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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약한 악역에 빙의한 건에 대해 (17)화 (17/92)

17화

진겸은 자신에게 새로운 재능이 생긴 게 아닐까 싶었다. 물론 옷을 몇 번 골랐다고 재능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다지만 말이다.

솔직히 무얼 골라도 수혁에게는 다 잘 어울렸다. 제일 중요한 얼굴이 받쳐 주니까. 하물며 인디 핑크색 셔츠를 대 봐도 잘 어울려서 무섭기까지 했다.

누더기를 입혀 놔도 그것조차 패션으로 만들 만한 외모였다. 거기에 키도 크고 꾸준히 운동한 덕에 조화롭게 자리 잡은 근육까지.

‘성격만 꼬이지 않았어도…….’

인기 많은 서브공이 될 수 있었을 텐데.

진겸은 혼자서 상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셔츠를 다시 걸었다.

“왜? 안 어울려?”

“아니요. 너무 잘 어울려서요.”

“근데 왜 고개를 저어?”

“혼자 감탄한 거예요.”

이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냐고 캐물을까 봐 서둘러 다른 정장을 골라 들었다.

지금 수혁이 입고 있는 정장은 네이비 색이다. 회사원들이 무난하게 입을 수 있는 색상 중 하나였다. 딱 달라붙은 정장에 허벅지 근육이 성을 내고 있었다.

진겸은 아까 병원 밖에서 햇볕에 잠시 서 있을 때도 덥다고 느꼈었다. 그런데 수혁은 재킷까지 챙겨 입고 있다. 대단하다 싶었다.

아무리 에어컨이 잘 나오는 백화점이라지만 덥지 않은 걸까? 요즘은 여름에 반팔 셔츠만 입고 다니는 직장인이 더 많다는데…….

그러고 보면 어제 진우에게 골라 준 정장도 긴팔이었다. 사실 다른 걸 입는데 자신이 골라 준 거라 그냥 입었던 걸까? 하지만 반팔은 못 봤다.

‘온 김에 진우 거도 사고 싶다…….’

지금 있는 매장에도 진우에게 어울릴 만한 정장이 상당히 많았다. 수중에 돈이 있었다면 샀을 텐데 아쉬웠다. 어차피 사이즈를 몰라서 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 속상했다.

진겸은 들었던 베이지색 정장을 수혁에게 내밀었다. 밝은 것도 잘 어울릴 듯해 고른 거였다. 팔을 쭉 뻗어 몸에 대 보자 역시나 잘 어울린다. 베이지색에도 묻히지 않는 외모였다.

“안 어울리는 게 없네요.”

“……그래?”

“확실히 얼굴이 다 하나 봐요. 진우도 그랬는데…….”

수혁의 왼쪽 눈이 움찔 떨렸다. 잘 어울린다는 말은 지금까지 수없이 들어왔다. 진심으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옷을 팔기 위해 가식적으로 내뱉은 이들도 있었다. 그걸 구분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얼굴이나 목소리에서 티가 나니까.

진겸에게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거짓을 한 톨도 보태지 않은 순수한 제 마음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 주제에 이내 시선을 돌리고 백 비서 이름을 입에 담는다. 기분이 나쁜 건 아니어도 지금은 자신과 함께 있으니, 온전히 제게만 집중해 줬으면 좋겠다.

진겸이 들고 있는 정장을 물끄러미 보던 수혁이 직원을 불렀다.

“이거 95 있습니까?”

“네. 바지는 몇으로 가져다드릴까요?”

“……26으로.”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안으로 들어가 정장을 가지고 나왔다. 수혁은 정장을 건네받아 다른 정장을 보고 있는 진겸에게 다가갔다.

“이거 입고 와.”

“……제가요?”

“응. 네가 입은 거 보고 괜찮으면 사게.”

얼떨결에 정장을 받은 진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본인이 입고 어울리면 사야지. 남이 입는 걸 본다고 뭐가 다른가?

“빨리.”

