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꺼억.”
어제 안 됐던 소화가 드디어 되나 보다. 트림이 튀어나왔다. 그러고 나니 뭔가 한결 편해졌다.
옥상 한쪽에 있는 먼지가 묻은 상자를 잘 접어서 그 위에 저렴해 보이는 금색 보자기를 깔았다. 아무리 봐도 명절 때 선물 세트를 포장한 보자기가 분명했다.
“흐응.”
그렇게 하나둘씩 확인해 가며 여러 장을 찍었다. 사진을 확인하는데…….
“이야. 잘 찍었다. 나 소질이 있네.”
꽤 잘 나왔다. 배경만 더 좋았다면 더욱 훌륭한 판매 사진이 되었을 것 같았다.
혼자서 만족하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진을 찍다 보니 어느덧 점심이 되었고, 진우가 차려놓은 밥을 맛있게 먹었다. 먹는 양을 생각해서 차린 것 같은데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였더니 다 먹었다.
사진을 다 찍고 물건들을 다시 안으로 옮겼다.
“……운동 안 해도 되겠는데?”
고작 현관을 왔다 갔다 한 건데도 힘들었다. 게다가 계속 햇볕 아래 있었더니 머리가 핑 돌았다.
다 옮기고 나서는 터덜터덜 걸어 침대에 풀썩 누웠다.
“약한 몸뚱이야! 예쁘면 다냐!”
허공에 주먹질과 발길질을 마구 하다가 축 늘어졌다.
“아…… 검색.”
서둘러 핸드폰에 충전 잭을 꽂았다. 컴퓨터나 노트북이 있다면 수월하게 검색할 텐데, 여기엔 그런 게 없었다. 그래서 정가를 찾는 것도 핸드폰으로 해야 했다.
사진을 찍으면서 종이에 정리해 놓았던 상품명을 검색해 가며 정가와 중고가를 열심히 검색했다.
비싸게 올려서 안 팔리는 것보다는 하나라도 빨리 파는 게 나아서 조금 저렴하게 올렸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연락이 왔다.
한 번 메시지가 오자 계속 오기 시작했다. 같은 제품으로도 여러 메시지가 오기도 했다. 그중에서 깎아 달라는 말 없이 바로 거래하자는 사람들에게 답장했다.
한 번에 가지고 나갈 수 있는 양은 정해져 있다 보니 오늘 거래가 가능한 사람과 먼저 약속을 잡았다.
언덕을 내려가면 큰 마트가 하나 있다. 거기서 만나기로 하고 거래할 신발들을 주섬주섬 찾아 쇼핑백에 넣었다.
헷갈리지 않게 어떤 것인지, 가격은 얼마인지 포스트잇에 적어 붙여 놓기까지 했다.
“날씨 좋다.”
공기도 좋고 하늘도 청량했다. 그래도 아까 어지러웠던 걸 생각해서 캡모자를 쓰고 나왔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몸은 병만 있는 게 아닌 듯하다. 그냥 몸 자체가 약했다.
마트 근처에 서서 약속 시간이 되길 기다리고 있자 한 명이 다가왔다.
“……학생?”
아니, 교복 입은 학생이 왜 이 시간에 거래하러 나오는 건데?
진겸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바라보자 학생이 멋쩍은 듯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잠깐 나온 거라 빨리 들어가야 해요.”
“어…… 네, 그래요.”
그 자리에서 물건을 확인하고 이내 현금을 받았다. 계좌도 모르고 비밀번호도 몰라서 무조건 현금 거래만 한다고 했다. 그렇게 9만 원이 지갑에 채워졌다.
“잘 가요.”
진겸이 웃으며 인사하자 학생은 가볍게 묵례하고는 뛰어갔다.
그 후에도 네 번의 거래가 더 이루어졌다.
백진겸이 갖고 있던 신발 대부분이 비싼 거여서 지갑은 금세 두꺼워졌다. 하지만 물건을 파는 걸로 돈을 버는 건 한계가 있다.
게다가 백진겸 어장에 사는 물고기들이 준 것들이라 약간의 죄책감도 느껴야 했다.
그래도 처음으로 번 돈이나 마찬가지였다. 결코 좋은 방법은 아니지만…….
“고기, 고기. 삼겹살.”
작게 흥얼거리며 마트에 들러 삼겹살과 쌈 채소를 샀다. 오늘 저녁은 삼겹살이다. 진우도 고기를 좋아한다는 소리를 들어서 택한 메뉴였다. 물론 먹고 싶기도 했다.
집으로 돌아와 마트에서 산 것들을 정리해 놓고, 내일 거래할 물건을 한쪽에 잘 모아 두었다. 그러고는 침대에 엎드려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앱을 깔았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르바이트해 본 적 없는 건지, 구직 사이트에 아이디도 없다.
다행히 주민등록증이 있어서 가입은 쉽게 할 수 있었다. 순간 핸드폰 전화번호를 몰라서 휴대전화 정보를 확인해야 했다.
