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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22)화 (22/92)

22화

진우는 정장 재킷을 팔에 걸치곤 자기 전에 한쪽에 몰아 두었던 쇼핑백 전부를 집어 들었다. 선 이사가 준 것들이었다.

어젯밤 자기 전, 진겸에게 돌려주자고 했었다.

딱 봐도 비싸 보이는 것들이었기에 혹시나 나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길까 봐 한 말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진겸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가 만나서 준다는 진겸의 말에 진우가 내일 회사로 가지고 가겠다고 못 박았다.

진겸은 별로 내켜 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물론 진우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이유였다.

진우는 아쉬워서 그런 줄 알았지만, 진겸은 그가 수혁과 또 부딪칠까 봐 그런 거였다.

그렇게 아침 출근길에 온갖 시선을 받아 가며 쇼핑백을 들고 출근했다. 버스와 지하철에서 사람들 틈바구니에 끼어 구겨진 쇼핑백들은 다행히 찢어지진 않았다.

“그건 또 뭐야?”

진우는 뒤에서 들리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탁 이사였다.

원범의 시선은 진우의 양손에 닿아 있었다. 명품 로고가 박힌 쇼핑백들이 손에 잔뜩 쥐어져 있었던 탓이었다.

진우는 살짝 구겨진 쇼핑백들을 꽉 쥔 채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그거 뭐냐고. 그런 걸 준 기억은 없는데.”

그렇다고 진우가 샀다고 하기에는 값비싼 것들이었다.

제 비서가 다른 사람의 심부름을 할 리도 없고. 그렇다는 건…….

“백진겸 건가?”

원범은 싸늘한 냉기를 폴폴 풍겨 대며 위협적으로 말했다. 그게 아니라면 진우가 저런 쇼핑백을 들고 있을 리 없었다.

평생 백진겸에게 휘둘리면서 살아왔으면서도 버리려고 하지 않는 행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나마 기억을 잃은 후부터는 조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언제 전처럼 돌아갈지 모르는 거였다.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몸을 움츠리거나 한 발짝 물러났을 목소리였지만 진우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선 이사 겁니다.”

“…….”

“…….”

“잘못 들은 건가? 네 입에서 왜 선 이사가 나오지?”

커다란 몸이 진우를 가리자 그림자가 생겼다.

출근 시간이라 오가는 사람이 많은 로비 앞에서 할 만한 대화도, 행동도 아니었다.

그것도 이사와 그의 개인 비서가 말이다.

다른 직원들은 모르는 척 지나가려고 부단히도 애썼다. 그 시선을 느낀 진우는 쓸데없이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올라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이것들 놓고 가겠습니다.”

진우가 엘리베이터에 타더니 열림 버튼을 누르며 어서 타라는 무언의 행동을 취했다.

직원들은 탁 이사와 같은 엘리베이터에 타고 싶지 않아 멀찍이 서서 어서 그들이 올라가길 기다렸다.

탁 이사와 선 이사의 사무실은 층이 달랐기에 진우가 먼저 내렸다.

“이따 뵙겠습니다.”

원범은 여전히 탐탁지 않은 눈초리였으나 돌려주는 듯한 모양새에 말을 삼켰다.

아직 주인이 오지 않은 이사실은 비서가 지키고 있었다.

같은 비서지만 회사에 고용된 그들과는 다르게 진우는 탁 이사가 개인적으로 고용했기에 서로 친하진 않았다.

오히려 낙하산이라 생각하며 그들은 진우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

비서는 진우가 주고 간 것들을 그대로 이사실 안에 넣어 두었다.

출근한 수혁이 그걸 보고 눈썹을 들어 올릴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는 괜찮았다. 하지만 그 이후에 문제가 터졌다.

수혁이 그 짐을 전부 들고 원범의 사무실로 향한 거였다.

“이사님!”

양 비서는 연락도 없이 온 선 이사가 이사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가려는 걸 말리기 위해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가 들어가는 게 더 빨랐다.

허공에 손을 휘젓게 된 양 비서가 난감하다는 얼굴로 안을 살폈다.

원범은 들고 있던 펜을 툭 내려놓고는 양 비서에게 나가라고 눈짓했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진우가 서 있었다.

수혁은 들고 있던 수많은 쇼핑백을 테이블 위에 던지듯 떨어트렸다.

“이렇게 돌려주면 내가 좀 섭섭한데?”

“…….”

“백 비서한테 준 거 아니고 백진겸한테 준 거야. 백 비서가 가지고 올 필요 없었던 물건이라고.”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이건 명백한 경고였다.

자기가 한 일에 끼어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였다.

진우는 차가운 시선을 받으면서도 기죽지 않고 대답했다.

“형이 가져다주라고 해서요. 제가 형 말은 잘 듣거든요.”

“알지. 백진우가 백진겸 말이면 껌뻑 죽는다는 거 아주 잘 알지. 백진겸이 갖다주라고 한 거면 어쩔 수 없네. 내가 다시 갖다주지, 뭐.”

“…….”

수혁은 자기가 던졌던 쇼핑백들을 다시 주워 들었다.

나가려던 그의 등에 대고 진우가 물었다.

“……형한테 관심 있으십니까?”

“어. 많아. 요즘 재밌어.”

“형은 장난감이 아닙니다.”

탁 이사 옆에 일 년을 있었다. 그 시간 동안 수혁도 봐 왔다.

그는 제 진겸에게 관심을 보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남녀 가리지 않고 만나 왔고 누군가를 진득하게 오래 만나는 걸 본 적도 없었다.

행실이 가벼우면서도 손에 잡히지 않아서 그런지, 사람들은 선수혁을 갖고 싶어 안달 냈다.

