단지 아르바이트가 있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상훈을 볼 자신이 없어서 못 간다고 연락했다.
어제 설명을 들을 땐 너무 획기적인 사업이라고 생각했다. 생필품은 당연히 사람들이 필요한 거니까 꾸준히 팔릴 것이고, 그때마다 제 통장에 수익이 차곡차곡 쌓인다. 이건 정말 센세이션한 거였다.
하지만 진우의 설명을 듣자마자 ‘내가 왜 이런 단순한 사기에 걸렸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빨간 색연필로 그어 주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던 임기표를 떠올렸다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빨리 빚 갚는 것도 돕고 진우의 옷이랑 구두도 사 주고 싶었다. 아무리 원범이 병원비를 지원해 주고 있다고는 하나, 매달 드는 생활비도 만만치 않았다.
사채빚 이자도 상당했다. 금액이 얼마인지. 아니, 애초에 빚이 있다는 것도 진우는 알려 주지 않았다. 그래서 정확히는 모르지만 금방 갚지 못할 게 분명했다.
“…….”
너무 의욕만 앞섰던 걸까?
진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옆으로 누워 차가운 장판에 뺨을 붙였다. 손목에서는 움직임을 인지한 워치가 심박수를 나타내는 화면을 내보였다.
진우가 호신술을 보여 줬던 날, 핸드폰에 일기 앱을 깔았다. 그리고 나중에 돌아올 백진겸을 위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줄줄이 써 내렸다.
다단계 이야기는 뺄까 하다가 진우도 아는 일이라 안 쓸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제 손가락으로 조금은 부끄러운 일을 기록해야 했다.
다단계 관계자가 말을 너무 잘했다고 변명하듯 덧붙였다. 자신이 홀라당 넘어간 거란 말은 쏙 뺐다.
《그레이》의 백진겸이 된 지 이제 2주가 지났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척을 한 거였는데, 정말 기억 상실증에 걸린 듯했다.
그게 너무 혼란스러웠다. 몇 살이었고, 어디 살았고,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 기억나는 건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없어진다는 흔하디흔한 빙의 부작용. 그게 자신에게도 온 걸까?
처음에는 가족이라든가, 애완견이라든가, 방 천장 같은 사소한 것들은 옅게 기억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떠올려 봐도 ‘내가 개를 키웠었나?’ 싶고 다 불확실했다.
그렇다고 크게 불안한 건 아니다. 정말 기억이 안 나네, 그게 끝이었다.
처음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도 그랬다. 《그레이》 속으로 들어왔다는 걸 알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진겸은 점차 차가워지는 뺨에 몸을 일으켰다. 방금까지 축 처져 있던 어깨가 다시 솟아올랐다.
콧바람을 킁, 킁 내뿜으며 핸드폰에 충전 잭을 연결했다. 그러고는 바로 인터넷을 켜 다단계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진우가 같이 가 준다고 했지만 아무런 대비 없이 갔다가 둘 다 당하면 어쩌나 싶은 생각에서였다.
인터넷에서는 굉장히 많은 사례가 올라와 있었다. 다단계가 얼마나 위험한 건지, 그것으로는 돈을 벌기보다는 빚을 만들다가 파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제 진우가 말했던 것과 똑같았다.
진겸은 비장한 얼굴로 검색을 멈추지 않았다. 중요한 정보는 틈틈이 노트에 필기도 했다. 그러다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너튜브에서 호신술 영상을 검색했다.
“많네……”
진우가 보여 준 건 조회 수가 높은 것들이었다. 밖으로 나온 진겸은 호신술 동영상을 틀어 놓고는 어설프기 짝이 없는 손짓과 발짓으로 따라 하기 시작했다.
근육이 없는 말랑하고 힘없는 팔은 허공을 가로지르기는커녕 휘젓기만 할 뿐이었다.
“흐압!”
하지만 작은 기합을 내며 움직이는 진겸의 표정은 한없이 진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