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수혁이 기억하는 백진겸은 정말 형편없는 인간이었다. 몇 번 만나지 않았는데도 알아챌 수 있었다.
자기 동생에게 호감을 가진 인간을 노렸으니까.
정말 원범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그게 눈에 보여 원범 또한 그를 싫어했던 거였다.
백진겸에 대한 평가는 굉장히 박한 편이었다.
입 밖으로 형제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비슷한 점이 하나도 없었다. 아무리 이란성 쌍둥이라지만 둘의 성향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백진겸은 백진우에게 암 같은 존재였다. 그렇다고 수혁이 백진겸을 안 좋게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아직은 자신의 재미를 위해 옆에 두고 볼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전의 백진겸이었다면 방금 한 말을 들었을 때 가식을 넘어 기만이라고 생각했을 거다.
분명 그랬을 건데…….
진겸은 자신을 빤히 보는 수혁의 시선이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끼고는 주춤거리며 한 걸음 멀어졌다. 그를 본 건 며칠 안 됐지만, 무언가 위험한 느낌이었다.
“…….”
지난번 병실에서 수혁을 보며 떠올린 생물이 하나 있었다.
초롱아귀.
깊은 바닷속에 존재하는 생물로, 외모는 전혀 다르지만 미끼를 이용해 먹잇감을 유인해 잡아먹는 게 똑같았다.
그에게 잡히면 빠져나가지 못할 정도로 위험한 사람이었다.
어디까지나 소설 속 선수혁의 이미지가 그랬다. 그런데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수혁의 눈빛이 너무도 오싹했다.
진겸은 점차 쭈그러들었다. 원범의 눈빛은 날카로워 무서웠는데, 수혁의 눈빛은 다른 의미로 무서웠다. 방금까지 자신과 옷을 고르던 사람과 너무 달랐다.
“……왜 그렇게 봐요?”
새끼 고양이가 경계하는 것처럼 너무도 하찮은 모습에 수혁이 슬쩍 미소를 지었다.
“나랑 같이 있는 거 알았으니, 걱정 안 할 거야.”
“…….”
“정말인데……. 못 믿겠어?”
“……믿을게요. 진짜 밥만 먹고 돌려줘야 해요!”
“알겠어. 가자.”
아직 경계를 풀지 않은 진겸의 손에서 쇼핑백을 가져간 수혁은 어서 가자며 앞으로 밀었다.
진겸은 병원에서 나와 차를 탈 때부터 수혁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백화점 내부에 있는 식당으로 갈 줄 알았는데 향한 곳은 주차장이었다.
“맛있는 거 사 줄게. 고기 좋아해?”
어제 반응을 봤기에 알면서도 묻은 거였다.
어깨를 움츠리고 뒤따르던 진겸이 번뜩 고개를 들었다.
“좋아해요!”
언제 겁을 먹었냐는 듯이 눈동자가 초롱초롱하게 반짝였다.
‘고기’라는 단어가 이렇게까지 자극적인 단어였는지 수혁은 처음 알았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는 진겸의 모습이 희한하게도 귀여워 보였다.
수혁은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진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진겸은 고기 생각에 그걸 인지하지도 못한 채 그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분명 어제 고기 먹으러 가자고 해서 복숭아 셔벗을 먹고 알레르기가 일어나 쓰러졌으면서, 그것조차 잊은 듯했다.
수혁이 픽 웃으며 진겸을 더 해맑게 만들었다.
“다행이네. 한우 먹자. 1++로.”
한우라는 말에 진겸의 눈동자가 더욱 반짝거렸다. 게다가 1++. 생각만으로도 입에 침이 고였다.
원래 호의는 돼지고기까지라지만…… 한우잖아. 이걸 거절하는 건 정말 바보 같은 거다.
진겸이 한우를 생각하면서 입맛을 다시는 동안 수혁은 뒷좌석에 쇼핑백을 실었다. 차에 타려고 하는데 아직도 입을 쩝쩝거리고 있는 진겸이 보였다.
“그러다가 침 떨어지겠다. 얼른 타.”
“……네!”
시원한 대답이었다.
한우가 그렇게나 좋을까? 방금까지도 경계를 풀지 않더니 한우 사 준다는 말에 냉큼 풀어지는 모습이 웃겼다.
차에 타서 안전띠를 매고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진겸의 머릿속에는 한우로 가득했다.
‘어제 먹은 걸로 문제가 생겼는데 밖에서 먹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은 정말 잠깐 스쳐 지나갔다.
아쉬운 건 이 몸의 위가 작다는 거였다. 기껏 1++ 한우를 먹으러 가는데 많이 못 먹을 수도 있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진겸은 어떻게 해서든 최대한 욱여넣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차는 북적거리는 도로를 지나서 한옥으로 되어 있는 음식점에 도착했다. 주차도 깔끔하게 마친 수혁은 다 왔다고 말하려다가 자신을 빤히 보는 진겸과 눈이 마주쳤다.
“왜?”
“아까부터 느끼긴 했는데요.”
“뭘?”
“운전되게 잘하시네요.”
“……어? 어. ……어, 고맙다.”
“고맙긴요. 사실을 말한 건데요.”
수혁이 무어라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진겸은 안전띠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
내리려고 한 발을 밖으로 내밀다가 뒤에서 아무런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자 고개를 돌렸다.
“안 내려요? 여기 아니에요?”
“……맞아. 내려.”
안내를 받아 이번에도 룸으로 이동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다리를 테이블 아래로 넣는 구조였다.
주문하면서 수혁이 종업원에게 물었다.
“여기에 복숭아 들어가는 거 있습니까?”
“복숭아요?”