진겸은 제 등을 떠미는 수혁의 손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탈의실로 들어가야 했다.

좁은 탈의실 안에서 옷을 갈아입으면서도 ‘왜 내가?’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착실히 갈아입었다.

정장을 바르게 탁탁 펴고는 단추도 잘 잠갔다. 탈의실 안에 거울이 없어서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얼굴이 예뻐서 뭐든 잘 어울릴 게 뻔했다.

“아저씨…….”

탈의실에서 나온 진겸은 자신을 빤히 보고 있는 수혁을 불렀다.

그는 진겸이 탈의실에서 나오는 순간부터 시선을 빼앗겨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응시하고 있었다.

혹시 아저씨라도 불러서 대답을 하지 않는 걸까?

“이사님?”

“…….”

“이사님!”

“어? 어…….”

수혁이 손으로 입을 가리고 슬쩍 시선을 돌렸다.

‘쓸데없이 잘 어울리네. 피부가 하얘서 그런가?’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까지 찰떡일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로 잘 어울렸다. 꼭 진겸을 위해 만들어진 옷처럼 느껴졌다.

만날 때마다 패션 감각만큼은 칭찬해 줄 만했다.

백진겸의 외모만큼은 부정할 수 없이 예뻤으니까.

그런데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빤히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린 거였다. 계속 보고 있다간 저도 모르게 손을 뻗을 것 같았다.

‘좀 위험한가?’

수혁은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문득 옳지 않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새 많이 참았더니 별생각이 다 드네.’

탁 이사 집에 얹혀살고 있어서 본의 아니게 절제한 삶을 살았더니, 제 몸이 이상해 진 게 분명했다.

수혁이 고개를 돌린 걸 보고 많이 이상한가 싶어서 뒤로 돌아 탈의실 문에 있는 거울을 봤다. 예상했던 대로였다. 역시나 잘 어울렸다.

옷을 입었으니, 옷을 봐야 하건만 진겸은 턱을 들고 얼굴을 이리저리 꺾었다. 씻을 때 말고는 보지 않는 얼굴이라지만, 확실히 보고 있으면 괜히 헤실헤실 웃음이 나는 외모다.

참 만족스러운 빙의다.

뒤에 선 수혁이 자신을 보는 게 거울에 비췄다. 여전히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별로예요?”

“…….”

“별로인가 보다…….”

수혁이 반응을 하지 않자, 잘 어울려서 기분이 좋아졌던 진겸이 금방 시무룩해졌다.

“……갈아입고 올게요.”

다시 옷을 갈아입고 나와 들고 있던 정장을 직원에게 넘겼다. 그리고 어느새 탈의실 앞 소파에 앉아 있는 수혁의 옆으로 다가갔다.

“싫어할 거면 왜 입혔어요?”

저도 모르게 뾰로통한 투가 나갔다.

“……그런 거 아니야. ……오히려 잘 어울려서 놀랐어.”

“잘 어울렸어요? 표정은 그게 아니던데…….”

수혁이 고개를 돌리고 있던 게, 제 모습이 보기 싫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 이후에도 쇼핑은 계속됐다.

수혁은 자신이 입을 거라고 해 놓고 계속해서 진겸에게 입어 보라고 권했다.

처음에는 귀찮아하던 진겸도 새 옷을 입고 거울 앞에 서면 잘난 제 모습에 연신 웃음이 났다. 게다가 친구가 없다는 말이 머릿속에 맴돌아 기꺼이 입어 주었다.

그렇게 두 사람 손에는 쇼핑백이 하나둘씩 늘어났다.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전부 산 후에야 쇼핑이 끝났다.

쇼핑하는 건 즐거웠다. 어제 신발을 정리할 때도 정말 마음에 드는 건 살포시 빼놓기도 했었다.

‘아…… 캐럿 마트에 올려야 하는데.’

산처럼 쌓여 있는 신발을 앱에 올려놔야 한다. 게다가 대부분 브랜드라서 검색해 정가가 얼마 인지도 파악해야 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없는 수혁을 위해 쇼핑을 하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지금 자신에게는 할 일이 있었다.

