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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25)화 (25/92)

25화

“이건 설명했으니까 넘어갈게요.”

그렇게 프린트 하나하나 설명해 주었다. 마지막 장까지 설명을 끝낸 후 색연필 끝으로 프린트를 톡톡 쳤다. 빨간 점이 한곳에 계속 찍혔다.

“어때요? 관심이 좀 생겨요?”

“조금……요.”

“그럼 더 자세히 설명해 줄게요.”

임기표는 수익 구조가 그려진 부분을 다시 펼쳤다.

“스물네 살이면 성인이잖아요. 그러면 충분히 자기 사업을 할 수 있는 나이인 거죠.”

“그렇죠.”

“제품이 소비자한테 가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해요. 도매상, 소매상 그리고 광고도 해야 하니 광고비도 들고요. 그러면 원가가 1원인 제품이 10원이 되는 거죠. 소비자는 그만큼 비싸게 사게 되는 거고요. 우리는 유통비랑 광고비를 줄여서 소비자에게 물건을 저렴하게 판매하는 거예요.”

이해했냐는 듯이 빤히 보자 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고 있는 지식을 습득하는 모양새에 임기표의 웃음이 더 짙어졌다.

“그리고 그 수익의 일부분을 진겸 씨가 가져가는 거죠. 소비자는 싸게 사서 좋고, 진겸 씨는 수익이 생겨서 좋고.”

“아…….”

그제야 물건을 판매해서 인센티브를 받아 가는 이유를 이해했다.

임기표는 진겸이 집중해 듣고 있는 걸 보고는 다시 상품이 나열된 프린트를 보여 주었다.

“그러면 진겸 씨한테도 물건이 있어야 팔지 않겠어요? 물론 주로 사이트에서 파는 거지만요.”

진겸은 말 잘 듣는 학생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진겸 씨도 물건을 써 봐야겠죠? 주변 사람들한테도 나눠 주고요. 그 사람들이 쓰고 좋으면 다시 살 거예요. 그럼 매출이 발생할 거고 진겸 씨는 그걸 그대로 가지고 가는 거죠.”

“오…….”

“세상에 치약 안 쓰는 사람 있나요? 다 쓰는 거잖아요. 화장품? 당연히 쓰죠. 투자 금액도 비싸지 않아요. 첫 달이면 진짜 몇백만 원 가지고 갈 수 있어요.”

순간 진겸의 눈이 동그래졌다. 첫 달에 몇백이라니. 상훈이 정말 자신에게 대단한 일을 소개해 준 게 아닐까 싶었다.

“제가 못 팔면요?”

“절대 그럴 일 없어요. 우리 제품들은 인증도 확실히 받았고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나오는 것들이라 재구매율이 굉장히 높아요. 요즘엔 소셜미디어로 홍보하면 클릭 몇 번이 자연스럽게 구매로 이어지거든요. 한번 써 보면 좋다는 거 알아서 무조건 다시 사게 돼요.”

아까는 보여 주지 않았던 프린트 뒷면을 펼쳤다. 거기에는 아주 작은 크기로 어떤 인증서를 받았는지 나열되어 있었다. 이렇게 봐도 뭔지 모르기에 진겸은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어갔다.

“초기 비용이 얼마나 되는데요?”

제일 중요한 부분은 상훈이 이곳에 와서 들으라고 해서 모르고 있었다.

“아, 그걸 안 알려 줬구나. 우리는 마일리지라는 걸 사용해요. PV라고 하는데, 우리 회사 물건을 사면 마일리지가 쌓여요. 350PV에 도달하면 실버 등급이 되죠.”

임기표는 수익 구조 프린트를 다시 펼치면서 설명을 이어 갔다.

500PV 단위로 등급이 올라가는데 실버, 골드, 사파이어, 루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다이아몬드가 된다. 팀장급인 다이아몬드가 되면 월 2천만 원 이상은 가져간다며 콕 집어 말했다.

여기서 진겸이 고개를 살짝 갸웃거렸다. 사업을 해 본 적은 없지만 등급이 있다는 건 처음 들었다.

“그 350PV가 되려면 얼마가 필요한 건데요?”

“350만 원이요. 실버가 제일 낮은 등급이라서 그나마 저렴한 거예요.”

“350만 원이요?”

진겸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아무래도 사업이기에 당연히 초기 비용이 많이 들 거라는 각오는 하고 왔다.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하자 임기표와 상훈이 시선을 주고받았다.

“오늘 와서 이렇게 이야기도 하고, 상훈이가 추천까지 했으니…… 특별히 진겸 씨한테만 100PV 줄게요. 250만 원만 있으면 진겸 씨도 자기 사업을 할 수 있는 거예요. 등급이 올라가면 가지고 가는 퍼센트가 높아지고요.”

250만 원만 있으면 본인의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은 참으로 매력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진겸은 다리 위에 올려놓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통장에 돈이 있긴 했지만 그건 사용하고 싶지 않았다. 그 돈은 진우에게 줄 돈이었다. 그렇다고 이 사업을 놓치고 싶지는 않았다. 굉장히 아까웠다.

“이거 오늘 아니면 100PV 못 받아. 나도 안 해 주신 건데, 지금 너한테만 특별히 해 주신다는 거잖아. 진짜 좋은 기회라니까?”

“아…….”

“지금 안 하면 다음엔 기회가 없어. 250만 원으로 자기 사업할 기회를 이대로 놓칠 거야?”

상훈이 옆에서 부추기자 임기표가 잘한다며 눈썹을 들썩였다. 하지만 무언가 계속 찝찝한 마음이 들었다.