매사가 흥미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처음에는 자신에게도 관심을 보였었다. 하지만 지금 제 옆에 있는 사람 때문인지는 몰라도 그 관심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백진겸을 봤을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흥미롭게 보다가 이내 관심을 껐다.

그런데 이제 와서 관심이 있다고? 재밌다고?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사실 이상하기는 했다. 원범과 같이 다니기는 해도 집까지 찾아온 적도, 병원에 온 적도 없었다. 그런데 그날은 같이 병원에 왔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자신이 모르는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형이 저 남자의 흥미를 끌 만한 무언가를 한 게 분명했다. 그 기준이야, 당연히 모르지만 말이다.

‘어떻게 떨어트리지?’

지금 진겸은 기억을 잃었다. 전이라면 알아서 철벽을 치거나 벗겨 먹을 만큼만 가까워졌을 텐데 지금은 어떻게 반응할지 예상이 되질 않았다.

어제도 같이 백화점에 가고 밥을 먹고, 저렇게 많은 것을 받아 왔으면서 돌려주자는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진겸이 달라졌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게 저 남자의 흥미를 끈 걸까?

진우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수혁을 살폈다. 그러자 뒤돌아 있던 그가 고개를 살짝 꺾어 옆얼굴을 보였다.

“맞아. 장난감이 아니지. 그래서 더 재밌는 거야. 어디로 튈지 모르니까.”

* * *

퇴근한 진우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진겸을 앉혀 놓고 온갖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 대부분 호신술에 관한 거였다.

아예 검색창에 쓰여 있는 단어가 ‘호신술’이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본 것 중에서 제일 나아 보이는 걸 보여 준 거였다.

[뒤에서 목 조를 때 이것만 알면 탈출 가능!]

[실전에서 통하는 기술!]

[갑자기 강도가 나타났다? 이것만 알면 생존 가능성 200%!]

[멱살? 이것만 알면 5초면 됩니다]

아무리 봐도 제목만큼 정직하고 진지한 동영상들이었다.

치한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하는 영상을 보는 진겸의 얼굴은 뚱했다.

삼겹살을 먹으면서 왜 이걸 봐야 하냐는 불만이 그득그득했다.

평상이 없는 옥상이라 밖에 돗자리를 깔고 가스버너에 프라이팬을 올리고 구웠다.

삼겹살을 구우면 기름이 튀는 소리도 맛있어야 하는데, 핸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 때문에 그냥 기름만 튀었다.

진우가 오면 본인이 상차림이랑 삼겹살 굽는 것도 다 하려고 했던 진겸은 아무것도 못 한 채 작은 화면만 봐야 했다.

진겸이 작게 구시렁거려도 고기를 굽는 진우는 아랑곳하지 않고 끝까지 보라며 다음 동영상도 틀었다. 진겸은 제 입으로 들어오는 고기쌈을 받아먹어 가면서 대충 시청했다.

“앞으로 형한테 접근하는 새끼…… 아니,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정강이부터 까.”

“그러다 나 범죄자 되면?”

“나도 같이 감옥 들어갈게.”

즉각 나온 대답에 진겸이 놀라 눈을 크게 뜨고는 진우를 바라봤다.

아니, 범죄자가 되지 않게 해야지. 같이 들어간다니. 이렇게 막 나가는 애가 아닌데…….

진겸의 입에는 쌈이 들어 있어 볼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진우가 픽 웃으며 서둘러 고기를 뒤집었다. 그러고는 팔을 뻗어 진겸의 허벅지를 잡았다. 커다란 손에 허벅지가 금세 가려졌다.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이렇게 만지면 무조건 동영상에 나온 것처럼 해. 팔을 못 쓰면 다리를 쓰고, 다리를 못 쓰면 주먹 쥐고 턱 아래를 날리면 돼. 알겠지?”

“……왜 그러는데?”

진겸을 빤히 바라보는 진우의 눈에는 비장함까지 맴돌았다.

“세상이 너무 험해서 그래.”

진우가 이를 까득 갈았다. 오늘 회사에서 선 이사가 보였던 행동 때문에 더 불안했다.

직장 상사만 아니었으면 쇼핑백을 얼굴에 던졌을 거다. 그나마 같은 회사였기에 이사실에 고이 가져다준 거였다.

선 이사가 정말 재미, 흥미.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접근하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어제 선 이사랑 백화점에 간 이유를 물었을 때 진겸이 한 대답에 정말 손으로 이마를 때리고 싶었다. 물론 진겸의 이마가 아니라 제 이마 말이다.

‘친구가 없어서’ 백화점에 같이 갔고, ‘고기’를 사 준다고 해서 같이 밥을 먹었다는 말.

정말 그걸 듣는데 이제 더 이상 백진겸을 백진겸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진우는 또 생각난 어제 일에 다시 이를 까득 갈았다.

기억과 함께 사람에 대한 경계심마저 잊어버린 듯했다.

그 와중에도 고기가 타지 않게 잘 구워서 밥, 쌈장 그리고 각종 채소와 함께 쌈을 만들어 진겸의 입에 넣어 줬다.

진겸은 볼이 빵빵해질 정도로 큰 쌈에 양쪽 이빨을 다 사용해 씹었다.

“이거 언제까지 봐?”

“오늘 자기 전까지 쭉 봐. 계속 보면 무의식으로라도 남겠지…….”

보기 싫다는 듯 툴툴거리며 말했으나 진우는 완강했다.

그렇게 진우가 엄선한 호신술 영상을 다 보고 나서야 핸드폰에서 눈을 뗄 수 있었다. 보는 동안 삼겹살은 동이 났다.

설거지는 진우가 했다. 진겸이 한다고 했으나 동영상이나 보라는 답이 돌아왔다. 후식으로 사 온 과일을 먹는 동안에도 계속 봐야 했다.

다행히도 진우가 우려했던 수혁의 방문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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