“……아는 게 없네.”
이력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쓸 게 하나도 없었다. 하물며 사진도 없다.
무슨 학교를 졸업했는지도 모르고 가정사도 어렴풋이만 알고 있다. 어릴 적 엄마는 도망가고 아빠랑 같이 산 걸로 기억하고 있다.
백진겸의 병원비 때문에 빚을 내기 시작했고 그 빚을 갚기 위해 도박에 빠진 아빠마저 소식이 끊겼다. 그나마 백진우가 벌어서 이만큼 사는 거였다.
더구나 아버지가 진 빚은 고스란히 자식들에게 넘어갔고 갚기도 전에 백진겸의 병원비를 위해 또 빌리는 상황이었다.
“빚이 빚을 낳고 또 빚을 낳고 그러다 보면 또 빚이 생기겠지!”
침대에 엎드린 채 이력서 화면을 멀뚱멀뚱 보고 있다가 그나마 쓸 수 있는 이름, 나이, 전화번호 그리고 주소. 이것만 채워 넣었다. 나머지를 써도 경력란이 텅텅 빌 거다.
“괜찮아. 얼굴로 합격할 거야.”
근거 없는 자신감이었다.
‘진우 언제 오지?’
진우가 오는 시간에 맞춰서 삼겹살을 구우려고 했는데 언제 퇴근하는지 묻질 않았다. 게다가 퇴근 시간이 들쭉날쭉했다.
근로기준법을 한참이나 위반하는 근무 형태였다. 고용주가 탁원범이라 그런가 보다.
진우를 생각하다가 문득 궁금했던 게 다시금 떠올랐다.
백진우는 유일한 약점이자 지키고 보호해야 할 백진겸이 사라지고 나서 행복했을까?
탁원범은 정말 진심으로 백진우를 사랑했던 걸까?
두 사람은 각자의 엔딩에 행복했을까?
《그레이》를 끝까지 본 게 아니라 그건 알 수 없었다.
‘뭐…… 지금은 상관없지!’
궁금하기는 했지만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진우의 ‘현재’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일생을 한 사람에게 휘둘렸는데. 또 휘둘리는 인생을 사는 건 불쌍하잖아.’
비록 자신이 진짜 백진겸은 아니지만 고통받았던 시간을 덮을 수 있을 만큼 진우가 행복하길 바라고 있다.
진겸은 조금 더 엎어져 있다가 증명사진을 찍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원래 이런 건 의욕이 있을 때 해야 한다. 나중에 하려고 하면 귀찮아진다.
밖으로 나오자 아까보다 해가 더 쨍했다. 순간 눈이 부셔서 가늘게 뜨고는 현관문을 잘 잠갔다.
요즘에는 흔치 않은 유리문이라 도둑이 들면 너무 손쉽게 털릴 것 같은 허술한 집이다.
‘역시…… 아무리 전망이 좋아도 이사 가야 해.’
건강한 몸이었다면 어디서 살아도 상관없을 텐데 이 몸은 너무 연약했다. 점심때 밥 먹고 나서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기침을 하는데 와, 사람이 기침하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몸소 경험했다.
감기 걸렸을 때 기침하면 폐가 쥐어짜지듯 아픈데. 딱 그랬다.
물론 어제가 더 아팠다.
“과보호하는 이유가 있었어…….”
모든 게 백진겸이 의도한 대로였겠지만 확실히 이렇게 연약한 가족이 있다면 과보호할 것 같다.
계속 오는 캐럿 마트 메시지를 확인하며 사진관을 찾아 증명사진을 찍었다. 인화 시간이 좀 걸릴 줄 알았는데 금방 된다고 해서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내부를 쭉 둘러봤다.
‘모델도 괜찮겠다.’
키가 작기는 해도 패션쇼에 서는 모델이 아니라 광고 모델이나 인터넷 쇼핑몰 피팅 모델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무엇을 해야 잘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직업이 있었다. 비서. 지금 진우의 직업이었다.
“자격증…….”
어떤 일이든 관련된 자격증이 있다면 확실히 유리하긴 할 거다. 물론 자격증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학력도 몰라서 금방 마음을 접었다.
얼마 안 돼 인화된 증명사진을 받았다.
“……진짜 굴욕이 하나도 없네.”
진겸은 감사하다고 말하며 계산하고 밖으로 나왔다.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 증명사진 한 장을 꺼내 하늘을 배경으로 찍었다. 그러고는 진우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후 4:23 | 사진 |
백진우
증명사진 찍었네. | 오후 4:24 |
오후 4:24 | 잘 나왔지? 예쁘지? |
백진우
응. 예쁘다. | 오후 4:24 |
신나게 몸을 흔드는 이모티콘 |
오후 4:24 | 몇 시에 끝나? |
백진우
6시. 뭐 사 갈까? | 오후 4: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