임기표는 쥐고 있던 빨간색 색연필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더 몰아붙이면 분명 돈을 꺼낼 게 분명한데 자꾸만 마음 한구석에 걸리는 게 있었다.

‘얼굴 때문인가?’

앳되고 순진해 보이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말간 얼굴 때문에 죄책감이 들 리는 없었다.

원래 이런 애들이 더 속이기 쉬운 법이다. 그런데도 사라지지 않는 찝찝함에 프린트를 옆으로 치웠다.

왠지 이 촉을 넘기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럼 오늘은 진겸 씨가 쓸 수 있는 물건을 살래요? 원래 정말 안 해 주는데, 모레 강의가 있거든요. 그때 다시 와서 들을래요? 그때 한다고 하면 진겸 씨한테만 100PV 줄게요.”

마지막 말은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말하면 안 되는 우리끼리의 비밀이라며 작게 속삭였다.

그렇게 진겸은 오전에 캐럿 마트 거래를 했던 현금 30만 원을 고스란히 임기표에게 주었다. 그는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배웅했다.

건물을 나온 진겸의 손에는 치약이 든 박스가 들려 있었다. 무겁지도 않은지 굉장히 뿌듯하다는 얼굴이었다. 옆에 있는 상훈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모레 진짜 올 거지?”

“응. 올게!”

“이거 가족들한테도 말하지 말고 친구들한테도 얘기하면 안 돼. 알려지지 않은 스타트업이라 소문나면 너도나도 한다고 달려들어서 피곤해져. 너도 경쟁자가 많이 생기는 건 별로지?”

“가족한테도 말하면 안 돼?”

진우에게 말 못 할 일을 하는 건 싫었다. 지금 자신이 백진겸이 아니라는 사실도 숨기고 있는 판국에 더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단호하게 말하는 상훈의 모습에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어디서 났냐고 물어보면 아는 사람한테 받았다고 해.”

“……응, 알았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는 걸 알 텐데 지금 진겸에겐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일을 해 본 경험이 없다 보니 무엇이 이상하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진우에게 엄청난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치약 박스를 보고 뭐냐고 묻는 통에 차마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서 사실대로 줄줄이 읊은 탓이었다.

진우는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좁은 거실을 왔다 갔다 하며 가만히 있질 못했다.

진겸은 눈치를 보며 구석에 쭈그려 앉아 있었다. 항상 상냥하던 진우의 다른 모습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새하얀 맨발을 겹친 채 발가락도 꼬물거리고 있었다.

“30만 원?”

진우가 재차 묻자 진겸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풀 죽어 있는 모습에 진우가 한숨을 크게 내쉬더니 진겸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형.”

“…….”

“형.”

“……응.”

“나 좀 봐 봐.”

그제야 진겸의 시선이 천천히 위로 올라왔다. 흘러내린 진겸의 머리카락을 진우가 조심스레 쓸어 넘겨 주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눈동자가 너무 촉촉해서 더는 뭐라고 할 수가 없었다.

여태 제 손으로 무언가를 해 본 적 없는 진겸이 일하겠다고 했을 땐 놀라기도 했고, 대견하고, 기특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피어올랐다.

지금은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야 해서 일하는 걸 반대했을 뿐이다. 정말 원한다면 고민은 할지언정 결국 진겸이 원하는 대로 하게 둘 게 뻔했다.

이번 일도 그렇다. 내키진 않아도 일하는 시간이 짧고 재미있어하는 것 같아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에겐 말도 없이 거기서 알게 된 사람의 소개로 면접을 보더니, 치약 박스를 들고 왔다. 어찌 된 영문인지 이야기를 듣는데 딱 다단계였다.

백진겸은 똘똘하게 뭐든 제 이익만 챙길 것 같으면서도 은근 어수룩한 면이 많았다. 게다가 마음도 여린 편이었다. 물론 자신에게는 아니지만…….

“내일 회사 가서 연차든 반차든 낼 테니까. 모레 같이 가자.”

“……거길?”

“응. 30만 원이 적은 돈도 아니고 형 정보도 있을 거 아니야. 이력서 냈다며.”

“…….”

“……거기서 일하고 싶어?”

“아니!”

이미 진우가 다단계에 관한 설명을 장황하게 해 준 후였다. 과거 다단계로 인해 벌어진 사건들까지 말하며 이게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려 주어서 하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자신이 왜 그 말에 껌뻑 속아 넘어간 건지, 지금 생각해 보면 이해되지 않을 정도였다. 자기 사업이라는 말에,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꿈에 머릿속이 마비되었던 모양이다.

진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는 다단계에 걸리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또다시 나오려는 한숨을 최대한 삼키다가 콧바람을 내뿜었다.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던 진겸이 다시 쭈그러들기 시작했다.

“아니…… 내 사업을 할 수 있다고 하길래…….”

“형.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아. 쉽게 돈 버는 방법은 없어.”

진우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하자 진겸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의 무릎에 손을 올렸다.

“앞으로 절대! 절대 그런 거에 안 속을게. ……그러니까 표정 좀 풀어라, 어?”

“……후. 그래. 배고프지?”

밥 먹다가 들은 거라 중간에 멈췄었다. 이미 찌개와 밥은 식어 있었다. 진우가 다시 데우려 하자 진겸이 괜찮다며 숟가락을 들었다.

오늘은 콩나물국이다. 간이 별로 되어 있지 않아서 콩나물 맛이 너무 잘 느껴졌다.

저염식을 해야 한다지만 밥 정도는 맛있게 먹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불만을 토로하지는 않았다.

진겸에게도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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