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19)화 (19/92)

19화

수혁의 차가 향한 곳은 병원이 아닌 진겸의 집이었다. 가파른 언덕을 올라 도착한 집은 매번 봐도 적응이 안 될 정도로 낡아 빠졌다.

“진짜 병원 안 가도 되겠어?”

“네. 지금 완전 괜찮아졌어요!”

차에 탈 때까지만 해도 얼굴에 핏기가 없더니, 지금은 좀 살아난 모양이다. 여전히 창백할 정도로 흰 피부지만 아까보다는 나았다.

아까 진우에게 전화했을 때 그는 드물게 흥분해서 큰소리를 냈다. 진겸이 아닌 수혁을 향한 화였다.

거기에 대고 심장이 쿵쿵 뛰고 머리가 어지럽다고 말하자 당장 병원으로 가라는 소리를 전화 끊을 때까지 들어야 했다.

하지만 진겸은 사흘 연속으로 병원을 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푹 쉬겠다고 몇 번이고 말한 후에야 조심히 들어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옆에서 통화를 듣던 수혁도 진우의 말에 동의했다.

집보다는 병원에 가는 게 나아 보였다. 그러나 본인이 가기 싫다는데 억지로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도 없었고.

그래서 차량 내비게이션에 저장된 이곳으로 온 거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기 사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고마운 일이 두 개여서 두 번 인사했다. 그러고는 차에서 내리는데 수혁이 따라 내렸다.

진겸은 대문 앞에 서서 그가 다시 타고 가길 기다렸다. 멀뚱멀뚱 보고 있는데 수혁이 뒷좌석에 있는 쇼핑백 대부분을 꺼냈다.

수혁은 진겸을 지나쳐 대문에 발을 대고는 툭 밀었다. 철문은 소름 끼치는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안 가?”

“가야죠……? 안 가세요?”

“이것만 올려 주고 갈게.”

그냥 진겸의 손에 쥐여 주고 가려고 했는데 아까 아팠던 것도 신경 쓰였고, 잡았던 팔이 너무 얇은 것도 마음에 걸렸다. 어제 업을 때도 느꼈지만 너무 말랐다.

먹는 양이 적어서 그런 건지, 아픈 여파로 덜 성장한 건지.

어느 쪽이든 상관은 없지만 괜히 끙끙거리고 올라가는 걸 보느니 가져다주고 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수혁이 앞장서서 올라가자 진겸이 서둘러 그 뒤를 쫓았다.

“그걸 왜 가지고 가요?”

“네 거니까.”

진겸은 이해하지 못하고 연신 눈을 끔뻑거렸다. 분명 자신이 입어 보긴 했다. 가방도 들어 보고 지갑도 보면서 여러 가지 품평을 하긴 했다. 직원에게는 들리지 않게 수혁의 옆에 딱 붙어 말이다.

그럴 때마다 네 취향이 뭐냐고 묻기는 했어도 어디까지나 참고하기 위한 건 줄 알았다. 그런데 대뜸 네 거라니.

“……왜 내 거지?”

묻는 게 아닌 혼잣말이었다.

수혁은 철제 계단을 탁, 탁 밟아 가며 위로 올라갔다. 몸도 약하다는 애가 옥탑방에 사는 게 이상하기는 했다.

주변에 높은 건물이 아직 들어오지 않아 탁 트인 전망만큼은 괜찮았다. 원범의 집에서 보는 것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었다.

문 옆에 쇼핑백을 내려놓았다. 여기에 두면 알아서 가지고 들어가겠지.

볼일을 끝낸 수혁이 가려고 하자 진겸이 서둘러 그의 팔을 잡았다.

“진짜 저거 놓고 갈 거예요?”

“네 거라고 했잖아.”

“그러니까…… 저게 왜 제 거냐고요.”

무엇보다 같이 돌아다녔기에 저 쇼핑백 안에 든 것들의 가격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엄두도 못 낼 만큼 비싼 것들이었다. 처음에 별생각 없이 가격표를 보았다가 얼마나 놀랐던지.

이해 못 하는 듯한 진겸의 표정에 수혁이 말을 덧붙였다.

“오늘 나랑 놀아 줘서 주는 거야.”

“이거 받을 정도로 놀아 드린 적 없는데요…….”

다시 가지고 가라면서 쇼핑백을 주워 들었다. 하지만 수혁은 받지 않았다.

진겸은 도로 가지고 가라는 자기 의사를 충분히 내보였지만, 수혁은 개의치 않고 그대로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서둘러 계단을 따라 내려가려 했지만 쇼핑백이 걸리적거려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수혁이 차에 타 버렸다. 다급한 손길로 창문을 두드리자 그가 서로 눈만 마주 볼 정도만 내렸다. 그 틈 사이로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수혁의 눈이 초승달처럼 곱게 휘었다.

“다음에 나 만날 때 입고 와.”

“우리 또 봐요?”

“응. ‘또’가 아니라 ‘계속’ 볼 거야. 아, 그리고.”

이번엔 또 뭔가 싶어 보고 있자 가까이 오라며 수혁이 손을 까딱거렸다.

“다음에 만날 땐 형이라고 해. 네가 우리 회사 직원도 아니고, 왜 날 이사라고 불러?”

“……아저씨라고 부르는 거 싫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까 형이라고 하라고. 간다.”

진겸은 미련 없이 올라가는 창문과 이내 출발하는 차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만 봐야 했다.

손에 쥐고 있던 쇼핑백의 무게에 팔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뭉쳐진 손잡이 끈들이 손바닥 살을 짓눌렀다.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수혁의 행동에 진겸의 고개가 점차 옆으로 꺾였다.

“왜 저래……?”

혹시 진우에게 접근하기 위해 이용하려는 건가?

