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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24)화 (24/92)

24화

사장은 오늘 날씨가 덥다는 걸 알기에 1시간 일찍 끝나는 것에 대해 뭐라고 하지 않았다.

상훈이 받은 전단지를 정리하는 동안 잠시 에어컨 바람을 쐬던 진겸은 핑 도는 머리에 빨리 집에 가고 싶었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진겸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나오자 상훈이 빠르게 뒤따라 나왔다.

“오늘도 바로 집으로 가?”

“응. 가서 좀 쉬려고.”

“아…… 어지럽다고 했지?”

뭔가 할 말이 있는 사람처럼 진겸의 눈치를 살피던 상훈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너도 돈 필요하다고 했지? 많이 필요해?”

“돈이야 많으면 좋지.”

“근데 왜 전단지 알바를 해? 다른 것도 많잖아.”

“사정이 있어서 오래 못 하거든. 그래서 잠깐 할 수 있는 걸 고르다 보니까 하게 됐어. 형은?”

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원래 상가 앞에서 갈라지는데 오늘은 상훈이 진겸을 따라온 거였다.

“나도 그래. 원래 다른 일을 하고 있는데 투잡이 가능하길래 잠깐 하는 거야. ……진겸아. 내가 너니까 알려 주는 건데…….”

상훈이 몸을 가까이 붙였다. 진겸은 더워서 멀어지려고 했으나 주변이 시끄러운데 작게 속삭이는 통에 가만히 있었다.

그는 정말 비밀을 알려 주듯 주변을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번에 괜찮은 사업 하나를 시작했거든? 이게 지금 스타트업 회사라서 초기 자금만 조금 있으면 시작할 수 있어. 나도 이제 두 달 정도 됐는데…… 이번 달에 초기 자금 회수하고 400 더 벌었어.”

“와…….”

“진짜 친한 친구한테도 안 알려 준 건데…….”

“근데 나한테 알려 줘도 되는 거야?”

“그럼. 내 동생 군대 갔는데 너랑 동갑이거든. 동생 생각도 나고…… 너도 돈 필요해 보여서 알려 주는 거야.”

진겸은 다른 것보다 동생 생각이 난다는 말에 아련한 눈빛으로 상훈을 올려다봤다. 진우가 진짜 제 동생은 아니지만 더는 고생시키고 싶지 않아서 일을 하려고 한 거다.

이왕이면 제대로 된 일을 하고 싶었지만 재수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단기 아르바이트를 택한 거였다.

고작 하루 일당 45,000원으로 빚을 갚을 수 있는 것도, 진우를 호강시켜 줄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맛있는 저녁을 사 줄 수는 있었다. 아직은 그걸로 만족했다.

캐럿 마트를 통해 번 돈은 차곡차곡 모으고 있었다. 은행 앱을 통해 통장도 사용할 수 있게 돼서 현금 거래뿐만 아니라 계좌 거래도 해 더 많은 신발과 옷을 팔았다.

그 덕에 통장에 모인 돈이 꽤 됐다. 쓸 용돈 조금만 둔 채 진우에게 전부 줄 생각이었다.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나도 할 수 있는 거야?”

“당연하지. 초기 자금이 조금 들긴 해도 한두 달이면 회수할 수 있고 나처럼 추가 수익도 생겨. 내가 설명하는 것보다는 나 소개해 주신 분 계시거든? 그분한테 강의 들어 볼래?”

“강의?”

“응. 사업 강의. 내일 알바 끝나면 같이 가자.”

상훈의 웃는 얼굴에 진겸이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평소였다면 상훈과 거리를 두고 전단지를 나눠 주었을 텐데 오늘은 붙어 있었다. 3시간 동안 상훈은 자신이 하는 일의 장점을 줄줄 늘어놓았다.

자기 사업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책임감도 생기고 전망이 아주 좋기에 절대 망할 리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사업을 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 없었던 진겸은 그 말보다는 다른 것에 꽂혀 있었다.

직장인.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본 직장인과 진우가 출근할 때마다 정장을 입는 것이 은근히 멋있어 보였던 거다.

진겸은 드높은 빌딩 숲을 천천히 거닐었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거리에는 직장인이 많았다.

오늘 면접에 합격하면 자신도 저 직장인들처럼 정장을 입고, 사원증을 목에 걸고, 커피라 부르고 생명수라 일컫는 테이크아웃 잔을 들고 다닐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나도 곧 직장인이 되는 건가!

괜스레 두근거리는 마음에 서둘러 워치를 확인했다. 심리적인 거였는지 심박수는 정상이었다.

“저 건물이야.”

상훈의 손끝이 가리킨 곳은 비슷한 빌딩들이 줄지어 있는 곳이었다. 여러 회사가 밀집된 건물이었다.

혼자 왔으면 헷갈릴 만한 외관에 상훈의 뒤를 졸졸 쫓아 걸었다.

오늘은 사업 설명을 듣는 자리라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 안 될 것 같아, 오기 전에 죽집에 들러 참치 야채죽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배도 부르고 바람도 은은하게 부는 게 굉장히 기분 좋은 날이었다.

“나한테 이거 소개해 준 분이 이사님이거든. 그분이 잘 설명해 주실 거야.”

어쩐지 진겸보다 상훈의 얼굴에 흥분이 맴돌았다. 게다가 어제 이력서가 필요하다는 말에 구직 앱에 등록했던 이력서 캡처 본을 그대로 전달했다. 이래도 되나 싶었는데, 괜찮다고 하길래 그냥 보냈었다.

상훈이 18층을 눌렀다. 진겸은 어깨에 멘 캔버스 가방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강의라고는 했지만 면접이나 마찬가지란 말에 자꾸만 긴장됐다.