“예. 알레르기가 있어서요.”
다행히 복숭아가 들어가는 건 없었다. 양념이었다면 모를까 한우는 생고기였기에 괜찮았다.
괜스레 감동한 진겸이 촉촉한 눈빛으로 바라보자 수혁이 슬쩍 웃었다.
딱 봐도 복숭아가 들어갈 만한 반찬이나 메뉴는 없었다. 복숭아 청이나 간 것이 들어갈 수도 있어서 말한 것도 있지만, 사실은 반응이 궁금해서 노리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저렇게까지 감동받을 줄이야. 나쁘지 않았다.
수혁은 많이 먹으라며 직원이 구워 주는 고기를 연신 진겸의 접시에 놓았다.
핸드폰을 받아 진우에게 전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어느새 뒷전이 되었다. 당장은 1++ 한우가 먼저였다.
확실히 전문가가 구워 주니 입에서 살살 녹았다. 몇 번 씹지도 않았는데 금세 사라졌다.
진겸은 배부르게 먹고 후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었다. 조금은 느끼할 수 있는 한우의 마무리를 깔끔하게 해 주는 수정과였다.
더 먹고 싶었는데 먹지 못해 아쉬웠다. 그래도 욱여넣을 만큼은 충분히 먹었다. 목구멍까지 차오른 한우 때문에 너무 배불러서 움직이는 것도 힘들었다.
진겸이 자리에서 낑낑거리며 움직이자 마주 앉아서 수정과로 입가심을 하고 있던 수혁이 웃음을 터트렸다.
딱 붙은 옷은 아니어도 배를 내밀고 있어 아주 작게 튀어나온 라인이 보였다. 하찮은 크기가 귀여웠다.
“원하는 만큼 먹었어?”
“그러려면 더 먹어야 하는데…….”
“더 시켜 줘?”
이미 배불러서 못 먹을 걸 알면서도 한 말이었다. 더 먹겠다고 하면 고기보다는 소화제를 준비해야 할 듯싶었다.
진겸은 아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더는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지금도 조금만 움직이면 배가 아프다고 아우성이었다. 이대로 집에는 갈 수 있을지 걱정이었다.
‘너무 많이 먹었나…….’
과식하면 안 되는데 어제 먹은 스테이크의 맛이 너무 흐릿해서 저도 모르게 정신을 놓고 먹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
다 마신 수정과 잔을 내려놓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수혁이 묻자 진겸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일어나지는 못하고 버둥거리기만 하길래 수혁이 팔을 뻗었다.
진겸이 그 팔을 잡자 수혁이 힘줘 그를 일으켰다.
딱히 세게 당긴 것도 아닌데 벌떡 일어나게 된 진겸이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앞으로 꼬꾸라졌다.
숯불을 치우긴 했어도 먹던 접시들이 있는 테이블이라 위험했다.
수혁이 서둘러 잡은 팔을 뒤로 당기고 다른 팔로 진겸이 넘어지지 않게 감싸 안았다.
진겸의 얼굴이 수혁의 가슴팍에 콕 박혔다.
진겸은 부딪힌 코가 아픈데도 넘어질 뻔한 것에 놀라 숨을 헙, 들이마셨다.
“어…….”
사람이 놀라면 심장이 빠르게 뛰기 마련이다. 진겸은 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
워치를 차고 있었으면 분명 심박수가 100은 넘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별로 좋지 않은 현상이었다.
놀란 건 수혁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에서 나왔으니 분명 거기에 비치된 것들로 씻었을 거다.
그런데 어쩐지 달콤하면서도 씁쓰름한 향이 났다. 공기에 가득한 고기 냄새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진겸의 목덜미에 코를 가까이 붙였다. 숨을 깊게 들이쉬자 또 그 향이 느껴졌다. 숯불 향과 고기 냄새에 익숙해진 콧속을 정화시킨 듯했다.
수혁이 눈을 찌푸렸다. 백진겸에게서 단 한 번도 맡아 본 적 없는 향이었다.
진겸은 가까워진 수혁을 의식하기엔 놀라서 세차게 뛰는 심장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천천히 허리를 편 수혁이 굳어 버린 진겸의 등을 조심스레 쓸어내렸다.
“천천히 숨 쉬어. 차분히 들이마시고…… 그렇지. 천천히 내뱉어.”
진겸은 숨을 헐떡이다가 수혁의 목소리를 따라 호흡했다. 호흡은 점자 안정이 되어 가고 있기는 해도 여전히 심장은 빨리 뛰었다.
또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닐까 싶어 눈썹을 축 늘어트린 채 수혁을 올려다봤다. 그가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건 아니겠지만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그뿐이라 본 거였다.
수혁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촉촉한 눈동자에 저도 모르게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방금 맡은 향이 다시금 떠올랐다.
‘젠장.’
백화점에서 정장을 입고 나왔던 진겸의 모습이 떠올랐다. 헤실 웃는 모습까지 어른거렸다. 자신이 미친 게 분명했다.
혼자만의 싸움을 하는 수혁의 귓가에 떨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저 괜찮죠?”
“……그걸 나한테 물으면 어떡해. 네가 이상하면 이상한 거겠지.”
진겸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제 가슴을 꾹 눌렀다. 펄떡펄떡 존재감을 내뿜고 있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호흡이 거칠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병원 데려다줄게.”
“……집으로 갈래요.”
“혼자 있다가 쓰러지면 어쩌려고?”
“……집에 가고 싶어요.”
애절하게 올려다보며 말하는 통에 수혁이 짧게 혀를 차며 핸드폰을 돌려줬다.
“백 비서한테 전화해서 상황 설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