이젠 마냥 놀고먹는 백수가 아니었다. 물론 백진겸이 힘겹게 모은 거겠지만 뭐, 지금은 자신이 이곳에 있으니 뒷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언제쯤 집에 갈 수 있는 건가 싶어 수혁을 졸졸 쫓아가는데, 슬슬 배가 고파 왔다. 병원 밥이 맛없어서 아침을 조금 먹은 데다가 계속 걸어서 더 고팠다.

진겸이 배를 문지르고 있는데 주머니에 넣어 놨던 핸드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 형, 어디야? 택시 타면 사진 보내라고 했잖아. 집에 도착했어?

다급한 진우의 목소리에 진겸이 작게 입을 벌렸다가 다물었다. 너무 갑작스레 백화점으로 끌려온 통에 연락한다는 걸 깜빡했다.

진겸은 핸드폰을 손으로 감싸고 수혁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구석진 곳으로 향했다.

― 형?

“아, 미안. 연락한다는 걸 깜빡했어.”

― 하아……. 지금 어딘데? 집이야?

“아니. 백화점이야.”

― …….

갑자기 진우가 말을 하지 않자 진겸이 그를 불렀다.

“진우야?”

― 응…….

“연락 안 해서 미안해. 나도 갑자기 끌려온 거라 정신이 없었어.”

― 끌려가다니? 누구한테? 형. 지금 누구랑 같이 있는데?

수혁과 같이 있다고 대답하려고 했는데.

“나랑 같이 있어.”

“어?”

“점심 먹여서 안전하게 집까지 모셔다드릴게. 걱정하지 말고 탁 이사나 챙겨. 근무 시간에 얘한테 전화한 거 알면 걔 난리 난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수혁이 핸드폰을 뺏더니 할 말만 하고 뚝 끊었다.

진겸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수혁을 올려다봤다.

“뭐 하는 거예요? 주세요!”

“줄게. 이따가.”

수혁은 다시 울리기 시작한 벨 소리에 바로 거절을 누르고는 핸드폰을 꺼 버렸다. 그러고는 제 정장 주머니에 넣었다.

당황한 진겸이 그걸 보고 있다가 돌려받기 위해 팔을 뻗자 그 팔을 잡아끌었다.

양손에 짐이 있던 탓에 제대로 된 반항도 하지 못하고 끌려가던 진겸이 미간을 팍 찌푸리고는 다리에 힘을 줬다.

그래 봐야 멈추진 못했다. 오히려 그 상태로 백화점의 반들반들한 바닥에 주르륵 미끄러졌다.

“안 뺏어가. 이딴 핸드폰 가져가서 뭐에 쓴다고. 돌아다녔더니 배고파. 밥 먹고 줄게.”

“…….”

“진짜 밥 먹으면 준다니까? 나 밥 먹을 친구도 없는데 지금 핸드폰 줘서 네가 가면 혼자 먹어야 하잖아.”

“……같이 밥 먹을 테니까, 핸드폰 주세요. 그렇게 끊으면 진우가 걱정하잖아요.”

진겸의 입에서 진우를 걱정하는 말이 나오자, 수혁이 헛웃음을 지으며 걸음을 멈췄다.

확실히 오늘 자신이 한 행동은 충동적이었다.

어제 봤던 모습이 밤새 눈에 아른거렸다. 그래서 궁금했다.

확인해 보기 위해 병원을 찾아갔고, 마침 퇴원했길래 쇼핑을 핑계로 이곳에 온 거였다.

기계라고 불릴 정도로 감정이 메마른 탁원범을 흔들어 놓은 백진우. 그리고 그의 형, 백진겸.

지루하던 삶에 아주 작은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것 같아 주변을 맴돈 거였다.

그래서 당장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조금 더 데리고 놀고 싶었다.

오랜만에 재미난 걸 발견했는데 그냥 놔주기에는 아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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