상훈이 멈춰 선 곳에는 ‘HMTM마케팅’이라는 간판이 있었다.

“여기야.”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근무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보였다. 대부분 헤드셋을 낀 채 모니터를 보고 얘기하고 있었다. 전화가 주 업무이다 보니 당연한 거였다.

몇 번 와 본 상훈은 진겸을 이끌고 안쪽에 있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이사님. 저희 왔어요.”

“아, 어서 와. 어제 말했던 그 친구?”

“네. 이력서 보셨죠?”

“어. 봤어.”

남자는 대놓고 진겸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 시선이 꼭 품평하는 듯했다. 하지만 긴장한 진겸은 얕게 심호흡을 할 뿐이었다.

“안녕하세요. 백진겸입니다.”

진겸이 허리를 숙여 인사하자 남자가 웃는 얼굴로 응대했다.

“반가워요. 회의실로 데리고 가. 금방 갈게.”

“네. 진겸아, 이리 와.”

상훈은 사무실 안쪽에 마련된 회의실로 진겸을 데리고 갔다.

기다란 테이블이 있는 내부는 썰렁했다. 회의실이라는 곳을 처음 와 본 진겸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구경했다.

전화를 받던 상담원들과 사무 업무를 보던 직원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진겸과 상훈이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속닥거렸다.

“오늘 온다는 사람 남자 아니었어요?”

“남자 맞는데…….”

“되게 예쁘게 생겼지? 와…….”

소곤거리는 목소리는 다행히 회의실까지 닿지 않았다.

남자는 책장에서 어제 뽑아 놓은 이력서와 회사 설명이 장황하게 쓰인 파일을 꺼냈다. 그러고는 조용히 하라며 검지를 세워 입술에 붙였다.

“다들 입조심.”

회의실로 들어온 남자는 문을 닫고서 앞쪽에 앉아 들고 있던 서류들을 내려놨다.

“정말 스물네 살 맞아요?”

“네.”

“되게 어려 보이네. 학생이라고 해도 믿겠어요.”

진겸은 뭐라고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상훈을 힐끗 봤다가 그냥 웃었다. 그러자 남자도 웃으며 자신이 들고 온 프린트를 진겸의 앞으로 밀었다.

“이거 설명해야 하는데 옆으로 가도 되죠?”

“예, 오세요.”

옆에 자리도 많은데 그리 묻는 게 의아했지만, 진겸은 제 의자를 더 옆으로 옮겼다. 면접관이 웃으며 진겸의 옆자리로 이동했다. 상훈도 의자를 바싹 붙였다. 졸지에 사이에 낀 모양새였다.

“상훈이한테 얘기 들으셨을진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

남자는 제 명함을 진겸의 앞쪽으로 밀었다. 두툼한 흰색 명함에는 [HMTM마케팅 영업 이사 임기표]라고 새겨져 있었다.

임기표는 프린트가 진겸에게 잘 보이도록 펼쳐 놓고는 동그라미가 너무 예쁘게 그려질 것 같은 빨간색 색연필을 쥐었다.

“우리 회사가 뭐 하는 곳인지는 알고 온 거죠?”

“예, 네트워크 마케팅하는 곳이라고 들었어요.”

“맞아요.”

정답을 맞힌 학생을 바라보는 선생님 같았다. 그는 웃는 낯으로 프린트 제일 앞장에 적힌 ‘HMTM마케팅’에 동그라미를 쳤다.

“우리가 주로 하는 일은 마케팅, 즉 영업이에요.”

진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기표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그럼 무슨 영업을 하느냐?”

프린트가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사람들의 모양이 가계도처럼 그려져 있었다.

“자, 여길 보면 이게 진겸 씨인 거예요.”

“저요?”

“그렇죠. 중간에 있죠? 위에 있는 게 상훈이고요.”

“상훈 형이요?”

“네. 아래를 보면 더 많은 사람이 보이죠? 이 사람들이 이제 진겸 씨 밑으로 들어올 사람들인 거고요.”

빨간색이 쭉 그어지자 진겸의 눈동자가 따라 움직였다.

“진겸 씨가 여기서 영업을 해서 사람들이 진겸 씨를 믿고 우리 회사 제품을 쓰면, 그 매출의 10%를 인센티브로 받는 거죠.”

임기표는 집중하는 진겸을 보며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럼 이 사람들도 똑같이 영업을 하겠죠? 그럼 거기에서 발생하는 매출의 4%가 진겸 씨한테 가는 거예요.”

“와…….”

“우리가 하는 일은 간단해요. 회사 사이트가 있는데 거기에 있는 물건들을 파는 거예요. 물론 대량으로 사는 사람들과 상담하고 가격을 조율하는 것도 해야 하고요. 쉽죠?”

진겸이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모든 판매는 인터넷으로 하고 있어서 직접 고객과 만날 일도 없고요.”

“그럼 제가 영업한 사람들이 사이트에서 물건을 사면 저한테 10%가 온다는 거예요?”

“그렇죠. 이해가 빠르네요.”

“저는 상훈 형이 데려왔으니까…….”

“상훈이한테 진겸 씨가 사는 물건의 매출 4%가 가는 거죠.”

프린트 다음 장을 넘겨 어떤 물건을 파는지 목록을 보여 주었다. 대부분이 생필품이었고 화장품이나 보조 식품도 보였다. 꽤 종류가 다양했다.

“이런 건 시중에서도 많이 봤을 거예요. 많이 팔리거든요.”

“어…….”

본 적 없는 물건도 있어서 선뜻 대답을 못 하자 임기표는 서둘러 프린트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거기에는 수익 구조가 자세히 쓰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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