순간 진겸의 얼굴이 왈칵 구겨졌다. 자신이 이용당한다는 생각 때문이 아니라, 수혁이 진우에게 접근하려고 한다는 그 부분에서 불만이 퐁퐁 솟아났다.

절대 용납하지 않을 거다. 앞으로 수혁은 이 집 근처는 물론이거니와 진우의 근처에도 접근 불가다.

꼭 그러리라 다짐하며 진겸의 눈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거실을 바라보는 진겸의 눈동자는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움직였다. 아침에 진우가 이 난장판을 봤을 거라는 건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었다.

아침에 바빠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괜히 찔려서 걸어 다닐 수 있는 공간을 조금씩 만들어 놨다.

거기에 쇼핑백이 더해지자 기껏 만든 공간이 사라졌다. 빨리 팔아서 돈도 벌고 집 정리 좀 해야겠다 싶었다.

“이건 어쩌지…….”

진짜 백진겸이었다면 좋다고 받았을지 몰라도 자신은 아니었다. 부담스러웠다.

만약 제 것을 고르는 줄 알았다면 매장에서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추천하지 않았을 거다.

무엇보다 쇼핑백 겉면에 큼지막하게 그려진 로고가 너무 튀었다. 브랜드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알 수 있는 고가 명품이었다.

특히나 가방이 필요하다는 말에 최선을 다해 골라 주었던 슬링백.

슬링백 하나에 300만 원이 넘는다는 사실에 경악했다가, 어차피 제 돈이 아닌 수혁이 쓸 거라는 생각에 크게 생각하지 않고 골랐다.

정장을 입은 그에게는 어울리지 않아도 캐주얼하게 입으면 너무도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저것만이 아니었다. 옷과 신발, 지갑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지금 여기에 있는 것만 계산해 봐도 천만 원이 넘었다.

참…….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걸 여지없이 느껴 버렸다.

그런데 내 게 될 줄이야…….

몇 만 원짜리였다면 그냥 감사하다고 하며 받았을 거다. 하지만 저건 정말 아니었다.

어떻게 돌려줄까 고민하고 있는데 목구멍까지 욱여넣었던 한우가 문제였던 걸까. 아니면 넘어질 뻔할 때 놀라서일까? 속이 메슥거렸다.

이대로 한번 게워 내면 편해질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먹은 게 아까워서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그나마 물건들이 없는 깨끗한 침대 위로 올라왔다.

팔과 다리를 쭉 뻗어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으니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온다.

잠을 못 잔 것도 아닌데 왜 졸린 걸까. 너무 많이 먹어서 그런가. 고기가 부드러워서 그랬나?

졸려서 생각하는 방향도 이상하게 흘렀다.

입이 찢어질 정도로 크게 하품을 하고는 몸을 옆으로 틀어 누웠다.

먹고 바로 누울 때는 위가 있는 곳이 아래로 향하는 게 좋다는 말을 들어서 왼쪽으로 누운 거였다.

하품으로 인해 생긴 눈물을 닦아 내고 답답한 속을 애써 외면하며 잠들었다.

얼마나 잤을까, 귓가에 들리는 소리에 진겸이 깨어났다. 아까 집에 들어와 불을 켰는데 어느새 꺼져 있었다.

그러다가 거실에서 보이는 불빛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던 진겸이 몸을 일으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연이어 들렸다.

“……진우야?”

“일어났어?”

“……불도 안 켜고 뭐 해?”

“형 깰까 봐, 안 켰어.”

그 말에 진겸의 마음이 찡해졌다. 도대체 백진겸이 어떻게 행동했길래 퇴근하고 온 집에서 불조차 켜지 못하는 건지.

콧잔등을 찡그린 진겸이 침대에서 내려와 스위치를 전부 켜 집을 환하게 만들었다.

“앞으론 내가 자도 불 켜. 어두운 데 계속 있으면 눈 나빠져.”

“……알았어.”

머뭇거리며 대답한 진우의 손에 들린 가방을 본 진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 해?”

“아…… 못 보던 게 있길래.”

퇴근하자마자 바로 집으로 온 진우는 침대에 누워 잠든 진겸을 살폈다. 호흡도 고르고 식은땀을 흘리거나 아파하는 신음을 내지도 않았다.

아까 심장이 빨리 뛴다는 말에 당장 달려오고 싶었다. 특히나, 어제 진겸이 잠들어서 전하지 못한 말이 있었다.

훈일과 함께 밖에 나갔을 때, 그는 지금 진겸의 몸으로 수술하기엔 좋지 않다며 수술 날짜를 미뤄야겠다고 했다.

면역력이 너무 떨어져 있다 보니, 수술이 무사히 끝난다고 하더라도 회복이 더딜 것이고, 최악의 경우 합병증까지 올 수 있다는 것이다.

조직 판막의 수명이 다 되고 있어 수술을 결정한 거였지만 급한 건 아니었다.

훈일은 지금 제일 중요한 건 진겸의 기억을 찾는 게 아니라 몸이 건강해야 한다고 몇 번이고 강조했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어 진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쨌든 진겸이 복숭아를 먹게 된 건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벌어진 일이라는 게 진우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아까 심장이 아프다는 진겸의 말을 듣고 진우는 제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다행히 지금 상태를 보니 괜찮아진 듯했다.

잠든 진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불을 덮어 주고는 방 불을 끄고 거실로 나왔다.

구석에 있는 스탠드를 켜고 거실 불도 껐다. 어두운 곳에서 생활하는 건 익숙했다. 그러다가 아침에는 못 봤던 쇼핑백을 발견했다.

“…….”

모르는 로고도 있지만 익숙한 것들도 있었다. 기억을 잃고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는 생각했는데…… 천성을 버리진 못한 모양이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